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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무제는 주부언을 파격적으로 등용했다. 주부언은 꾀주머니였고 무제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
그는 무제의 수족이 되어 제후의 힘을 무력화 시키는 일에 앞장섰고 그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하지만 주부언은 결국 토사구팽 당했다. 그의 가장 큰 약점은 유학자, 관료, 황족의 공적이 되었다는 점이다. 즉 단 하나의 탈출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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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주부언에게 ‘독 묻은 칼’을 주다 

유방이 한나라를 세운 기원전 2세기경. 그가 이룬 국가는 기반과 기둥 그리고 지붕만 있는, 모양새만 집이었다. 그 안에 채워 넣어야 할 것이 태산이었다.
유방의 후예들은 벽도 세우고, 가재도구도 넣어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의 모양을 갖추어 나갔다. 제국이 건설되고 50여 년이 지났다.
6대 황제 경제는 강력한 황제가 되고자 했지만 제후국의 세력은 만만치 않았다. 당시 제후국들은 ‘황족인 유 씨만이 제후국의 왕이 될 수 있고 제후국은 장자 상속을 원칙으로 한다’는 고조 유방의 유지에 따라 정통성과 군사력, 경제력에서 황제와 버금가는 세력을 유지했다. 

당시 한나라는 총인구 약 1300만 명, 지역은 59개 군, 10개 제후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중 42개 군, 850만 명이 10개 제후국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고 있었다. 경제는 장안의 궁전에서 천하를 호령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당시 한나라는 황제와 제후국 10명의 왕이 통치하는 일종의 집단지도체제였다.
경제는 이를 타파하고자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그의 아들 유철이 7대 황제, 무제가 되었다.
16세에 황제가 된 무제는 나이는 어리지만 무제는 영리하고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야심가였다. 

무제는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첫째는 국가의 통치 이념을 확립하는 것, 둘째는 제후국의 힘을 약화시키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루는 것, 셋째가 고민거리인 북방 흉노족을 정벌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황제 중심의 국가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무제는 세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신분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찾았다.
그때 발탁된 인재들이 바로 동중서, 공손홍, 사마천, 사마상여, 위청, 곽거병, 장건 그리고 주부언이었다. 무제는 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통치 이념을 확립하기 위한 작업은 유학자인 동중서와 공손홍이 맡았다. 이들은 도교를 몰아내고 유학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도입했다.
유학은 군주에 대한 충성과 예와 인을 강조하는 사상, 무제의 입맛에 딱 들어맞았다.
무제는 도교 신봉자인 할머니 두태후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지만 무제는 할머니와 대결하지 않고 기다렸다.
결국 두태후가 죽자 무제는 유학을 나라의 근본 이념으로 선포했다.
무제는 하층계급 출신 장군 위청과 곽거병을 중용했다. 두 사람은 무제의 신임을 바탕으로 흉노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무제는 제후국의 힘을 약화시킬 계책의 책임자로 주부언을 선택했다. 무제의 세 가지 숙원 중 이것이 가장 어려운 목표였다.
어설프게 일을 하면 황족 간의 내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무제는 주부언을 파격적으로 등용하고 권력을 주었다. 주부언은 꾀주머니였고 무제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
그는 무제의 수족이 되어 제후국의 힘을 무력화 시키는 모든 조치에 앞장섰고 그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하지만 주부언은 결국 토사구팽 당했다.
그는 제후국의 황족, 공손홍 등 관료조직 그리고 동중서를 중심으로 한 유학자 집단의 공적이었다. 주부언 역시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무제를 믿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돌아온 것은 공손홍의 모함이었고 무제는 그 모함을 쉽게 받아들여 주부언과 그 일족을 모두 죽였다.
한때 권력의 핵심으로 수천 명의 빈객을 거느리며 위세를 누리던 주부언은 죽어서 그의 시신을 거두는 이조차 없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역사는 주부언의 벼락출세와 권력 그리고 토사구팽을 필연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아무도 믿지 않는 무제의 성격에서 기인했지만 무엇보다 정치적 뿌리도 없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성장했던 주부언의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주부언은 교만했다. 그는 오랜 고생 끝에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 권력을 칼춤 추듯 휘둘렀다.
자신과 대척점에 섰던 자들, 자신을 무시했던 자들, 그리고 제후국의 숙청에 너무나도 가혹하게 앞장섰다. 즉 악역을 충실하게 수행한 것이다.
무제가 그에게 준 권력은 그를 키워낸 자양분이었지만 그를 죽일 수도 있는 독약이었다.
주부언은 이를 간과했다. 역사는 주부언의 처세에 대해 단 한마디로 안타까움을 담은 충고를 보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처마 밑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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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상소를 올리고 저녁에 발탁되다 

주부언은 제나라의 뿌리였던 산동성 임치현 태생이다. 그의 집안은 빈약하고 가난하다.
주부언은 종횡가를 공부했다. 종횡가는 춘추전국시대를 풍미했던 학문으로, 귀곡자를 시조로 소진과 장의를 배출한 문파였다.
이들은 시대의 흐름과 세력의 강약을 판단해 수많은 계책을 만들어내고 이를 각 제후들에게 유세하고 다녔다. 아는 것, 머리에 든 것이 많아야 했다.
주부언은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많은 곳에서 유세를 했지만 아무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제나라에서 홀대받았고 특히 유학자들은 주부언을 무시하고 배척했다. 주부언은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돈을 빌리려 했지만 그에게 단돈 한 푼을 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주부언은 제나라를 떠나 연나라, 조나라 등 각 제후국을 돌아다니며 유세를 폈지만 그 누구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기원전 134년, 주부언은 결단을 내리고 황제가 있는 수도 장안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가 주부언이 목표로 삼은 사람은 장군 위청이었다. 그는 무제의 최측근이었다. 위청의 어머니는 노비 출신이었지만 무제는 위청의 재주와 무술을 높이 사 그를 발탁하고 군권을 맡겼다.
그리고 그를 장평후에 봉하고 위청의 누이를 자신의 빈으로 삼았다. 한마디로 위청은 떠오르는 ‘공식 실세’였다. 그는 주부언의 신세를 딱히 여겨 식객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장안의 관료, 학자들은 모두 주부언을 멀리했다. 주부언은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사는 데는 재주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청은 주부언이 단순히 말을 앞세우는 떠돌이 유세꾼이 아닌 숨겨진 보석임을 알았다. 위청은 무제에게 주부언을 추천했다.
무제는 반응이 없었다. 몇 번이나 위청이 “주부언이란 자가 매우 영특합니다. 폐하께서 한 번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좋겠습니다”라고 간청했지만 무제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무제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는 경제의 10번째 아들로 결코 황제가 될 수 없는 위치였다.
무제의 어머니 왕태후는 비록 시녀 출신이었지만 영특한 여자였다.
그녀는 태자를 모함해 몰아내고 자신의 아들 유철을 태자에 올리는데 성공했다. 정치적 감각, 배포에서 남자 못지않은 여걸이었다.
무제는 비록 16세의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지만 탁월한 영웅이자 야심가였다.
그는 서자 출신으로 서얼의 서러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제는 인재 등용에 있어 가문과 귀천을 따지지 않았다.
무제는 각 지역의 인재를 추천받고 자신이 직접 면담을 해 선발했다. 당시에는 이를 ‘대책(對策)’이라 불렀다. 

문은 열려 있었지만 그 자리까지 가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길이었다. 그 길을 위청이 주선했지만 주부언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은 것이다. 

주부언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무제에게 직접 상소를 올린 것이다.
상소엔 한나라의 각종 법률과 제도 정비 그리고 흉노를 상대하는 계책이 담겨있었다. 무제는 이를 읽고 바로 주부언을 불러 ‘대책’을 실시했다. 그리고 주부언의 날카로운 정세 판단, 현안에 대한 해석과 대책에 탄복하고 주부언을 바로 낭중으로 임명했다. 40여 년을 가난과 무시 속에서 오로지 관직에 출사하는 것이 목표였던 주부언의 오랜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주부언, 무제의 책사로 벼락출세하다 

주부언은 무제의 책사로 부상하며 측근이 되었다.
무제는 주부언을 파격적으로 승진시켰다. 낭중에서 중랑, 중대부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무제는 주부언에게 합법적이고 부작용 없이 제후국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방법을 찾으라고 명한다.
주부언은 무제의 권력욕을 잘 알고 있었다. 주부언은 계책을 냈다.
그 첫째는 중원의 부와 권력의 강제 이동이었다. 무제는 황제가 되자마자 자신의 능부터 결정했다. 무릉을 능으로 결정하고 그 개발을 주부언에게 맡겼다.
주부언은 중국 각지의 부호와 권세가, 지역 호족들의 무릉 이전을 추진했다. 이는 두 가지 효과가 있었다.
각처의 실력자를 무릉 한 곳에 모으자 감시가 용이해졌고 이주를 통해 토착세력의 형성 또한 막을 수 있었다. 무제는 만족했다. 주부언은 둘째 단계를 위해 무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옛날에는 제후들의 영지가 백리를 넘지 않아 다스리기 용이했지만 지금은 천 리에 이릅니다. 제후들은 평화 시에는 부와 권력에 취해 교만해지고, 조정이 어지러워지면 자신의 봉토에 숨어 천자의 명을 따르지 않아 결국 조조와 같은 반역의 무리가 생기게 됩니다. 봉토와 제후 작위를 승계하는 법을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은 제후의 자제가 수십 명이 있어도 적자 이외에는 아무도 봉토와 작위를 이어받지 못해 부작용이 많습니다. 제후의 자제는 적서를 막론하고 봉토를 상속할 수 있고 제후가 될 수 있게 법을 세우면 자연스럽게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무제는 주부언의 계책을 법으로 제정했다. 이를 ‘추은령(推恩令)’이라 불렀다.
주부언의 계책은 기막힌 묘수였다. 제후들도 상속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모든 자식에게 봉토를 나누어 줄 수 있게 되자 시끄러운 집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주부언은 달랐다. 그는 추은령을 통해 제후의 봉토를 자식들에게 고루 상속함으로써 점차 강력한 한 명의 제후 탄생을 미리 방지한 것이다.
물론 반대 의견도 있었다. 무제는 이를 제압하기 위해 주부언을 직접 제후의 영지로 보내 감찰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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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황제만 바라본 외고집 

주부언은 제나라로 향했다. 그야말로 금의환향이었다.
아무도 그를 상대해주지 않아 고향인 제나라를 떠나야했던 주부언이 재상이 되어 고향을 찾은 것이다. 주부언은 제나라에 부임하자 형제, 친척과 친구들을 모두 한자리에 불렀다.
그리고 선언했다. 

“내가 제나라에 있을 때 형제는 물론 누구도 나에게 의복 하나, 밥 한 끼 주지 않았다. 그 어떤 집에서도 주인은커녕 그 집의 빈객도 나를 집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나는 무시당했고 가난했다. 이제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돌아오니 너희들은 수백리 밖에서 나를 맞이하고 고개를 숙였다. 여기 황금 500금이 있다. 이를 고루 나누어 주겠다. 그리고 이제부터 너희 모두와 인연을 끊겠으니 다시는 나를 찾지도, 아는 채도 하지 말고 내 집 문앞에 발걸음을 하지 않도록 하라.” 이는 주부언의 조롱이었다.
 
주부언이 제나라에 부임한 진짜 목적은 제나라 왕 유차경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감찰을 진행하던 주부언은 유차경이 누이인 기옹주와 간통한 사실을 적발했다. 주부언은 두 사람의 간통을 묵인한 환관과 시녀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그리고 유차경을 위협했다. 위기에 빠진 유차경은 비록 자신이 제나라 왕이자 황족이었지만 살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차경은 연나라 왕 유정국을 떠올렸다.
유정국은 아버지의 첩과 간통해 아들을 낳았고 아우의 아내를 뺏어 첩을 삼는 등 패륜적인 행동으로 물의를 빚었었다.
또한 이를 무제에게 고발하려는 신하를 죽이기까지 했다. 결국 무제가 이를 알고 처형을 명하고 연나라를 일개 군으로 강등시켰었다.
결국 유차경은 무제의 명을 받은 주부언의 덫에 걸린 것을 깨닫고 자결했다. 

사실 주부언은 제나라 왕 유차경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다.
몇 년 전, 무제의 모후 왕태후에게는 전 남편 소생의 딸 김속이 있었다. 왕태후는 딸이 유 씨 성이 아닌 것을 못내 불쌍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김속의 딸을 제나라 왕 유차경에게 결혼시킬 생각으로 환관 서갑을 파견했다.
그때 주부언 역시 자신의 딸을 제나라 왕 유차경의 후궁으로 보내려고 서갑에게 청탁을 한 상태였다. 유차경은 서갑을 통해 주부언의 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주부언이 이에 앙심을 품고 유차경을 심하게 모함한 것이었다. 황족은 물론 모든 대신들도 주부언을 두려워했다.
그의 원한을 사면 언제고 황제에게 모함해 해코지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고조 유방을 모신 장능의 편전에서 불이 났다. 그리고 요동에 있는 고조의 사당에서도 화재가 일어났다. 그러자 동중서는 이를 황제를 비롯해 대신들에게 경계하는 계기로 삼고자 책을 준비했다. 주부언이 동중서를 찾았다.
그리고 몰래 이 책의 내용을 베껴 나왔다.
 
내용은 이랬다. ‘요동에 고조의 사당을 지은 것, 편전을 능 옆에 지은 것은 유학의 법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 두 번의 화재는 하늘이 황제에게 내리는 경계이다. 요동의 사당과 편전을 하늘이 불태운 것처럼 황제도 주변의 간신배들을 모조리 없애야 할 것이다.’ 

엄격한 유학자인 동중서의 눈에 주부언은 한마디로 간신배였다.
특히 동중서, 공손홍을 중심으로 한 유학자 그룹은 종횡가를 ‘감언이설로 유세나 하고 다니는 무리’로 규정하고 평소에도 주부언을 무시했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주부언이 동중서를 공격하기 위해 기다렸다. 책이 완성될 무렵 무제에게 이 책을 슬며시 보여주었다.
무제는 유학자들에게 이 책을 검토하라고 명했다. 동중서의 제자인 여보서는 이 책이 자신의 스승인 동중서가 쓴 것인지도 모르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무제는 동중서를 파직하고 그 후 10년간 등용치 않았다. 무제의 통치 이념을 설계한 무제의 최측근이었던 동중서가 주부언의 간교한 모함에 걸려 실각한 것이다.
이처럼 주부언은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그 상대가 누구든 상관치 않고 공격하고, 모함했다. 

박기종 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자료제공 Citylife
발행일 2016.11.23기사입력 2016.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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