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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야담

 

여러 번역본이 출간됐으나 이월영과 자귀선 공역(한국문화사)이 한문투가 덜해 읽을 만하다. 국립중앙도서관본을 번역한 것으로 182편이 수록돼 있다. 이원걸의 ‘조선후기 야담의 풍경(파미르)’과 김준형의 ‘청구야담의 상반된 가치와 문학교육의 가능성(비평문학, 제33호)’ 등 논문을 곁들여 읽으면 이해를 넓힐 수 있다. 

 

흔히 ‘야담’이라고 하면 역사적인 사실이나 본격 문학과는 거리가 먼 것, 야한 이야기나 민담, 전설로 내려오는 신비적인 이야기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곤 한다. ‘청구야담’은 1840년 전후에 편찬된 것으로 편찬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신분 질서의 동요와 가치관의 변화가 극심했던 18, 19세기를 배경으로 다양한 삶을 집약했다. 내용별로 보면 ‘탈중세적’인 면모를 갖는 작품도 있지만 여전히 봉건적인 성향의 작품도 있다. 예컨대 ‘열녀’가 있다면 분방하게 정에 이끌리는 여인도 있고,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종이 있으면 주인을 해하는 노복도 있다.

 

조선시대 이데올로기의 정점은 충(忠)과 효(孝), 그리고 열(烈)이다. ‘청구야담’에 충과 효, 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열 이데올로기’에서 대표적인 게 ‘열부(烈婦)’다. 그런데 열부를 교묘하게 위장하는 지배층도 있었다. 이는 비단 신분 질서가 무너지던 조선 후기의 모습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열부를 추앙했던 조선 전기부터 암암리에 지배층에서 위장됐을 개연성도 있다. ‘딸을 재가시킨 재상(163회)’ 이야기가 나온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딸이 출가한 지 일 년도 못 돼 남편을 잃고 부모 곁에서 과부로 살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딸이 자신의 고운 얼굴을 거울에 비춰 보다가 갑자기 그것을 내던지고 울고 있는 모습을 아버지인 재상이 보게 된다. 중세 질서에 순응해야 하는 재상의 위치에 있던 아버지가 취할 방법은 없다. 딸이 한평생 정절을 지키다 늙어 죽든가,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뿐이다.

 

결국 아버지는 고육지책으로 딸의 죽음을 위장하기로 한다. 말하자면 사회적인 죽음이다. 열부 이데올로기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딸이 남편을 따라 자살해야 했고, 아버지 입장에서는 다시는 딸을 볼 수 없어도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놓아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평소 드나들던 장건한 무반에게 은자를 주며 딸을 데려가기를 청한다. “곧바로 북관으로 가 그곳에서 살게. 그리고 우리 문하에는 종적을 끊게나.” 그들을 떠나보낸 재상은 내실 아랫방에 들어가 통곡하며 “내 딸이 자결했도다”라고 말했다. 재상은 딸의 시댁에 통고하고 시댁의 선산 아래에 장사 지냈다.

 

몇 년이 흐른 후 그 재상의 아들이 암행어사로 북관을 살피게 됐다. 인가를 찾아들어 가니, 마침 그곳에서 두 명의 아이가 책을 읽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생김새가 맑고 준수한 데다 자신의 안면과 자못 유사했다. 밤이 깊자 안방에서 갑자기 어떤 한 여자가 나오더니 암행어사의 손을 붙잡고 흐느꼈다. 놀라 자세히 바라보니 죽은 그의 누이였다. 돌아와 부친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재상은 눈을 부릅뜨고 아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아들도 감히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그 사실을 말한다면 아들에게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결국 유구무언의 이심전심이 집안을 살리는 묘책이었을 게다.

 

‘청구야담’에는 가부장적 신분 사회에서 남성들의 은밀한 성적 욕망의 판타지가 담겨 있는 이야기도 등장한다. 어쩌면 성적 판타지야말로 야담의 본색이자 인간 사회의 본색이 아니겠나.

 

‘천하일색을 얻은 김역관(29회)’ 이야기는 젊으나 늙으나 미인과의 열애를 희구하는 남성의 숨은 본능을 대리만족시켜 주는 이야기라고 하겠다.

 

김역관은 임란 때 2차 원병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역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여송은 귀국길에 군량을 약속한 기일에 대지 못했다는 이유로 요동도통을 군율로 다스리려 했다. 이때 도통의 아들 셋이 제독의 총애를 받고 있는 김역관 보기를 청하고 덕분에 도통은 목숨을 구한다. 이에 아들들은 역관에게 아버지를 구해준 은혜를 갚게 해달라고 한다. 이들은 김역관을 조선국의 재상으로 삼게 해주겠다고 한다. ‘중원(요동)정승’이라고 손가락질 당한다며 김역관은 거절한다. 중원의 벌족이 되게 해주겠다는 제의도 거절한다. 부모와 이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심스레 속마음을 전한다.

 

“제가 달리 원하는 것은 없으나 소원이라면 천하일색(운남왕의 딸)을 한 번 보는 것입니다.” 김역관은 거듭 “저는 단지 한 번 보기를 원했을 뿐입니다. 실로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라고 말하며 짐짓 다른 것에는 관심 없는 척한다. 드디어 운남왕의 딸을 만난 김역관은 이 여인을 한 번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점잔을 빼다 마지못한 척 운우지정을 맺는다. 그리고 매년 역관으로 황성에 올 때마다 만나 운우지락을 나누게 된다.

 

이런 야담을 접한 조선의 사대부나 역관들에게 김역관의 로맨스는 말 그대로 ‘로망’이었을 게다.

 

‘청구야담’은 이처럼 충과 효, 열의 이데올로기와 그에 억눌린 욕망들의 은밀한 대리 배설의 공간이 돼주기도 했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또는 멀리는 상고시대 이후 인간의 가장 깊고 오래된 소망 중 하나는 무릉도원에서 살고 싶은 것이 아닐까. 더욱이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유증이 지속됐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길지와 은둔지, 무릉도원에 대한 갈망이 컸다. 무릉도원의 소망이 담긴 이야기는 ‘무릉도원을 찾은 권진사(70회)’와 ‘이동고의 식감(92회)’ ‘설생의 별천지 유람(94회)’ 등이 있다.

 

부자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나 갈망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청구야담’에도 치부에 대한 이야기가 신분 질서의 붕괴와 맞물려 소개돼 있다.

 

서울대 규장각본에 전하는 ‘송반궁도우구복(宋班窮途遇舊僕)’이 대표적이다. 송 씨 양반이 궁한 지경에 이르러 관동의 고을 원을 지내는 친구에게 부탁하러 갔다 오래전에 집을 나가 부자가 된 노복을 만나는 이 이야기는 당시의 신분 붕괴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수십 년 만에 만난 송 씨의 노복은 옛 주인에게 용서를 구한다. 이에 송 씨는 “이제 시절이 변했으니 원컨대 편히 앉아 한담이나 하자”고 하면서 부자가 된 내력에 대해 묻는다. 노복은 자신의 성공담을 털어놓는다. 어찌하여 최 씨 성을 얻게 된 후 경성에서 수년간 수천백금을 벌었고 한 무관의 딸과 혼인하고서 발각될까 회양으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정오품, 정삼품을 지낸 사람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노복은 너무 지위가 올라가면 시기로 인해 발각 날 우려가 있어 물러나와 전원생활을 한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더 이상의 신분 상승을 중지하는, 권력에 대한 욕망의 절제다. 이는 ‘당쟁의 피로증’이 극심했던 당시의 학습효과가 아니었을까. 자칫 욕망을 더 추구했다 당쟁에 휘말리거나 가문이 멸문되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청구야담’을 읽다 보면 수많은 인간 군상들의 파격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리스시대의 비극이나 성경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노학구(늙어 세상에 쓸모없는 속된 선비)가 어떤 한 선비에게 자신의 첩을 강간하도록 해 아들을 낳게 한다는 이야기, 다른 사람의 첩으로 있던 여인이 정말 자신이 믿을 만하다고 여긴 사람을 본 후로 본 남편과 헤어지고 자신이 선택한 남성을 위해 수절하는 이야기도 있다. 오늘날 신문 사회면에서도 볼 수 없는 엽기적인 내용이다.

 

‘청구야담’은 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한 편의 장편 역사 드라마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이 드라마를 보고 당시 사람들은 ‘힐링’받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최효찬자료제공 매경이코노미
발행일 2014.08.11기사입력 2014.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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