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

`부자들의 머리 속에는 돈만 들어 있다고요? 아닙니다.`

삼성생명은 지난 1월 초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가문관리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새로 `패밀리오피서(Family OfficerㆍFO)`팀을 꾸렸다. 이들 패밀리오피서팀은 지난 한 달간 고객 수요를 조사하기 위해 평균 자산 250억원 이상의 거액 자산가 50여 명을 집중 상담했다. 전국 각지에 걸쳐 4만명에 달하는 삼성생명의 설계사들이 고르고 골라 추천한 부자들이었다. 이들이 만난 한국의 부자들은 도대체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을까.

"돈 불려달라는 요구는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펀드나 주식을 추천했다가 `내가 돈 관리는 당신보다 더 잘한다`는 핀잔을 몇 번 들었죠. 관심은 주로 가족입니다. 특히 상속이나 가업승계 고민이 많지요." 팀장인 윤태경 상무의 말이다.

거액 자산가 50명의 면면을 한번 들여다 보자. 일단 직업은 대부분 전문직을 포함한 자영업자들이다. 남성이 73%, 여성이 27%로 남성이 많다. 거주지는 역시 서울 강남이 40%로 가장 많고 강북 5%, 수도권 45%, 지방 10%다. 이들이 FO와 주로 상담한 내용은 △가업승계(58%) △여유자금 등 자산관리(36%) △가족의 해외거주 계획(30%) △증여ㆍ상속(22%) △수익형 부동산관리(20%) △은퇴 후 자산운용 설계(18%) 순(중복 포함)인 것으로 나타났다. 재테크 차원에서 굳이 이들의 관심이 높은 분야를 꼽으라면 주로 세금이고 미래의 확정수익 보장이다. 주식이나 펀드에 대해선 더 이상 상담이 필요없을 정도로 스스로 많은 내공을 갖추고 있었다.

"일반투자자들보다 정보나 결단이 한발 빠릅니다. 유럽 재정위기 걱정을 하면서도 주식을 미리 상당히 사놓으신 고객이 많습니다. 유럽 국가들이 망하게 내버려 둘 것 같았으면 애초부터 자금 투입을 결정하지 않았을 거라고 판단한 거죠."

평균자산 250억원이면 웬만한 중소기업 규모다. 고객 자산관리는 그래서 기업재무정책을 짜듯이 복잡하다. 돈이 많다고 해서 거액 자산가들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다.

"60억원짜리 건물을 지분으로 나눠줬다가 세 자녀가 싸워서 화병까지 걸린 고객이 있습니다. 부정한 배우자에게 재산이 상속될까봐 머리를 싸매고 누워버린 분도 있죠. 재산을 미리 나눠줬다가 젊은 자녀들을 망칠까봐 전전긍긍하는 고객도 많습니다."

결국 60억원짜리 건물주는 손실을 감수하고 건물을 팔아 아예 현금으로 세 자녀에게 나눠줬고, 배우자 문제가 있던 고객은 법인을 설립해 자산수증(법인에 대한 무상증여로 50%의 증여세 대신 22% 수준의 법인세를 내게 된다)을 통해 배우자는 배제하고 자녀들에게만 혜택을 줬다. 젊은 자녀들을 망칠까 걱정한 자산가는 생전증여신탁, 특별부양신탁 등의 상품을 검토하고 있다.

"FO는 무조건 돈을 불려주는 사람이 아니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일종의 해결사입니다. 고객들의 관심은 돈이 아니고 행복, 특히 가족의 행복입니다."

결국 부자라고 해도 돈이 목적이 될 수는 없었다. 궁극적인 재테크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관점은 중산층이나 자산가들이나 마찬가지다.

삼성생명 FO가 전하는 슈퍼리치 50명의 행보는

 ◆ 세금에 촉각…장기투자하는 자산가들

부자라고 해서 무조건 행복한 것은 아니다. `만석꾼은 만 가지 고민을 가지고 살고 천석꾼은 천 가지 고민을 가지고 산다`는 속담처럼 돈이 많으면 많은 만큼 남모를 고민도 더 생겨나는 게 부자다. 부모 유산, 사업, 부동산, 주식투자 등을 통해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부를 쌓아올렸지만 정작 자신들은 `이만하면 충분히 벌 만큼 벌었다`고 만족하지 않는다. 돈에 관한 한 자산가들의 가장 큰 고민은 뭘까.

윤태경 삼성생명 가문관리서비스 상무는 "가업승계와 재산상속이 최대의 관심사"라고 말했다. 거액자산가 고객 50명의 상담 내용 중 `가업승계 플랜`이 29명(58%)으로 가장 많고, `여유자금 등 효율적 자산운영 방안`이 18명(36%)으로 두 번째를 차지했다. 그 다음 관심사로는 △가족의 해외 거주 문제 △상속 증여 △수익형 부동산 관리 △은퇴 후 안정적인 자산운용 등이었다. 한마디로 `욕심내 돈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금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신경 쓰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실제 `돈을 더 많이 벌어드리겠다`고 얘기하는 것은 패밀리오피스(FO)들에겐 금물이다. 수백억 원대 자산가 대부분은 주변에 훌륭한 투자조언그룹을 이미 가지고 있으며 본인 스스로도 훌륭한 투자자인 경우가 많다. 펀드나 주식을 권했다가는 "내가 더 잘 아는데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지"라는 답변이 돌아오기도 한다. 주식투자도 인터넷정보나 소문에 의존하기보다는 회사 자체를 보는 사람이 많다. 부자가 되는 과정에서 오랜 기간 쌓아올린 정보 네트워크와 기업을 보는 안목을 스스로 갖추고 행하는 일종의 가치투자인 셈이다.

한 FO는 수년 전에 50억원을 한꺼번에 개별종목에 투자했던 고객의 사례를 들려줬다. 투자 당시 6만원이던 주식이 반 토막이 나면서 3만원까지 하락했다. 불과 몇 달 만에 투자액의 절반인 25억원을 날린 셈이다. 투자 포트폴리오를 다시 조정할 것을 권유하자 고객의 질문은 딱 한마디였다고 한다. "회사는 좋은 회사가 맞느냐"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하자 별다른 반응이 없었고 몇 달 뒤 이 주식은 다시 30만원까지 올라갔다.

FO들은 오히려 부자 고객들한테서 가르침을 받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고객에게서 "펀드 수익률 몇 %를 놓고 벌벌 떨면 절대로 부자가 못 된다. 길게 봐야 한다"는 조언을 듣기까지 한다.

분위기를 중시하고 결단이 빠른 것도 돈을 많이 모은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윤태경 상무는 "꽤 많은 고객들이 벌써 올 초부터 주식투자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시장이 돌아서기도 전에 이미 거액자산가들은 감을 잡았다는 얘기다. 유럽이 자금지원을 하는 모습이 `죽이려는` 모습이 아니라 `살리려는` 모습이었다는 얘기다. 자산가들은 오랫동안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쌓은 경험으로 상황 포착을 잘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 자녀교육, 결혼 등 가족일에 관심

최경락 삼성생명 자산관리서비스 부장은 "자산가들은 재산이 자기 것이라기보다는 가족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결국 돈을 어떻게 쓰고 상속하느냐는 그 가문의 철학이 반영되는 문제가 된다. 유럽 등지의 보험사 가문관리서비스가 `가훈`이나 `가문헌법` 등을 만들어 가족들에게 선사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예를 들어 로스차일드 가문이 "가문의 요직은 직계가족만 맡아야 하고 지분은 가족끼리만 팔 수 있다"는 등의 5개항 가훈을 만든 것도 이런 이유다. 국내에서도 큰 자산가들은 이런 가훈을 만들어놓은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자산가들은 부동산에 대해서 어떻게 전망하고 있을까. 윤 상무는 "`부동산을 어떻게 보십니까`라는 질문이 가장 안 좋은 형태의 질문"이라고 답변했다. 자산가들은 각자 관련 있는 부동산에만 관심이 있다고 한다. 부동산은 아파트 주택 빌딩 오피스텔 상가 토지 등 워낙 여러 가지 형태인 데다 지역별로 조건이 제각각이어서 일반적인 평범한 질문에 별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윤 상무는 "고객들의 자산 내역을 분석해보면 아직도 평균적으로 부동산이 전체 자산의 70%가 넘는 고객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자산 내 부동산 비중을 줄여가고는 있지만 마땅히 대처할 만한 금융상품이 없는 상황에서 절대적인 기준에서 볼 때 부동산 비중은 당분간 계속 높을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굳이 고액 자산가들의 평균적인 부동산 소유 형태를 따져본다면 `강남 3구에 위치하면서 임차인이 임차료를 꼬박꼬박 잘 내는 100억원대 안팎의 건물`을 지닌 고객들이 많다고 한다.

가문관리서비스를 하다 보면 말 그대로 가족들의 대소사를 관리해주게 된다. 은행, 증권사 PB들처럼 일정액의 투자를 어떻게 할지 상담하는 것이 아니라 자산 전체에 대한 설계와 세금문제 등을 다루기 때문에 숨겨놓은 재산이나 가족들의 사연도 낱낱이 알게 된다는 것이다.

상속 문제가 고민인 A씨는 보험사에 왔다가 생전증여신탁을 통해 증여세도 아끼며 미리 체계적으로 상속을 준비하는 방법을 알게 됐다. 또 특별부양신탁, 유언신탁 등의 상품도 소개받아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부모에게서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B씨는 결국 삼성생명 가문관리서비스팀을 찾았다. 직접 자산 포트폴리오를 짜는 대신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한 것이다. 배우자에게 돈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C씨는 자녀들이 투자해 법인을 설립하고 이곳에 C씨는 자산수증(법인에 재산을 무상으로 증여하는 것)을 하는 방식을 택했다. 절차가 복잡하고 비용도 꽤 있었지만 증여세(50%)보다 낮은 세율의 법인세를 부담하는 등 혜택도 있다는 사실에 그렇게 결정했다.

고객들의 맞춤에 따라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탓에 보험사 FO들은 스스로를 종합병원에 비유하고 은행, 증권사 PB를 내과, 외과, 이비인후과 등 일반 병원이라고 한다. 자산에 대한 종합검진을 하는 곳이란 말이다. 투자 상담을 주로 하는 PB들과는 달리 FO들은 상담의 시작이 "며느리와 관계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아드님이 유학 간 학교에는 잘 적응하나요" 등으로 시작한다. 인생의 동반자라는 의미다.

◆ FO들이 일반인들을 상담한다면

부자들만 상대하는 FO들. 이들에게 일반 독자들을 상대로 재테크의 팁을 달라고 부탁했다.

윤 상무는 "멀리 보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장기투자를 얘기하는 것이기도 하고 투자의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뜻도 포함돼 있다. 그는 "개인의 인생처럼 각자의 재무 상황에도 사주팔자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패와 성공의 곡선을 잘 알고 공격할 때와 방어할 때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부자들은 주로 움츠릴 때 뒤끝 없이 움츠리고 공격할 때 과감하게 한발 빨리 나선 사람들이라는 설명이다. 또 FO들은 돈을 쓸 때는 과감하게 쓰면서도 일반 생활에서는 한 푼도 아끼는 평범한 `부자의 진리`를 많이 본다.

"수백억 원의 자산을 가진 여성 고객이 중국에서 들여온 2만원짜리 원단으로 스웨터를 짜서 입으신다거나 자녀들에게 함부로 재산을 상속하지 않는 등의 모습은 공통적입니다."

삼성생명 가문관리서비스팀은 FO 한 사람당 관리자산이 1000억~1500억원을 달성한다는 목표로 뛰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에도 미국의 록펠러 가문이나 조선시대 경주 최씨 가문과 같은 명문 가문이 많이 나올 겁니다. 그런 날을 기대하며 FO들도 최선을 다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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