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여행을 계획할 때, 때로는 그 곳에 사는 누군가를 만나고 싶을 때가 있다. 여행자의 취향과 관련된 뛰어난 고수일 경우가 그렇다. 때로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한 번 뵙고 이야기 나눠 보았으면 하는 사람도 있다. 이번 여행도 그랬고, 앞으로 당분간 그런 여행을 하게 될 것 같다.

맛의 방주 리스트에 우리 전통차 청태전을 올린 ‘그 분’

한동안 슬로시티가 여행 욕구를 자극한 적이 있었다. 앞만 보고 달리던 도시인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간 개념임에 틀림없다. 최근에는 슬로시티에 이어 ‘슬로푸드’가 조금씩 사람들 마음을 파고드는 느낌이다. ‘슬로푸드’란 1986년 이탈리아 브라(Bra) 출신 음식 운동가 ‘카를로 페트리니’에 의해 시작된 시민 운동이다. 슬로푸드 운동은 세 가지 기준으로 취지에 맞는 음식들을 발굴하고 소개하는데, 그것은 ‘좋음(Good): 맛있고 풍미가 있으며 신선하고 감각을 자극하고 만족시키는 음식’, ‘깨끗함(Clean): 지구의 자원을 축내지 않고 생태계와 환경을 해치지 않으며, 인간의 건강을 위협하지 않도록 생산된 음식, 공정함(Fair): 사회적 정의를 지키는 음식. 생산, 상품화, 소비의 모든 단계에서 공정한 임금과 조건에 맞춘 음식 등이 그것들이다.

주요 활동으로는 음식시민모임, 지미교육(知味), 생물 다양성 보호, 음식공동체 등이 있다. 특히 눈에 띄는 활동으로 ‘맛의 방주(Ark of Taste)’가 있다. 맛의 방주란 1996년에 시작된 목록 운동인데, 잊혀지거나 과소평가되어 완전히 사라질 위험에 처한 먹을거리 리스트를 만드는 일이다. 그동안 슬로푸드 창립국인 이탈리아 푸길라(Puglia) 지역의 붉은 양파, 캐나다의 토종 흰닭(Chantecler coq), 브라질 과일 음부(Umbu) 등 500여 점이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고 한국에서도 ‘진주 앉은뱅이밀’, ‘울릉군 칡소와 섬말나리’, ‘논산시 연산오계(천연기념물)’, ‘태안 자염’, ‘장흥 돈차 청태전’, ‘제주 푸른콩장과 흑우’ 등 모두 8종이 등재되었다. 맛의 방주에 이름을 올린 식품종들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일에 푹 빠져버린’ 개개인들에 의해 복원된 소중한 가치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사라질 뻔 했던 그것들이 세상의 빛을 받아 입소문이 나고 상품 가치를 확보하기까지 그들이 흘린 땀과 눈물은 본인 아니고는 누구도 설명할 수 없다. 단, 본인들은 그 이야기를 굳이 하려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천년고찰 보림사에서 얻은 뜻밖의 수행과 공덕

장흥돈차 청태전을 복원한 김수희 씨는 요즘 힐링 여행지로 급격히 뜨고 있는 장흥군 평화리의 한 평화로운 호숫가 ‘평화다원’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곳이 그녀의 집이자 찻집이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다원 근처를 산책했다. 너른 호반, 한가로운 오솔길, 동백꽃, 포플라 가로수길, 사람을 보고 경계하며 꽥꽥거리는 거위와 오리들 모습은 그야말로 평화 그 자체였다. 잠시 후 평범한 모습의 김수희 씨가 나타났다.

장흥에서 태어나 장흥에서 평생을 살아온 평범한 촌부였던 김수희 씨가 우리나라의 전통차인 ‘청태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장흥군에 있는 ‘보림사’라는 절에 다니던 어느날이었다. 보림사는 선종의 본산이며 ‘차’에 관한 한 해남의 대흥사 못지 않은 역사와 공력을 지니고 있다. 김수희 씨는 보림사의 한 스님(훗날 환속)으로부터 청태전을 소개받고 그것을 만드는 방법까지 사사했다. 청태전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 차와는 만드는 방법부터 다르다.

“차는 찻잎을 따서 만든다는 면에서 모두 같은 것이지요. 차 이름은 모양에 따라 결정됩니다. 청태전은 보림사가 창건된 통일신라시대 때부터 마시던 차입니다.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경세유표, 가오고락, 임하필기 등에 장흥의 차 이야기 또는 청태전 이야기가 전해지지요. 우리 장흥은 고려시대 전국 19곳의 다소(茶所) 가운데 13개 소가 이곳에 밀집해 있었을 만큼 차와 샘의 본산지라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차는 잎을 덖어서 만들지만 청태전은 시루에 찌고 맷돌에 빻아 틀에 넣어 만들었지요. 그 생김새가 엽전처럼 생겼다 해서 전차, 돈차로 불렸고, 곶감 말리는 모습과도 같다 해서 ‘곶차’라 하기도 했지요. 그것을 ‘청태전’이라 부른 곳은 장흥이 유일합니다.

고형차를 만들어 처마밑에 줄줄이 꿰어 널어놓은 모양에서 ‘푸른곰팡이가 생길 것 같은 염려’가 생겨 푸를 청(靑), 이끼 태(苔), 돈 전(錢) 자를 써 그렇게 불렀다는 이야기, 걸려있는 모습에서 장흥 바닷가에서 채취한 김의 일종인 ‘청태’의 빛깔이 떠올라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질 뿐’이지요. 겨우 명맥만 유지하다 현대에 이르러 거의 사라져버리는 상황에 다다르게 된 것입니다.”

보림사 스님이 없었다면, 김수희 씨가 보림사를 출입하는 불자가 아니었다면, 청태전을 마셔보고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면, 제조법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청태전은 21세기에 이르러 자취를 감추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수희 씨가 청태전에 ‘미쳐(?)’ 장흥 산야의 야생차밭을 누비며 수확하고, 전통 방식에 의거해 청태전을 만들어 온지 20여 년만인 2008년, 장흥 청태전이 드디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기회가 왔다.

“당시 청태전은 한국에서는 잊혀져가는 차 가운데 하나였지만, 일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차라는 사실을 당시 일본의 모 교수에게 들었는데, 마침 그 교수님의 제자 한 사람이 청태전 등 차 공부를 하러 한국에 머물고 있었어요. 그 즈음 일본에서 ‘세계녹차콘테스트’가 열릴 예정이었고, 그분이 일본에 있는 스승과 상의해서 제가 만든 청태전을 출품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 왔어요. 마음을 비우고 출품했지요. 그런데 그게 그만 ‘최고 금상’을 받았지 뭡니까?”

세계녹차콘테스트로 명성 부활

한국, 일본, 중국에서 90여 종의 차가 출품된 콘테스트에서 최고 금상을 받게 되었으니 그런 쾌거가 또 없었다. 장흥돈차 청태전은 그렇게 세상에 다시 알려졌지만 김수희 씨는 그것을 자신의 영달이나 매출 증대에 연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야생 차밭을 임대해 주던 주인들이 임대를 취소하는 사태(?)가 벌어져 야생차 구하기가 더욱 어려워지는 일까지 생겼다. 다행히 장흥 일대에서 가장 넓은 야생차밭을 갖고 있는 보림사와 지역의 뜻있는 야생차 자생지 땅 주인 등의 도움을 받아 차 확보는 곧 정상화되었고 가공한 차를 보관하는 전용 시설까지 갖춰 숙성과 발효 과정을 거친 차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게 되었다.

“지금은 도시에 나가 살던 아들이 저를 도와 함께 일 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맛의 방주’ 행사 때도 아들이 참석했었지요. 아들이 제 일을 가업으로 물려받으니 마음 든든합니다만, 시골로 왔더니 장가 가기가 어려워진 게, 그게 참으로 안타깝기도 합니다. 세계녹차콘테스트 이후 장흥돈차 청태전을 가공하는 개인과 조합이 많이 생기고 있어요. 궁극적으로 좋은 일이지요. 간혹 제가 거둔 성과를 슬쩍 가져가려는 사람도 있어서 마음 상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찾아와 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장흥돈차 청태전 마시는 법은 간단하다. 물 500 ~600㎖를 팔팔 끓인 뒤 청태전 한 덩이(7~9g)을 넣어 약 5분 간 우려낸 뒤 마시면 된다. 3~4회 우려내도 맛과 향, 영양이 그대로 유지되는 특징도 있다. 프라이팬을 약불에 달궈 3분쯤 구운 뒤 끓는 물에 넣으면 조금 다른 맛을 누낄 수도 있다. 청태전은 과거 속앓이를 할 때 먹는 상비약으로도 활용되었고, 지금도 감기 초기 증상이 나타나면 청태전에 생강, 모과, 유자, 쑥 등을 함께 넣어 마시면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김수희 씨가 만든 청태전을 구입하려면 장흥 평화다원을 찾아가거나 전화로 신청하면 된다.

평화다원 위치 전남 장흥군 장흥읍 평화리 74-1 구입 문의 010-9214-2974, 010-8615-1364, 061-863-2974

그분 김수희 씨가 사는 장흥의 여행지

참 좋은 편백나무숲

억불산 우드랜드 

장흥은 남도를 대표하는 숲의 고장이다. 천관산, 유치산, 억불산 등은 그 깊이조차 알 수 없는 깊은 숲으로 이뤄져 있다. 우리나라 남해안의 지형은 서울 등 중부지역이나 강원도 등에서 흔히 보는 산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능선의 모습이 일자인가 하면 울퉁불퉁한 실루엣이 마치 아이들이 산 그림을 대충 그려놓은 것 같은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산과 들판 곳곳에 바위들이 삐죽삐죽 올라와 있다는 점이다. 억불산의 경우 마주볼 때 맨 왼쪽에 엄지 손가락을 곧추세운 듯한 모습의 바위도 눈에 띈다. 이름하며 ‘며느리바위’가 그것이다. 못된 시아버지를 벌하려는 부처님의 뜻에 따라 아들 ‘개동이’를 업고 억불산으로 들어가던 착한 며느리가 ‘날 두고 혼자 어딜 가느냐’는 시아버지의 목소리를 환청으로 듣고, 그만 스님의 ‘뒤돌아 보지 말라’는 당부를 잊고 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만 아이와 함께 바위가 뒤었다는 전설을 지닌 바위다. 며느리 바위가 있는 억불산 아래는 20여만 평의 편백나무 숲이 펼쳐져 있다. 우드랜드는 바로 그 편백숲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는데, 그 숲길을 걸으며 피톤치드향에 휩싸인다. 산 중턱쯤 올라 햇살 담뿍 받고 있는 장흥 시가지를 내려다 보면 저절로 장흥 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곳에 있는 나무와 숲 체험 개념의 각종 숙박시설들은 2개월 전 밤 10시부터 예약을 실시하는데, 동시 접속자가 너무 많이 예약에 성공하는 게 로또에 당첨될 확률만큼 치열할 정도다.

위치 장흥군 장흥읍 우산리 우드랜드길 180, 061-864-0063

청태전 복원의 인연

가지산 보림사

김수희 씨가 청태전을 처음 맛보고, 그 향기와 제조 방법에 매료되기 시작했고, 지금도 사찰 뒷산에 열린 야생차로 청태전을 만들고 있다는 바로 그 절, 가지산 보림사. 봄볕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곳저곳에 설치된 공사용 가림막 때문이었을까? 보림사의 첫인상은 어쩐지 퇴락한 사찰의 느낌이었다. 방문 시간이 일요일이었음에도 절을 찾는 신도도, 스님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보림사는 출발 시기가 통일신라시대인 서기 759년이었으니 올해로 1255년이 된 고찰이다. 흙과 풀을 얽기설기 엮어 만든 초암 형태로 시작된 보림사는 100여 년 후 보조선사 체징 스님에 의해 보림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선종을 맨 먼저 도입한 절이며 가지산파의 본도량이기도 하다.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융성했던 보림사는 그러나 한국전쟁 때 이곳이 빨치산 유격대가 머물렀던 곳이라는 이유로 군경토벌대에 의해 일주문과 천왕문을 제외한 20여 동의 건축물이 불태워져 버렸다. 60년대 후반부터 차근차근 복원 작업이 시작, 지금 그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다. 경내에 국보 제44호인 3층 석탑 및 석등, 국보 제117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155호인 동부도, 보물 제156호인 서부도, 보물 제157·158호인 보조선사 창성탑 및 창성탑비 등이 있다. 대웅보전 등 가람을 살펴보는 일 외에도 가지산자락의 야생차밭, 비자림, 산림욕장 등도 여행자의 기분을 부추기는 예쁜 풍경들이다.

평화다원에서 승용차로 40분 거리에 있다.

위치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로 224, 061-864-2055 http://cafe.naver.com/bolimsa

장흥에서 산다는 것

토요시장과 귀촌 PD 이야기

장흥토요시장은 토요일에만 열리는 시장이 아니라 매일 열리는 상설장이다. 이름이 ‘토요시장’일 뿐이다. 시장 규모는 서울의 어지간한 재래시장보다 큰 편이다. 이곳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고 소박한 시장이었는데, 예능 프로 <1박2일>에서 장흥삼합(소고기+키조개+표고버섯)이 소개되고 우드랜드, 유치자연휴양림 등이 치유의 숲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함께 급속도로 동반 성장했다. 여행을 함께 한 친구들은 토요시장에서 소고기와 키조개를 사 5년 전 귀촌한 프리랜서 다큐 PD의 집을 찾아 그곳에서 먹고 마시고 잠들었다. 표고버섯은 귀촌 PD가 뒷마당 그늘에서 재배 중이라 해서 구입하지 않았다. 귀촌 PD의 집은 장흥의 한 산골에 있었는데, 워낙 시골인데다 관광지도 아니어서 130여 평에 멀쩡한 집까지 딸린 곳을 3000만원도 안되는 돈을 주고 샀다고 했다.

공기 맑고 인심 좋고 승용차 한 대 있으면 교통도 전혀 불편하지 않은 이곳에서 그들 부부는 정말 그림처럼 살고 있었다. 준비한 삼합으로 저녁 식사와 수다를 나눠 먹고 군불 땐 황토방에서 오랜만의 숙면을 즐긴 뒤 이른 아침 이장님의 마을방송 소리에 눈을 떴다. “아, 아! 버섯농사를 짓기 위해 도시에서 온 젊은이들이 마을 어른들께 인사 드린다 하니 12시까지 마을회관으로….”

귀촌 PD처럼 이곳에 살며 텃밭 농사를 지으며 지내다 일 년에 너덧 편의 다큐프로그램을 만들어 방송사에 제공하며 돈벌이를 하는 프리랜서들은 장흥 특산물인 표고버섯 등 특용 작물을 재배하며 새로운 삶에 도전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