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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가 활약할 당시에도 ‘상제(上帝)’와 ‘천(天)’처럼 사상계 주역이 뒤바뀌는 상황이 연출됐다. 주나라가 건국하자 ‘천(하느님)’은 상제를 대신해 자연과 사회의 운명을 결정하는 근원으로 올라섰다. 그 이후 오늘날까지 하느님은 우리나라의 애국가에 나오듯 물리적 형태인 파란 하늘과 달리,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고 인간을 보호하는 인격적인 특성을 지니게 됐다. 하지만 천은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그 지위와 권능이 도전을 받아 회의의 대상으로 떨어졌다.
우리는 이런 사례로 ‘시경’에 나오는, 하늘과 부모를 원망하는 ‘원천시(怨天詩)’를 들 수 있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사회 혼란은 풀릴 가망이 안 보이자 사람들은 해결되지 않는 고통의 원인으로 하늘과 부모를 지목하며 강한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예컨대 ‘정월(正月)’에서는 세상살이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원망했다.
“부모님 어찌 나를 낳아 나를 힘들게 하는가. 지금보다 먼저 낳거나 아니면 뒤에 낳지, 좋은 말도 입에서 나오고 나쁜 말도 입에서 줄줄 나오네. 근심은 더욱 깊어지고 모욕을 당한다네.”
‘절남산(節南山)’에선 “하느님이 재앙을 내려 혼란이 연거푸 닥쳐 사람들의 입에 좋은 말이 없으니 원망하지 않을쏜가?”라고 했다. 하늘이 모든 것을 낳은 근원이면서도 불의의 세상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무기력한 존재로 그려진다.
이렇게 위상이 실추한 상황 아래 천은 세계의 생성과 질서를 보증하는 근원의 자리에서 점차로 물러나게 됐다. 당시 자연 현상과 사물의 본성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심화되면서 사람들은 신적 존재에만 의지하지 않으려 했다. 위나라 서문표(西門豹)는 홍수 예방을 위해 하백(河伯)의 신에게 처녀와 혼수를 희생물로 바치는 고래의 제의가 무당 일파의 속임수라는 점을 밝히며 행사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그 결과 천은 ‘손자병법’에서 보듯 기온과 기후 등 사람의 실생활에 영향을 주고 풍향과 기상 등 전쟁에서 작전을 짤 때 고려해야 하는 ‘요인’으로 간주됐다.
묵자는 신분 세습을 넘어 능력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숙명론의 사고를 극복하고 노력이 보상을 받는다는 응보적 정의를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묵자는 ‘비명(非命)’에서 숙명론을 비판하고 귀신이 존재한다는 ‘명귀(明鬼)’와 하느님의 뜻이 있다는 ‘천지(天志)’를 통해 응보적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당시 ‘하느님의 뜻’은 원천시의 등장에서 보이듯 사실 춘추전국시대에 시효가 끝난 사상으로 취급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묵자는 하느님이 존재할 뿐 아니라 실제로 세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는 식으로 천지의 의미를 재정립해 응보적 정의를 입증하려 했다. 그 논증 과정을 짚으면서 하느님의 부활이 갖는 종교사적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자.
묵자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다른 곳으로 도망가는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집 안에서 사고를 치면 집을 떠나고, 한 나라에서 죄를 지으면 다른 나라로 도망을 간다. 여기서 묵자는 도망을 가면 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보다 벌이 무서워서 도망을 갈 수밖에 없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렇게 도피할 곳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않으려고 엄격하게 경계하는데, 도피할 곳이 없다면 한층 더 엄격하게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묵자는 당시의 격언을 인용했다.
“이처럼 환히 밝은 날에 죄를 지으면, 장차 어디로 도망칠 것인가(晏日焉而得罪, 將惡避逃之).”
하느님은 세계를 모두 굽어보고 있어서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고 사람은 하느님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갈 곳이 없다. 따라서 묵자는 ‘서경’과 ‘시경’ 등에 나오는 인격신으로서의 하느님을 부활시키고자 했다.
이어서 묵자는 “하느님이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싫어하는가(天何欲何惡)”라는 문제를 탐구했다. 앞에서 살펴본 ‘도망칠 곳이 없는 하느님’이 소극적으로 불의를 바로잡는 측면이라면, 지금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하느님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뜻(정의)을 실현하고자 하는 측면을 말한다. 묵자는 “하느님이 정의를 바라고 불의를 싫어하므로 지도자가 세상 사람들을 이끌고 정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天欲義而惡不義, 然則率天下之百姓, 以從事於義)”고 명시적으로 밝혔다.
하늘이 정의를 바라고 불의를 싫어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세상에 정의가 있으면 살 수 있고 정의가 없으면 살 수 없으며, 정의를 지키면 부유해지고 정의를 안 지키면 가난해진다. 하느님은 이 세상이 어떻게 되거나 사람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관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뜻을 드러내며 세계의 질서와 개인의 화복에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당시 사람들은 세계의 질서 또는 개인의 화복을 하느님의 의지와 연결시켜서 생각하지 않았다. 묵자는 그런 사유 자체가 잘못됐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의지를 인정하지 않으면 세계와 개인이 정의의 실현을 위해 나아가야 하는 힘의 근원을 확보하지 못하게 된다. 때문에 과거의 이상적인 제왕들, 예컨대 우임금과 탕임금, 문임금과 무임금 등은 정의를 실현해 제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 그들은 제왕이 된 뒤 희생물을 마련해 제사를 지내며 하느님에게 복을 빌었던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묵자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정치가 의정(義政)이고, 하느님의 뜻을 어기는 정치가 역정(力政)이라고 봤다. 의정은 정의에 따라 이뤄진 정치고, 역정은 오로지 힘의 논리에 의해 이뤄지는 정치다. 구체적으로 보면 의정은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침략하지 않고, 큰 가문이 작은 가문을 빼앗지 않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위협하지 않고, 귀한 자가 천한 자를 멸시하지 않고, 영리한 자가 어리석은 자를 속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정이 실현되면 위로는 하느님에게 이롭고, 가운데로는 귀신에게도 이롭고, 아래로는 사람들에게도 이로워진다. 의정이 곧 세상의 모든 존재만이 아니라 귀신과 하느님에게도 이로움을 갖다주는 정치가 되는 것이다. 즉 정의에 따른 정치가 정치적 평화뿐 아니라 물질적 복지도 갖다주는 최상의 정치인 셈이다.
역정은 의정과 반대다. 역정은 힘의 논리에 따라 강하고 영리한 나라(사람)가 약하고 어리석은 나라(사람)를 짓밟고 빼앗는 정치다. 이런 정치는 일시적으로 강하고 영리한 나라와 사람에게 이로울지 모르지만 결국 귀신에 의해 징벌을 당하고 하느님의 개입에 의해 처벌을 받아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
묵자는 권위를 잃어버린 하느님을 왜 부활시켰을까.
루마니아 출신 종교학자인 엘리아데에 따르면, 세상의 다양한 문화에는 세계를 만든 최고신이 등장한다. 동아시아의 하느님도 최고신에 해당된다. 세계를 만든 다음 최고신은 자취를 감추고 농사, 기후, 출산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기능신이 등장한다. 기능신은 세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기능신이 맹활약하는 즈음에 최악의 가뭄, 끝없는 홍수, 지루한 전쟁 등 세계의 파멸적 상황이 나타난다. 기능신이 이룩한 성과가 축적되지 않고 사라지는 형국이다. 이때 그동안 사라졌던 최고신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 잃어버린 질서를 수립한다.
엘리아데의 논리와 비슷하게, 묵자도 춘추전국시대에 사라졌던 최고신으로서의 하느님을 부활시켜 끝없는 혼란의 세계를 종식시키고자 했다. 후대 연구자들은 “묵자처럼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 이미 철 지난 하느님을 왜 부활시켰을까”라는 의문을 품었다. 그들은 묵자가 하느님을 실제로 믿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요청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부활의 논리를 펼쳤다고 본다. 이렇게 되면 묵자는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서 필요에 따라 하느님을 끌어들인 셈이다. 이것은 묵자를 너무나도 계산적인 사람이거나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묵자가 고통받는 약자를 도우며 끝 모를 혼란을 종식시키고 싶은 열망이 얼마나 강했고 의정을 진정으로 바랐는지 이해한다면 그가 하느님을 믿었다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
[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대학장 / 일러스트 : 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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