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우리 때는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고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김지미보다 더 위대하게 생각했고 마릴린 먼로와 말런 브랜도를 우러러봤죠. 요즘에는 한류 열풍으로 해외에서 우리를 그렇게 보잖아요. 이런 걸 보면 `아 문화라는 게 돌고 도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수 조영남 씨(67)는 돌고 도는 문화의 한가운데 있다. 가수, 화가, 작가, 방송인 등 그의 활동영역은 너무도 다양해 `무경계형 아티스트`, `자유인`, `재미스트` 등 그를 수식하는 자유로운 단어들조차 하나의 장르로 만들어버릴 정도가 됐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청년 시절 그를 이끌었던 `클래식`으로 돌아가 23일과 24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더 클래식 조영남 음악회`를 연다.

즉흥적으로 공연하고 자유롭게 표현하는 그로서는 꽉 짜인 큐시트 속에서 공연하는 게 낯설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60명의 관현악단과 함께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서기에 감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동안 클래식의 성역으로 문이 닫혀 있던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이 대중가수에게 문을 연 것은 조용필 이후 두 번째이고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과 콘서트홀에서 모두 공연하는 대중가수는 조영남이 최초다.

"목숨을 거는 느낌으로 준비하고 있다"는 그를 16일 서울 필동 매경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그는 말이 느리고 진중했으며 기분 나쁠 만한 질문을 해도 `질문을 했으니 대답을 하겠다`며 개의치 않고 말했다. 진정성이 닿길 바란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공연을 앞둔 소감이 어떤가?

▶`은퇴 공연`이라는 느낌이 든다. 실제로 은퇴 공연이라는 건 아니지만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거다. 이보다 더 근사한 무대가 내 인생에 앞으로 더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이도 있고 하니깐 말이다. 노래 하나 고르는 데도 며칠 밤을 고민했다. 이번 공연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거의 목숨을 거는 느낌이다. 이건 알아줬으면 좋겠다.

－예술의전당은 클래식 공연만 하도록 제한돼 대중가수들에게 냉담했다. 다른 사람은 안 되고 왜 조영남에게만 문을 열었는지 말들이 나오는데.

▶다들 누군가를 집에 초대할 때 누구를 초대할지 고민하지 않나. 내가 한양대, 서울대 음대를 나왔다는 것도 영향을 끼쳤을 거라는 생각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쪽에서 고민해서 선택한 손님인데 내가 이것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본다. 난 좋은 무대에 불러줬으니 열심히 공연을 하는 거고 이게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나 같은 가수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거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정통 클래식 무대와는 다를 것 같다. 어떤 무대를 꾸밀 계획인가?

▶마지막 곡으로 `아리랑`을 골랐다. 한 번도 공식적인 무대에서 아리랑을 불러본 적이 없다. 아리랑이 이런 무대에서 피날레를 장식할 만큼 멋진 곡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기 때문에 골랐다. 아리랑을 부를 땐 직접 그린 태극기도 무대 배경에 펼쳐질 거다. `보리밭` `제비` `목련화` 등 우리 가곡과 멕시코 민요 `쿠쿠루쿠쿠 팔로마`, 이탈리아 가곡 `오 솔레미오` 등을 부른다. 성가도 부르고 중간에 지휘도 직접 하려 한다. 전체적으로 평소 내가 공연 때 불렀던 것 중에 지나치게 대중적인 것은 걸러냈다. 동생 조영수와 한국의 폴 포츠로 불리는 배달원 출신 성악가 김승일 씨도 함께 나온다. 셋이 함께 토스카 중 `별은 빛나건만`을 부르고 동생과는 듀엣으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중 `프로벤자 내 고향으로`를 부를 거다.

－목숨 걸고 준비할 만큼 중요한 무대인데 어떤 감정으로 노래할 것 같나?

▶요즘 박진영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으로 나와 `진정성을 갖고 노래하라`고 하는데 나는 박진영한테 묻고 싶다. 사람 앞에서 노래하는 사람 중에 진정성 없이 노래하는 사람이 있겠느냐고 말이다. 그림은 누구를 감동시키지 못해도 창피할 게 없지만 콘서트는 한 번에 쫙 모여 있지 않나. 감동을 받지 못하면 꽝이다. 진정성 있게 온 마음을 다하면 무언가 전달이 되겠지.

－어제(15일) 패티 김이 은퇴 선언을 했다. 스스로도 이번 공연이 은퇴 공연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는데 패티 김의 은퇴 선언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나?

▶전화가 와서 만나자고 하길래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만나서 얘기하자고 하더라. 나가 보니 은퇴하겠다고 하길래 "잘했다"고 대답했다. 사실 속으로는 `너무 늦은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같은 경우는 너무 늙어서 은퇴 선언을 못한다. 내가 은퇴 선언을 하면 주위에서 이미 너무 늦지 않았냐고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건 스타일의 차이인 것 같다.

－예술의전당 무대가 가능했던 것도 대중예술과 고급예술을 넘나들면서 활약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최근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통섭에 관한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모든 문화가 다 얽혀서 하나가 된다는 그런 내용이었는데 굉장히 공감했다. 그동안 내가 이런저런 활동을 하면서 욕을 많이 먹었다. `제 주제에 그림을 그려?` `지가 뭔데 책을 써?` 이런 비난도 감수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한 거다. 근데 이 책을 보고 `내가 한 여러 행동이 시대에 걸맞은 거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위로도 받았고.

－주변의 비난을 의식하지 않는 줄 알았다. 신경 쓰이나?

▶난 우물우물 하지 않는 척하면서 뭔가를 한다. 그래야 비난이나 그런 것에 대응할 수도 있고 남 보기에도 흉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뭐 "책을 씁니다" 이런 말 안하고 그냥 `사부작`(별로 힘들이지 않고, 티나지 않게 하는 행동)거리는 게 내 스타일인 거다. 대놓고 드러내는 것은 뭔가 쑥쓰럽다. 한마디로 아닌 척하지만 신경이 쓰인다는 거다.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는 건가?

▶이게 참 더러운 질문이다. 주목받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또 이게 참 묘한 게 우리 본성에는 주목받고 싶은 게 당연히 있다. 주목받고 싶은데 주목받고 싶다고 말하기엔 좀 그렇지 않나.

－여자에게만 진정성을 보인다는 말도 있다.

▶내가 남자고 여자를 많이 상대하는 남자이다 보니 그런 것 같다. 내 나름에는 나의 본체를 보여준다는 거였다. 바람둥이 같은 건 내 본능적인 건데 내가 그 표시를 (일부러) 하는지, 안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다 보니 그런 말을 듣는다.

－최근 어떤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MC가 농담 반으로 "그 정도로 히트곡이 있나 모르겠다"고 말했다. 마음이 상하지 않았나?

▶아니다. 오히려 나는 나에게 히트곡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맨날 내 히트곡은 `화개장터` 하나밖에 없다고 겸손으로 말했기 때문에 훨씬 더 큰 결과처럼 느껴진 것 같다. 시청률도 다른 편에 비해 아주 높게 나왔더라. 정말 신기한 것 같다. 이렇게 오래 방송을 했는데도 많은 사람이 봐주는 것 보면. 사람들이 내가 많이 늙었다는 걸 모르나 싶고.

－히트곡이 많지만 번안곡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우리나라 대중가요사에서 번안곡이 창작곡을 대신한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픈 역사의 한 가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민족이 완전한 독립국이었으면 그런 일도 없었을 것 아닌가. 당시엔 미국이 우리 문화를 지배하지 않았나. 그 지배 당시에 내가 살았던 거고. 그건 내가 싫고 좋고 할 문제가 아니라 나라의 운명, 나의 운명이었던 것 같다.

－요즘 후배들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내가 일찍 가수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노래만 하면 됐는데 요즘 애들은 얼마나 복잡한가. 무대 신경 쓰고, 춤 신경 쓰고 너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K팝의 한류 진출이 화제다. 어찌 보면 한류 1세대라고도 할 수 있지 않나. 최근의 한류를 보는 감회가 어떤가?

▶현대사 출발에 한류가 있었다고 본다. 패티김이나 윤복희와 함께 미군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환호를 받았으니깐 한류 1세대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과거에는 우리가 외국 배우들을 보고 감탄했는데 요즘에는 우리가 아시아나 유럽에서 인기를 끄는 걸 보고 통섭이 이뤄졌다는 생각이 든다. 일방적인 문화 흐름에서 하나가 되어가는 거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신곡 발표는 안하나?

▶이장희가 `울릉도는 나의 천국`을 발표했을 때 나도 죽기 전에 서울에 대한 노래를 만들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고향이 황해도, 충청도, 서울 이렇게 세 곳인데 난 서울이 진짜 고향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신곡이 나온다면 `화개장터` 이후 20여 년 만에 나오는 게 되겠지. 그러고 보니 제목을 이렇게 하면 되겠네. `서울, 진짜 고향`. 제목 좋구만. 하하. 

"패티 김 자서전 제가 씁니다"

패티 김의 은퇴를 가요계에서 가장 먼저 안 사람은 조영남이었다. 그에게 자서전 집필을 부탁하기 위해 은퇴 결정을 먼저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은퇴에 맞춰서 자서전을 써야겠는데 `자서전은 영남이가 써야 된다는 결정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는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인터뷰 도중 갑자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으로 뮤지컬 `캣츠`의`메모리`를 부르는 패티 김의 목소리가 들렸고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그가 갑자기 패티 김에게 전화를 건 것은 패티 김의 자서전을 자신이 썼다는 사실을 공개해도 되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자서전은 거의 완성됐고 은퇴 발표와 함께 발매할 예정이었는데 무기한 연기됐어요.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자서전 집필을 부탁할 정도면 평소 친분이 두터웠겠다는 말에 조영남은 "그 분(패티 김)이 누이라는 호칭을 허락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 저일 것"이라며 "제가 책도 쓰고 그러는 것도 알고 계시니 편했겠죠"라고 말했다. 그의 어떤 면이 패티 김을 편하게 했을 것 같냐고 묻자 "가수도 사람이니깐 편하게 대하면 될 것이라는 `인간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며 "다들 주눅들어서 그렇게 못하는데 진정성이 있으면 통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 He is…

조영남은 1945년 황해도 남천에서 출생했다. 1964년 서울대 성악과에 입학해 1968년 중퇴했으나 후에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1970년 번안가요 `딜라일라`로 가요계에 데뷔해 인기를 얻었으나 곧바로 풍자가요 `와우 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를 발표한 뒤 군대에 징집됐다. 1979년 미국으로 건너가 트리니티신학대를 졸업하고 1982년 귀국해 한국 활동을 재개했다. 1988년 발표한 `화개장터`는 전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으며 그의 대표곡이 되었다. 현재 MBC라디오에서 `조영남,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를 진행하고 있으며 오는 23일과 24일에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더 클래식 조영남 음악회`를 연다. 공연 문의는 하늘소리. 1566-2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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