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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소비하는 것이 당신의 정체성이다’라는 말이 있다. 나를 둘러싼 물질세계가 나의 자아세계를 보여준다는 말인데 요즘에는 정말 내가 나인지, 아니면 나의 소유물이 나인지 모를 지경이다. 100년 전 나바호 인디언은 263개의 물건이면 평생을 살았다고 하는데, 현대인들은 그보다 몇 십 배 되는 물건 속에 둘러싸여 살면서도 부족해하는 것 같다.

쇼핑카트 한가득 물건을 사들이고도 뒤돌아보면 뭔가 빠져 있어 또다시 마트 안으로 달려 들어간 경험이 다들 한두 번씩 있지 않을까. 이건 건망증의 문제라기보다는, 아무리 챙겨도 챙길 수 없을 만큼 우리의 삶이 상품 세계에 치밀하게 포획돼버린 결과다.

홈쇼핑 방송에 낚여 순간적으로 전화기 버튼을 누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씁쓸해한 경우도 있다. 원시시대에는 영험한 능력을 가진 동물을 우상화하는 토템이라는 신앙체계가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상품이 우리의 토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야말로 ‘물건=신’이라는 물신숭배의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이처럼 상품이 신화적 지위에 한 발 한 발 다가갈 때 미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앤디 워홀, ‘소비의 시대’ 적나라하게 드러내
상품 앞에서 무기력할 때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작품들이 있다. 앤디 워홀이나 한스 하케의 작품이다. 모두 다 소비에 기반을 둔 현대 물질문명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앤디 워홀의 작품은 상품으로 둘러싸인 자본주의 시장경제하의 삶을 솔직하게 드러낸다(그림 ➊). 한스 하케의 작품에서는 국경과 이념을 뛰어넘는 다국적 기업의 힘이 느껴진다(그림 ➋).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소비주의 메커니즘을 다루는 것이 완전히 새롭다고 볼 수는 없다. 사실 소비주의는 자본주의의 여명기부터 서양미술 속에 침투해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현대의 소비주의를 예견하는 작품 한두 점을 꼽아 보자.

호사스런 상품들이 가득한 옛날 그림을 손꼽을 때 1423년에 그려진 ‘동방박사의 경배’가 먼저 눈에 띈다(그림 ➌). 그림 속에는 금은보화로 장식한 화려한 의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화면 전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아라비아에서 수입한 최고 등급의 말과 그것을 감싼 다채로운 장신구, 이국적 애완동물들이 우리 시선을 끌어당긴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1434)’도 ‘소비 시대의 도래’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그림이다(그림 ➍). 모피 코트를 입은 주인공 부부 뒤로 화려한 샹들리에, 최고급 목가구, 베네치아제 거울, 터키산 카펫, 스페인산 오렌지 등 당대의 진귀한 명품이 즐비하다.

무엇보다 그림 속에서 상품이 그려진 방식이 새롭다. 사물 하나하나는 너무나 정밀하게 그려져 마치 상품을 직접 대면하는 듯하다. 그간 미술사 학계는 이 같은 사물이 그림의 상징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첨가된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이런 럭셔리 상품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는 것이 필자 생각이다.

공교롭게도 이 두 그림을 주문한 주인공은 모두 성공한 상인들이었다. ‘동방박사의 경배’를 주문한 이는 은행업으로 막강한 부를 쌓은 당대 최고의 갑부였다. 초상화 제작을 의뢰한 아르놀피니는 이탈리아 출신 상인으로 플랑드르 지역에서 고급 비단을 비롯해 여러 진귀한 상품들을 사고팔았다. 이들은 모두 자신 주변에 멋진 사물을 그려 넣어 자신이 이뤄낸 성공과 부를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잘한 물건을 통해 자기의 정체성을 보여준다는 점이 흥미롭다. 멋진 사물을 이용해 자신의 성공과 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들을 역사상 최초의 ‘명품족’이라고 부를 수 있다. 부러움을 살 만큼 호사스럽게 자신을 꾸밀 수 있어야 비로소 성공한 사람이라고 세상 사람들을 꼬드긴다. 물론 이런 과시욕이 소비사회에 진입한 인간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점을 일찍부터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미술이 진정한 명품인 이유는 단순히 가격이 비싸다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미술은 상품경제 속에 들어가 그것의 가치를 돋보이게 하고 소비를 선도하는 역할도 기꺼이 해낸 것 같다. 사실 이런 그림들은 당시 상품소비를 자극하는 촉매제였다는 점에서 생산과 소비를 유발하는 자본주의 세계의 새로운 무기라고 말할 수 있다.


화려한 미술 작품은 사치스런 소비 부추기기도

견물생심이라고 ‘동방박사의 경배’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를 수놓은 진귀하고 호사스런 상품을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나도 이런 것들을 가져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화가들의 치밀한 붓터치는 사물을 생생하게 묘사해내고 있어 오늘날 쇼호스트의 달콤한 유혹처럼 우리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당시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세계 각국에서 수입된 사치스런 물품들의 향과 촉감을 느껴보고 싶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니 당시 그림들은 오늘날 대중매체의 광고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마케팅과 상품 소비의 운명적 공생관계는 단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라, 이 땅에 소비주의가 등장하자마자 생겨난 오래된 전통인 것이다.  

사회적 부를 창출하고 그것을 공식화하는 것이 서양미술의 숨겨진 역할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상업 예찬과 소비 시대 도래를 눈으로 선언하는 듯한 15세기 그림은 이후 서양미술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전통이 이어져 오늘날에도 소비주의를 무작정 비판하기보다는 그것의 작동 메커니즘을 찾아 형상화하는 작업이 나오고 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앤디 워홀과 한스 하케의 작업은 대량생산과 세계화의 시대로 진입한 소비주의의 새로운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5세기 그림과 오늘날의 작품을 나란히 놓고 보면 소재와 논조는 분명 바뀌었지만 소비주의라는 서양미술의 오래된 전통을 깊게 공유하고 있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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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무(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자료제공 매경이코노미
발행일 2012.02.24기사입력 2012.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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