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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울 만큼 순식간에 지나가는 계절이지만 눈에 담는 장면마다 그림이다. 다채로운 색감의 단풍도 좋지만 억새와 갈대는 가을을 가을답게 만든다. 가을 남자들 헛헛한 마음을 달래주기에 아주 충분하다. 물가에 자라는 것은 갈대고, 산과 언덕에서 자라는 것은 억새다. 꽃 한 송이 한 송이는 작고 수수하지만 떼를 지어 너울거리는 하얀 솜털이 달린 뽀얀 꽃은 기가 막히게 눈부셔 마치 몽유도원 속으로 초대받은 기분이다. 오롯이 억새와 갈대가 주인공인 숲 속을 찬찬히 거닐면서 가을꽃의 매력을 음미할 땐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 부부가 셀카봉 놀이로 가을을 찍으며 놀다 억새밭 사잇길에서 모처럼 영화 속에 나오는 풍경같이 ‘나 잡아봐라’ 하고 장난을 치면 잠시나마 동심에 빠지기 딱 좋다. 사람 키만큼 훤칠하게 자란 갈대 군락 한가운데에 서면 세상과 동떨어져 자연 속에 푹 잠기는 기분이 든다. 젊은 연인들에게 가을 나들이 일번지다. 부러워하면서 욕하지 말고 중년 부부들도 따라 하다 보면 없던 정도 생기고 떨어졌던 정도 다시 붙지 않으려나.
청명한 하늘 아래 하얗게 빛을 반사하는 갈대 군락이 찬바람에 쓸려 너울거릴 때 더 멋스럽다. 그러나 억새는 해질 무렵, 석양빛을 받아 일렁이는 풍경이 낭만적인 감성을 더 고조시킨다. 가을의 어둠은 일찍 찾아오고 갈대숲 사이로 짧은 해가 떨어진다. 밤바람이 제법 서늘하니 따뜻하게 어깨와 허리를 감싸 안고 걸으며 슬쩍슬쩍 건드리다 찐하게 만지면 아랫동네가 뜨거워져서 하고 싶어진다.
그럴 때 먼 데 있는 러브호텔을 찾을 게 아니라 가까운 데 있는 갈대 속으로 개구리들이 연못으로 뛰어들듯 잽싸게 사라지면 그만이다. 그러나 어디에나 지뢰는 있는 법. 거기서 자기와 똑같은 생각을 한 동지(同志)들을 만나기 쉽다. 먼저 들어온 선배들이(?) 후끈 달아올라 사랑을 나누고 있질 않나. 낮은 포복으로 다른 자리를 찾아 앉은뱅이걸음으로 기어가서 갈대를 쓰러뜨려 폭신하게 이부자리를 마련한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비록 여러 가지 체위를 해볼 수는 없지만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혀 촉촉하게 땀까지 흘리며 한 사랑은 여운이 오래 남는다.
‘에로틱 마인드’의 저자 존 모린의 방정식은 ‘자극+장애물=곧 흥분’이라고 했다. 미국 유타대 연구에서도 남에게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성적 흥분도를 배가시킨다고 했다. 숨죽이는 밤이 숨 막히는 최고의 사랑방이다. 오래 산 부부들도 밤마다 깨를 쏟아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밥맛이 없어도 끼니를 챙기듯 어쩔 수 없이 일을 치르는 게 일상이다. 야외 섹스는 배부른 식사는 아니지만 솜사탕을 먹는 것같이 즐거운 간식이라 신선한 자극이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이제 제법 차다. 며칠 지나면 감당하기 어려운 시린 바람으로 변할 것이다. 이 가을을 순순히 보내주기엔 왠지 아쉽다. 더 늦기 전에 소설에서나 나올 것 같은 그 은밀한 공간에서의 흥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희열을 느껴보고 싶지 않나. 맨날 방바닥에서 상상만 할 것이 아니라 더 늦기 전에 늦가을 정취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억새밭에 뒹굴며 질펀한 정사를 해보면 어떨까. 비록 머리는 짚수세기가 될지언정 황홀한 분위기 덕분에 일타쌍피(?)는 물론이다. 불쌍한 억새들 자빠뜨린 김에 아까우니까 두 번은 해야 쑥대밭(?)을 만든 미안한 마음이 덜하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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