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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7년 전쟁(1592~1598)이 종결된 후인 1604년 10월 27~28일 경복궁 신무문 북쪽 회맹단(현재 청와대 자리)에서는 ‘공신회맹제’(功臣會盟祭)가 성대히 거행됐다. 공신회맹제는 조선시대 공신들이 모여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의식이다.

 

선조는 임진왜란 공신 중 생존해 있는 63명을 불러 공신교서를 내리고 그 공로를 치하하는 잔치도 열었다.

그러나 이날 행사에는 공신 5명이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국난 극복과 국가의 새 출발을 대외에 선포하기 위해 왕이 친히 마련한 중대한 자리에 불참한 그들은 누구이며 빠진 이유는 뭘까.

 

△공신회맹제 모습을 묘사한 보물 668호 태평회맹도. 국립진주박물관 소장.

이를 파악하려면 선조 37년 초겨울 밤에 펼쳐진 ‘회맹제’ 장면을 그린 ‘태평회맹도’(太平會盟圖)를 검토해야 한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공신 선정 논의를 거쳐 1604년 6월 25일 호성(扈聖), 선무(宣武), 청난(淸難)을 각 1등, 2등, 3등으로 구분해 책훈했다.

호성공신은 왕을 호종한 공로로 86인을, 선무공신은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거나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한 공로로 18인을 각각 결정했다.

청난공신은 난리 중에 발발한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인물들이다.

 

선조는 10월 27일 밤 11시부터 28일 새벽 4시까지 5시간 동안 회맹단에 공신을 초대해 공신회맹제를 거행했다.

초청 대상 공신이 유고 상태였을 때는 적장자를 불렀다.

 

선조는 이 장면을 그림으로 제작토록 명했는데 이것이 바로 태평회맹도다.

태평회맹도는 2년 여 제작 기간을 거쳐 1607년 2월 당시 참석자 모두에게 기념으로 지급됐다.

이 가운데 국립진주박물관에 보관 중인 태평회맹도는 선무공신 2등에 올랐던 권응수에게 내려진 것으로 회맹제를 거행하는 모습과 여기에 참석한 공신들 명단(공신 명칭, 성명, 자, 생년, 본관)이 수록돼 있다.

 

사적인 계회(契會, 계모임)를 나타낸 그림은 다수 존재하지만 공적인 회맹제 장면을 담은 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권응수의 다른 유물들과 함께 1980년 보물 668호로 지정됐다.

 

△선조가 마련한 공신회맹제에 불참했던 북인의 영수 이산해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런데 태평회맹도에 기록된 공신 명단에는 모두 63명이 적혀 있지만 그림에는 58명만 그려져 5명이 모자란다.

태평회맹도와 회맹제에 참석한 공신들을 기록한 ‘십오공신회맹문’을 비교해 보면 명재상으로 이름난 류성룡(1542~1607), 북인의 영수 이산해(1539~1609), 옥중의 이순신을 변호해 구원한 정탁(1526~1605), 이순신 막하에서 여러 해전에서 공을 세운 이운룡(1562~1610), 남절이 불참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들 가운데 류성룡과 정탁은 노병이 들었고 적장자도 지방에서 올라오지 못했으며 이운룡은 상중(喪中)이라고 십오공신회맹문에 불참 상유가 적혀 있다.

 

△옥중 이순신을 변호해 구원한 정탁 초상. 그 역시 공신회맹제 참석하지 않았다.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청주 정씨 약포종택 기탁.

그러나 류성룡 시문집인 ‘서애문집’ 내용은 이와 전혀 다르다.

이에 따르면 류성룡은 공신으로서 회맹에 참석하라는 어명을 받았지만 왕에게 상소해 녹훈 취소를 요구하면서 회맹제 불참을 통보했다.

선조의 남자이면서 호성공신 대표 주자인 류성룡이 왕에게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다.

선조는 거듭 나오라고 간청했지만 그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탁 역시 선조의 공신 책훈이 호성공신에 편중돼 있으며 특히 의병이 단 한 명도 포함되지 않은 데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선조의 리더십은 큰 위기에 직면했다.

임금은 왜군이 쳐들어오자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달아났으며 전란에 대처하는 과정에서도 우왕좌왕해 백성에게 원성을 샀다.

선조는 이처럼 실추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전쟁의 공을 원병을 보낸 명나라에게 전적으로 돌리고 전쟁터에서 목숨을 내놓고 싸웠던 무장들 공로는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는 한편 도망가는 자신을 호종한 인물들도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

그 결과 호성공신이 선무공신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상식 밖의 논공행상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왕의 처사를 두고 자신을 공신에서 삭제해 달라고 요청하는 공신들이 쇄도했다.

백사 이항복은 호성공신 1등에 봉해졌지만 “장수들 공로에 비하면 부끄러운 심정”이라며 자신을 명단에서 빼 달라고 간청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 나라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했던 의병에 대한 대우는 더욱 차별적이었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위험한 인물로 낙인 찍혀 감시를 당하자 현풍 비슬산으로 들어가 생을 마감했다.

전라남도 광주 전쟁영웅 김덕령은 더 비참해 이몽학의 난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죽여 버렸다.

 

공신회맹제 참석을 거부한 5인 중 중심에 있던 류성룡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주인공(행주대첩 권율, 한산대첩 이순신, 진주대첩 김시민)을 발탁했으며 영의정으로서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그에 대해 스승인 퇴계 이황은 일찍이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했고 정조도 “참으로 우리나라의 유후(留侯, 한나라 고조 유방의 공신 장자방)”라고 평했다.

 

하지만 그 역시 그가 비호했던 장수와 의병들 신세를 면치 못했다.

선조의 의중을 간파한 반대파의 중상비방과 탄핵을 받아 결국 삭탈관직을 당하고 낙향했다.

그는 초상화 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글 배한철 기자│자료제공 매일경제 발행일 2016.08.26│기사입력 2016.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