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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구운몽’은 송성욱 번역본(민음사)과 정병설 번역본(문학동네)을 참고하며 읽을 만하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쓴 김만중(1637~1692년)의 삶과 작품세계를 보노라면 문득 다산 정약용을 그린 한승원의 소설 ‘다산’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어여쁜 아가씨와 사랑에 깊이 빠지듯이, 책 저술하는 사업 속으로 푹 빠져들어가자, 금방 날이 저물고 밤이 짧았고 배고픔과 추위도 잊을 수 있었다. 게다가 사약에 대한 공포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었다.”

한승원은 정약용의 글쓰기에 대한 열정을 ‘시경’에 나오는 ‘동문 밖의 연못’에 비유한다.

“그가 사랑해야 할 어여쁜 아가씨는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함께 있었다. 책을 쓰는 일이 그 어여쁜 아가씨를 열정적으로 사랑하기였다.”

유배지의 극한 상황에서 마치 여인을 사랑하듯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다산은 사약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정신적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결국 500권에 이르는 저술을 내놓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구운몽’은 김만중이 평안도 선천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쓴 작품으로 알려진다. 김만중은 조선사회에서 최고의 예학 가문으로 꼽히는 사계 김장생의 증손이다. 유학의 가풍이 뼛속 깊이 서려 있을 김만중이 어떻게 해서 자칫 도색소설로도 오해할 수 있을 정도로 애정 행각이 넘치는 소설 ‘구운몽’을 쓸 수 있었을까.

잘 알려진 대로 강직한 성격인 김만중은 자신에게 조여 오는 위협 속에서도 그 강직함을 꺾지 않아 관직에서 추방당해 두 번에 걸쳐 유배를 갔고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그런 그가 낭만적인 애정소설을 썼다. 한승원의 ‘다산’에서처럼 글쓰기를 통해 상상에서나마 절망감과 죽음의 공포를 달래며 자신의 삶을 위로하고 정신적 안정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에게 엄격한 유학자인 김만중이었기에, 이를 살짝 은폐(?)하기 위해서인지 ‘서포연보’에는 이렇게 전한다.

“멀리 어머님께서 아들을 그리며 눈물 흘리실 것을 생각하니 하나는 죽어 이별이요, 하나는 생이별이라. 또 글을 지어 부쳐서 윤 씨 부인의 소일거리를 삼게 하였는데 그 글의 요지는 일체의 부귀영화가 모든 몽환이라는 것이었으니….” 김만중이 어머니의 생일을 맞아 한편으로 어머니를 위로하고 다른 한편으로 일체의 부귀영화가 모두 헛된 것이라는 주제로 글을 지었는데, 그게 ‘구운몽’이라는 의미다.

김만중은 병자호란 때 유복자로 태어났고 21살에 미망인이 된 어머니에게 평생 효를 다했다. 김만중이 14살 때 과거 시험을 봤는데 어머니 윤 씨 부인은 아들을 시험장에 들여보내놓고 온종일 가마에 앉아서 눈물을 흘리며 기다렸다고 한다. 이 같은 어머니의 헌신에 힘입어 김만중은 두 번이나 대제학에 올랐다. 숙종 때 이재가 쓴 ‘삼관기’에는 이렇게 전한다.

“서포의 성품은 효성이 지극했다. 유복자로 태어나 아버지 얼굴을 모름을 평생의 한으로 삼았으며 어머니에 대해 깊은 사랑이 있었다. 어머니를 즐겁게 하는 일이라면 거의 옛 병아리가 놀고 어린아이가 우는 것처럼 했다. 부인이 책을 좋아했는데 옛 역사며 색다른 책 심지어 패관잡기에 이르기까지 널리 모아서 밤낮으로 어머니 좌우에서 읽고 이야기하여 어머님 한 번 웃으시는 데에 보탰다.”

자녀로 인해 이렇게 행복한 어머니가 또 있을까. 그런데 그 어머니는 아들과 손자가 내리 유배를 가 노년을 홀로 적막하게 지내야만 했다.

소설 ‘구운몽’은 서포의 말처럼 아들과 손자 등 다섯 명을 유배지로 보낸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독자인 그의 어머니에 대한 ‘속절없는’ 위로 혹은 ‘속 깊은’ 위로를 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즉 ‘구운몽’은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힐링, 즉 ‘위로와 치유의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가 마법 등 환상을 잘 이용하는 것처럼 김만중은 환시와 몽환을 주로 활용했다. 모든 현실적 욕망이 좌절된 김만중은 그 자신 또한 꿈과 미녀들을 소재로 환시와 몽환을 넘나들며 시름을 이겨내고자 했을 터다. ‘구운몽’ 도입부에 팔선녀와 성진의 첫 만남 장면은 그 시름을 이겨내기 위한 ‘수작’으로 비친다.

“손을 들어 도화 한 가지를 꺾어 모든 선녀의 앞에 던지니, 여덟 봉오리 땅에 떨어져 명주가 되었다. 여덟 명이 각각 주워 손에 쥐고 성진을 돌아보며 찬연히 한 번 웃고 몸을 솟구쳐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올라갔다. 성진이 석교 위에서 선녀가 가는 곳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구름 그림자가 사라지고 향기로운 바람이 잦아지자 바야흐로 석교를 떠났다.”

여인들의 이 ‘향기로운 바람’으로 인해 성진이 윤회의 벌을 받고 환생해 양소유로 살아가게 되면서 화려한 ‘애정 놀음’이 시작된다. 양소유는 만나는 여성들마다 이내 정을 통한다. 계섬월이나 적경홍과의 관계는 그들이 기생이어서 그렇다 하자. 귀신으로 변장한 가춘운을 대하고 한시도 그녀를 잊지 못했다. 귀신인 줄 알면서도 그리고 그 관계가 액운이 될 것을 알면서도 잊지 못한다. 혹자는 이런 양소유를 ‘여색에 굶주린 아귀’ 같다고 했다.

‘구운몽’에서 특히 흥미로운 대목은 여성의 투기에 대한 부분이다. 양소유는 처첩의 투기가 아니라 처첩들의 ‘협조’로 마음껏 욕망을 충족한다. 왕의 동생인 월왕이 축첩을 이유로 양소유를 단죄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지만, 그저 시시한 벌주로 그치고 만다.

‘구운몽’은 가부장제의 한복판에서 상층부의 삶을 살았던 남성의 욕망을 그려내고 있다. 김만중은 노모를 위해 이 소설을 지었다고 했지만, 정작 이 작품은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로 넘쳐난다. 물론 한편으로는 이런 사랑 이야기가 헛된 것이라는 불교적 인생관도 동시에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내용이 평생 수절하며 자식을 키운 어머니 윤 씨 부인에게 어떤 위로가 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을 이 소설에서는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어머니에 대한 위로보다 당장 적소(謫所)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그 자신에 대한 위안에 더 방점을 둔 듯하다.

따지고 보면 일부다처제인 조선시대에도 그 누구도 성진처럼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모두 여덟 명의 여성을 거느린 성진의 애정 욕구는 어쩌면 성적 욕구를 억압하는 유교적 가부장제에서 남성과 여성들의 성적 로망을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 또한 당차게 사랑을 선택하고 애정을 전하고 사랑을 나눈다. 진채봉은 양소유를 처음 보고 먼저 ‘러브레터’를 보내 과감하게 구애한다. 어쩌면 세속의 명성을 한껏 누렸던 김만중 자신조차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죽어가기에 부귀영화마저 한때의 헛된 꿈임을 역설적으로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구운몽’은 한바탕 꿈을 빌려 스님이던 성진의 환속 이야기를 그리면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양소유는 부귀영화와 무려 2처 6첩을 둔 ‘화려한’ 생활을 마무리하고 도를 얻으러 떠나려고 할 즈음 스승인 육관대사에 의해 꿈이 깨면서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이런 ‘구운몽’은 불교의 공(空) 사상을 빌려 삶의 덧없음을 극적으로 펼쳐 보인 철학소설로도 볼 수 있고, 여덟 여인을 거느린 호색한의 사생활을 다룬 애정소설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인생무상이나 일장춘몽을 그리고 있지만 그게 주제가 아니라는 느낌마저 든다. 그것은 이 소설을 읽은 후에 ‘일장춘몽’보다 더한 여운이 진하게 남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희곡처럼 주인공의 부귀영화와 달콤한 사랑 이야기에 누구나 빠져들고 싶어진다. 그게 바로 ‘구운몽’이 조선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지금까지 고전으로 회자되는 이유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