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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갈등은 (다 아는 것처럼) 안심번호 도입 문제에서 시작됐다. 청와대와 김 대표 양측 모두 명분으로 안심번호 문제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안심번호가 아니라 공천 때문에 갈등하고 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양측이 공천 문제로 갈등을 빚는 근본적인 이유는 다음번 총선에서 누구 사람이 더 많이 공천을 받느냐에 따라 차기 권력 구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런 첨예한 갈등은 지난 10월 5일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서도 터져 나왔다. 친박계 좌장 서청원 전 대표는 ‘언론 플레이’를 거론하면서 김 대표를 공격했다. 이는 청와대와 김무성 대표의 갈등이 언제라도 터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명분에서나 실리적인 측면에서 김무성 대표가 청와대나 친박보다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국민공천제를 주장하며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명분이 그럴싸하다. 또 국민공천제를 실시할 경우 인지도와 조직적 측면에서 앞서는 현역 의원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친박과 비박 사이에서 애매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의원들은 김 대표 쪽으로 쏠릴 가능성이 있다. 한마디로 김무성 대표 입장에서 오픈 프라이머리라고 불리는 국민공천제는, 자신에게 유리한 당내 권력 구도를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다수 의원들 지지를 끌어낼 수 있고, 또 국민 참여 확대가 정치적 추세라는 것을 내세워 정치 발전의 기수라는 이미지도 가질 수 있는 그야말로 마술 지팡이 같은 존재다.
여기까지만 보면 김무성 대표가 청와대보다는 훨씬 좋은 입지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청와대가 아무리 뭐라 해도 김 대표가 궁극적으로는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하지만 요사이 김 대표는 점점 발언 강도가 약해지고 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전략 공천은 없다고 했다가 우선추천제 이야기를 하는 것이나, 안심번호제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봐도 청와대에 꼬리를 내리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다.
김 대표의 이런 태도는 아마도, 현재 권력과 싸워 대권을 쟁취했던 경우는 과거 노태우 정권 아래의 김영삼 전 대통령 정도만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데서 배경을 찾을 수 있다. 한국 정치사에서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이 서로 갈등하고 싸우는 경우는 많았지만, 이런 경우 대부분 본선인 대선에서 패하고 말았다.
현재 권력에 대들다 망한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이회창 전 총재다. 이회창 전 총재의 경우 김영삼 전 대통령과 갈등하면서 자신의 독자 노선을 걷고 한나라당까지 창당하며 대권에 수차례 도전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반대로 김대중, 노무현 두 사람은 협력관계에 있었다. 이명박, 박근혜 두 사람 관계도 갈등은 많았지만, 대선에 가까울수록 서로 조심하는 분위기를 연출하며 갈등 표출을 삼갔다. 하지만 앞에 언급했듯,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달랐다. 만일 김 대표가 김영삼 전 대통령을 닮았다면 지금 청와대와 끝까지 투쟁하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야망 실현을 위해 옳은 선택일 수 있다.
김무성 대표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유사한 상황과 입장을 갖고 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김영삼 전 대통령의 독특한 ‘특징’을 먼저 알아봐야 한다.
우선 첫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특징’은 바로 지역 기반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권에 도전할 당시만 하더라도, 지역 갈등과 그에 기반한 지역 구도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뚜렷했다. 그리고 당시까지만 해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지역 기반인 부산은 야성이 약하다고 볼 수 없는 지역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런 당시 분위기를 한껏 누릴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지역 구도가 맹위를 떨치던 시절 명실상부한 부산 경남의 맹주였다.
두 번째로 들 수 있는 부분은 이른바 상징성에 관한 문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선에 도전하던 시기는 전두환 군부 독재의 ‘잔재’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던 시기다. 바로 그런 시대적 상황이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아무리 직선제 대통령이었다고 하더라도 군부 출신에다, 전두환 정권의 핵심 실세였던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민주화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었다. 심지어 민주화라는 단어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반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주화 운동의 양대 축 중 한 명이었고, 그래서 ‘민주화’라는 당시의 시대적 소명을 한껏 주장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세 번째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는 오랜 시절 ‘생사’를 함께했던 동지들이 있었다. 오랜 야당 생활 속에서 탄압과 박해를 함께 견뎠던 ‘동지’들이 있었기에 노태우 정권에 대들 수 있었다.
네 번째는 당시 노태우 정권은 김영삼, 김대중의 ‘다자 구도’ 속에서 탄생한 정권이라는 점이다. 노 정권은 만일 김영삼, 김대중 두 야당 지도자 간 후보 단일화가 이뤄졌다면 결코 탄생할 수 없었다. 1987년 대선 당시 노태우 후보가 겨우 30% 조금 넘는 지지율로 당선됐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한마디로 노태우 전 대통령은 야권 분열 덕을 본 것이지, 본인의 지지에 기대 대통령에 올랐던 인물이라고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바로 이런 특징들이 정치인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줬다.
김무성 대표는 이런 특징들을 갖고 있을까? 개인적 판단이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지역 기반 문제부터 보자. 과거 김영삼 전 대통령은 부산 경남의 맹주였다. 하지만 지금 김무성 대표를 부산 경남의 맹주로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더구나 지금의 부산은 과거 1992년 대선 당시처럼 지역주의에 매몰돼 있지도 않다. 물론 김무성 대표가 다른 대선 잠룡들에 비해 지역 기반이 나름 탄탄하다고 하지만, 과거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다.
두 번째로 김무성 대표가 과거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2년 당시 갖고 있었던 ‘시대적 상징성’을 갖고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그렇지 못하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정치적 추세’와 ‘시대적 상징성’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정치 과정에 있어 국민 참여 확대는 지금의 ‘정치적 추세’지만, 이런 걸 ‘시대적 상징’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특정 시대의 상징성이란 ‘시대정신(Zeitgeist)’과 관련 깊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대정신이란 시대적 추세보다는 훨씬 방대하고 더욱 절박한 개념이다. 반대로 정치 과정에서의 국민 참여 확대는 민주주의 확대를 위한 일종의 ‘수단’에 불과하다. 이런 수단은 결코 특정 시대의 상징이 될 수는 없다. 더구나 이 같은 이슈는 이미 노무현 정권 때 사용된 바 있어, 약간 진부한 느낌마저 준다. 결론적으로 김영삼 대통령과는 다르게 현재 김무성 대표는 시대의 상징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과연 김무성 대표 주위에 누가 있는가. 지금 김무성 대표 주위에는 공천을 받고 싶어 하는 정치 지망생들이 있을 수 있고, 김 대표가 대선 후보나 대통령이 된다면 어떻게 한자리할 수 없나 하는 생각에만 몰두하는 이들이 많을 수 있지만 동지는 드물어 보인다. 김무성 대표가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에 상당히 기여한 것은 확실하지만, 그때 함께한 이들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동지이지 김무성 대표의 동지는 아니었다. 때문에 김 대표가 권력에 도전할 때,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끝까지 김 대표를 도울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노태우 정권과는 달리 지난 대선에서 50%가 넘는 지지율로 당선됐을 뿐 아니라, 지금의 국정수행 지지율도 50%를 넘는다. 역대 대통령의 3년 차 지지율과 비교할 때 가장 좋은 성적이다. 노태우 정권 시절 대통령보다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지금 김무성 대표는 이 측면에서 역시 비교할 수 없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결국 김무성 대표에게 김영삼 대통령은 결코 롤모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김무성 대표가 지금 청와대와 휴전 모드로 들어갔을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갈등의 불씨는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공천 룰을 위한 특별기구의 인적 구성에서 분명 친박과 비박은 격돌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청와대와 김 대표가 더 이상 갈등하는 것이 공멸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때, 나름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정치는 생물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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