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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 싫어! 아앙!”

어느 대형마트에서 한 꼬맹이가 떼를 쓰며 운다. 꼭 먹고 싶은 과자를 부모님이 사주지 않는 건지 엉엉 울며 바닥에 누워버린다. 그만 눈살이 찌푸려지다가 문득 나는 어린 시절 저렇게 생떼를 써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슬프면 슬픈 대로 아프면 아픈 만큼, 행복하면 행복한 만큼 마음껏 깔깔 웃고 엉엉 우는 정말 네 살이 되어 본 적이 없구나 하고 깨닫는다.

요즘 신지현 작가의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신 작가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소녀는 웃지 않는다. 어린 시절, 최고의 날이었던 생일날 케이크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소녀는 숨는다. 때론 옷장 속으로, 때론 무표정한 얼굴 뒤로. 속눈썹 뒤로 숨은 그 진짜 눈빛이 궁금해졌다.

 

소녀를 만나볼까 싶었다

창밖으로 옅은 황색의 땅과 잎 떨어진 나무들이 단조롭게 지나갔다. 생각들이 반복됐던 탓인지 멀미가 났다. 버스에서 내려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했다. 쉽사리 진정되지 않던 울렁거림은 신 작가의 작업실에 들어가는 순간 빠르게 가라앉았다.

작업실 안 타닥거리며 달궈지고 있는 석유곤로! 기억을 자극하는 쌉쌀한 냄새가 풍겼다. 접시에 정물처럼 놓인 귤들의 달콤한 향내가 유리 팔레트 위에서 건조되어 가는 물감 냄새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창가에 하얗게 박제된 듯 놓인 선인장은 캔버스 안에서 어딘가를 응시하는 소녀들과 함께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싱싱하고도 안락한 겨울풍경이랄까. 울렁대던 멀미 기운이 어느새 사라졌다.

작가는 나이에 비해 아직 여린 소녀티가 났다. 천상 여자네 싶은 조심스런 말투하며, 유난히 검고 반짝이는 눈동자와 장난기가 숨어있는 통통한 볼. 그림 속 소녀들과 몹시 닮아 있다.

작품 속 소녀를 응시하자니 잊었던 언젠가의 기억 속, 나도 꼭 저랬었는데 싶다. 익숙하다. 정체 모를 슬픔, 꿈에 따라붙는 막연한 불안감이 스민. 소녀의 눈빛은 내 어린 시절의 눈빛이었다. 누군가 소녀 시절 내 모습을 몰래 기록해 두었다면 꼭 저런 눈빛이리라. 푸르스름한 여백은 친숙한 외로움을 담고 있다. 흩어지는 시간처럼 아련하고 고요하다.

어른이 되는, 혹은 굳어져 가는

살면서 배우는 갖가지 감정들을 이제는 거의 다 마스터했다고 생각하지만, 가끔 갑자기 새로운 감정들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것은 슬픔도 기쁨도 설렘도 외로움도 아닌 낯설고 묘한 감정이다.

이런 느낌들은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찾아오기도 한다. 누군가 말을 걸 때나 낯선 골목을 걷고 있을 때, 늙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봤을 때에도 예고 없이 찾아들 수 있다. 더 이상 네 살짜리도 아닌데. 사춘기도 지났는데 말이다. 새로움은 50~60대가 되어서도 찾아온다더니.

그것은 나이를 불문하고 그 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처음의 느낌이기 때문에 매우 강렬하고 당황스럽다. 아 이것은 기쁨이구나. 행복이야, 슬픔인걸 하는 익숙한 이름표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더욱 당혹스럽다. 어릴 땐 더했다. 어느 날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저절로 내 안에 생겨난 설레고 슬프고 외롭고 비밀스러운 감정은 모두 처음 겪는 것들이었다.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지 모를 감정이라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도 없었다. 때론 무거웠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모르고 시시때때로 예고 없이 폭풍처럼 밀어닥치는 감정들. 그림 속 고요한 소녀들의 얼굴에서 난생 처음 맛보는 그런 격정들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잠시 그 감정의 범람이 지나고 나면 곧 잊는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그 느낌이 찾아와도 처음처럼 그렇게 당황하지 않게 된다. 자극을 받지 않거나 아예 감흥조차 없을 수도 있다. 뭐든 몇 번 경험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적당히 대응할 수도 있게 되는 것. 그만큼 어른이 된 것이리라.

하지만 또한 그만큼 굳어져가는 걸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신지현의 그림은 애잔하다. 그림 속 그들이 어린 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새것은 순결하기에 슬프니까. 작품 앞에서 관객들은 안타까움, 아름다움과 동경과 사랑을 함께 느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생채기에 굳은살이 배길 게 뻔한 순수를 바라보며 말이다. 한때 자신의 모습이었던 그것.

남몰래 아팠던 감정의 첫 순간들은 우리에겐 잊혔을지 몰라도 그녀의 캔버스에 고스란히 찍혔다. 소녀들의 은밀한 초상은 성인이 된 우리에게 그 순간을 거울처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웃어도 돼 울어도 돼

겁 많고 미안한 게 많고 수줍던 소녀는 이제 반짝 빛나는 호기심과 사랑도 할 줄 아는, 그림 그리는 처녀가 됐다. 생각이 먼저 자란 소녀는 자신의 몸이 어색해지는 법이다. 마음대로 표현하고 웃고 춤추고 뛰기엔 불편하고 무거운 내 몸뚱이는 나무껍질이나 동물의 가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진짜 나는 그 속에 숨어 바깥을 내다본다. 몸속에 숨어 눈동자로 빠끔히 내다보는 느낌은 안전하지만 때론 답답하다. 옷장 속에 들어가 숨은 기분처럼.

“너는 사랑스러워. 부끄럽지 않아. 나와서 마음껏 웃어도 돼. 아니면 울어도 돼.”

이제 받는 것보다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커진 작가는 소녀에게 눈빛으로 말을 거는 듯하다. 작가는 조심스런 붓질로 어루만진다. ‘아무도 내 맘을 모를 거야’하며 고집스레 입술을 다물었던 그 어린 시절 우리를 가만히 안고, 한바탕 울 수 있을 때까지 같이 있어 준다.

신 작가는 이제 그녀 자신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밖을 둘러보고 싶다고 말했다. 사람과 사람, 부족함과 외로움들이 만나 벌어지는 많은 드라마 속에서 사랑받고 싶었던 소년과 소녀를 발견한다고. 그녀는 왠지 그들을 이해할 것만 같다. 안아주고 싶고 사랑해주고 싶다. 가만히 쓰다듬고 바라봐 주었던 작품 제작의 과정이 소녀를, 아니 작가 스스로를 자라게 했나 보다. 어쩌면 어린 소녀는 단지, 받을 수 있는 사랑보다 받고 싶은 사랑이 더 커서 미안했는지도 모른다.

작가 신지현은 갇힌 소녀를 데리고 나와 캔버스에 조심스레 새기면서 그녀 자신의, 아니 우리 모두의 성장 앨범을 기록하고 있다. 한결 자유로운 바람이 그 순결한 뺨의 솜털을 간질일 수 있도록. 앞으로 신 작가의 작품세계가 어떤 방향으로 성장하게 될지 궁금해진다.안에서 밖으로, 자신으로부터 타인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관심의 결과로 나타날 소녀들의 표정이 궁금하다. 그림 속에서 풍기는 많은 뉘앙스들이 더 풍성한 이야깃거리로 나타나겠지. 그리고 어쩌면 창백한 소녀의 볼이 오늘처럼 자유롭고 청아한 햇빛 아래 핑크빛으로 달아오를지도. 그 아련한 모습을 꿈처럼 그려 본다.  

 

■ 작가 신지현은

2007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 회화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2008년 표갤러리 신진작가 공모전을 통해 데뷔해 특유의 몽환적이고 순수한 표현으로 보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인터알리아 서울, 갤러리 학, 북경의 팍스 아트스페이스, 선화랑, 가나아트센터, 이언갤러리 등에서도 꾸준히 전시를 선보였다. 2011년 `Dim and Distant`라는 타이틀로 인터알리아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현재 경기도 일산 근방에서 작업실을 꾸리고 오늘도 꾸준히 작품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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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미(아트 칼럼니스트·봄봄 대표 bomi1020@empal.com)자료제공 LUXMEN
발행일 2012.03.23기사입력 201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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