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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리더십을 다시금 되새기는 것은 진정한 리더의 부재를 겪고 있는 현재의 우리 현실에 대한 반추일 수 있다. 게다가 세종의 리더십은 크게는 나라 경영에서부터 작게는 직장 내 한 부서는 물론 리더를 꿈꾸는 모든 직장인에게 그야말로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경전’과 같다.

 

다시 한 번 성군 세종의 치밀한 리더십을 짚어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서의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장남인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쫓겨나자 그 자리를 이어받아 왕위에 오르고 집현전을 만들어 많은 학자들을 육성해 그곳에서 한글을 창제했으며, 김종서로 하여금 4군6진을 개척해 국경을 정비하고 박연과 장영실을 등용하는 등 조선 초기 나라의 기틀을 굳건히 한 왕이다. 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만만치 않은 정치적 풍파와 정적의 공격을 딛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며, 사소한 정책 하나라도 왕이라는 위세로 만들고 집행하는 게 아닌 타협과 소통 그리고 진정한 솔선수범을 통해 정착시키곤 했던 인물이다. 그러기 위해 그는 스스로를 학대에 가까울 정도로 단련하고 괴롭혔으며 그의 이러한 마음가짐과 행동은 한 번의 어긋남 없이 재위 32년 동안 계속되었다.

 

흔히 불교에 있어 원효, 유학에 있어 이황이 그 근본이 되듯 조선의 모든 왕들이 세종의 정치를 이해하고 또한 실행하려, 자세히 표현하면 흉내라도 내보려 노력했다. 특히 정조는 세종에 대한 존경을 넘어서는 경외의 마음으로 항상 세종시대의 재현을 꿈꾸기도 했다.

 

그만큼 세종은 왕으로서 가장 위대한 시대를 연 인물이며 개인적으로도 리더로서의 역할에 한 치의 소홀함이 없었던, ‘완벽’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자기 정진과 실력 배양의 리더십

 

세종은 조선 건국 4년 후인 1396년, 훗날 태종에 되는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1등 공신. 하지만 태조가 늦게 본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임명하자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복 동생인 방석과 방번 그리고 그들의 후견인이자 조선 개국의 설계자인 정도전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다. 그리고 첫째 형이 형식적인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정종이다. 그 뒤 둘째 형인 이방과와의 2차 왕자의 난에서 이겨 조선의 모든 권력을 장악해 바로 왕위에 오른다. 그가 태종이다.

 

태종은 관료(사대부)에 의해 지배되는 나라를 꿈꾼 정도전을 죽임으로써 강력한 왕권의 기틀을 마련하고 자신을 도와 정변에 공을 세운 처남들마저 죽임으로써 외척의 권력에 대한 발호를 근본적으로 제거했다. 이처럼 냉혹하고 비정한 성품의 왕이었지만 그에게도 고민이 있었으니 바로 후계자였다. 첫째이자 세자인 양녕과 둘째 효령 그리고 셋째가 충녕이고 넷째는 성녕이었다. 성녕대군이 14세에 죽었으니 그에겐 세 아들뿐이었다. 세자 양녕은 기질이 호방하고 기가 드세 세자로서의 본분에 어긋나는 행동을 많이 하였다. 해서 태종은 고민 끝에 세자의 자리를 셋째인 충녕에게 넘겨주었다. 태종은 사석에서 “충녕은 술은 잘 못하지만 적당히 마시면서 분위기를 이끌고 또한 그칠 때가 언제인지를 안다. 이에 비해 효령은 학문은 좋아하지만 융통성이 없고 술도 마시지 못해 국가를 경영하기에는 적당치 않다”고 평한 바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충녕은 세자가 되고 두 달 뒤에 태종이 양위를 하면서 바로 왕위에 오른다. 왕자 시절의 세종이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임금의 아들이면 누군들 임금이 되지 못하겠느냐?’ 충녕은 며칠 후 아버지 태종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고 아직 세자의 자리에 있던 양녕에게도 ‘마음과 몸을 바르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충언을 했다. 한편으로는 둘째인 효령이 은근한 대권 야심을 품고 학문에 정진하자 본인도 더욱 더 학문을 익히고 효와 예를 다하는데 소홀함이 없었다. 자칫 오해를 살 수도 있는 ‘세자 관련 소문’을 태종에게 전달할 정도였다면 충녕의 마음속에 왕에 대한 꿈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실권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양위를 했지만 태상왕의 지위에 오른 태종은 대리청정을 하며 세종의 왕권 장악을 도왔는데, 심지어 훗날 세종의 왕권에 도전할 만한 세력들을 제거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 첫 번째 희생자가 세종의 장인이었다. 세종의 중전이자 아내의 생부인 ‘심온’에 대해 태종은 강력한 힘을 동원, 세력을 제거해 버렸다. 심온은 처형당했고 그 식구들은 모두 관비로 전락했다. 이를 지켜보는 세종의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지만 권력 지형의 냉정함을 이미 아버지 태종이 일으켰던 왕자의 난을 보며 깨달을 바가 있었기에 묵묵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세종은 더욱 학문에 치중했다. 모든 책을 읽고 머리로 이해하며 이를 실행하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자신의 세력을 양성하는데도 소홀치 않았다. 그것이 바로 집현전이다.

 

세종시대 집현전은 단순히 학문을 닦는 곳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물론 이곳에서 한글을 창제하는 위대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집현전은 세종에게는 친위대의 성격이 강했다.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불러 모아 밤새 토론하고 경연을 열면서 점차 세종과 집현전의 젊은 인재들은 하나의 이상을 보게 되었고 가치관과 정치적 성향마저 닮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성삼문, 신숙주, 정인지, 이개, 박팽년, 최항 등 수많은 인재들이 이곳을 거쳤고 훗날 세종을 이어 문종, 단종, 세조시대까지 집현전의 활약은 계속 되었다.

 

세종은 왕자 시절부터 학문에 많은 노력을 쏟았다. 얼마나 책을 좋아하고 독서를 했는지 왕자의 건강을 걱정한 태종이 ‘독서금지령’을 내리고 신료들에게 책을 숨겨놓으라고 명할 정도였다. 하지만 세종은 태종의 지엄한 명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데 열중했고 특히 어떤 책은 무려 1000번을 정독했다고 한다. 이런 세종의 학문에 대한 열성과 노력은 단순히 공부를 하는 것, 그 자체에 그치지 않았다. 이렇게 수많은 책과 경전 그리고 성현의 말씀과 철학은 물론이고 현실적인 학문에도 세종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의 박식은 음악과 과학 그리고 무기제조와 인쇄 등 국가 경영에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부분에 까지 다양하게 발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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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는 설득과 타협의 리더십

 

세종이 왕으로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태종이 죽은 해, 즉 왕위에 오른 지 5년째부터이다. 태종은 죽기 전 세종에게 몇 가지 유훈을 남긴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어떤 일이 있어도 형인 양녕을 죽이기 말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양녕의 폐세자 처분을 끝내 반대하다 귀양 가 있는 황희를 중용하라’는 것이었다. 이 유훈은 세종이 실질적 왕이 된 후 첫 번째로 맞이한 벽이기도 했다. 신하들은 양녕을 궁궐에서 내쫓고 귀양 보낼 것을 수없이 세종에게 간했다. 하지만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유언을 어길 수 없음은 물론 양녕에 대한 태종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신하들의 의견과 정면으로 대결했다. 아버지 태종은 양녕의 세자 자리를 유지하려 애썼고 그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시간을 끌어 양녕의 아들에게 세자 자리를 물려주는 이른바 장자세습의 원칙을 지키려 애를 썼다. 이것이 이뤄지지 않자 결국 양녕을 폐하고 충녕에게 세자를 임명했는데, 사실 그날 밤 태종은 밤새 통곡하며 울었고, 그 아버지의 마음은 세종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터, 세종은 신하들과 타협했다.

 

형인 양녕을 경기도 이천으로 보내고 대신 황희를 불러들인 것이다. 이때 황희는 나이가 60세가 넘은 은퇴기에 있었지만 세종은 중용했다. 그리고 세종은 신하들이 예측하는 보복의 정치를 하지 않았다. 태상왕 태종이 죽은 당시 조정에는 세종의 장인인 심온을 처형하는데 가장 앞장섰던 유장현이 남아있었다. 물론 모든 신하들이 태종의 위세에 눌려 심온 처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 유난히 유장현은 그 중에서도 강하게 심온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신하들은 중전의 친아버지를 죽이고 형제자매를 관비로 전락시킨 유장현이 살아남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심온 사건을 거론하는 것을 기회로 세종이 신하들의 이른바 군기를 바짝 잡아 왕권을 강화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세종은 유장현을 좌의정으로 임명해 오히려 중하게 기용함으로써 황희 등 자신의 반대파를 강하게 껴안는 포용의 정치, 배려의 정치 그리고 인의의 정치를 실천했다. 물론 개인적인 고민도 많았겠지만 세종은 정치적 안정과 모든 것을 백성을 위한 정치로 큰 틀에서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세종은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는 용인술을 발휘했다. 큰 틀에서 관료조직을 황희 등 의정부를 중심으로 한 노장 세력과 집현전 출신의 젊은 인재들을 실무진에 배치함으로써 신구의 조화와 힘의 균형을 꾀하는데도 소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 인재들의 특성을 파악해 그들에게 맡는 전문적인 직책을 맡김으로써 조직을 효율적이면서도 완벽하게 운용했다.

 

이를테면 매사에 ‘좋은 게 좋은 것이다’식인 것처럼 보이는 황희 정승은 알고 보면 확고한 정치적 신념과 관료로서의 청렴성이 돋보였고 또한 행정에 탁월한 재주를 보였다. 그런 황희에게는 인사와 행정 그리고 재정을, 황희에 비해 감수성이 풍부하고 어질었던 맹사성에게는 교육과 문화를, 그리고 융통성이 뛰어나며 순발력이 강했던 윤회에게는 외교를, 그리고 강직한 김종서에게는 국방을 책임지게 했다. 이처럼 세종은 신하들의 특성을 파악 그들의 능력이 십분 발휘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 것이다. 또한 ‘음(音-소리를 대표로 하는 문화 예술 전반. 필자주)이 풍부하면 백성이 안정된다’는 말과 함께 음악에 대한 부분까지도 신경 써 박연을 등용하였고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노비의 자식인 장영실을 중용했고 그를 통해 각종 천문과 과학적인 부분에서의 발전을 꾀했다. 이 같은 신분과 귀천을 가리지 않은 세종의 인재등용은 과거제도뿐 아니라 지방의 관리가 그 지역의 인재를 추천케 하는 ‘도천제’를 실시해 숨어있는 인재가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는 현대 직장에서도 리더에게 요구되는 일이다. 영업, 기획, 회계, 홍보 등 각각의 분야는 전문성과 숙련된 경험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런 추세에 맞춰 직장 내 인사가 이루어진다면 그 조직은 살아 움직이는 능동적인 회사가 되겠지만 학연이나 리더의 개인적인 취향만으로 인사가 이뤄지는 조직은 도태되고 죽어가는 조직이 되는 것이다.

 

세종의 노련한 정치적 안배와 통치는 당시 조선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빠르게 만들어내는 힘이 되었다. 태조와 태종을 거쳐 창업에 성공한 조선은 그동안 태종의 강한 힘으로 창업에 성공했다면 세종은 국가의 향후 먹을거리와 시스템을 정비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CEO의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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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논리가 아닌 지식의 힘

 

특히 세종은 ‘백성을 위한 정치’라는 큰 틀에서 국가를 경영했다. 이른바 ‘위민주의’ 앞에서 많은 신하들은 제도와 경전으로 세종과 대립했지만 세종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왕과 신하라는 신분의 차이에서 오는 힘의 논리가 아닌 이른바 전문성에서도 세종을 넘어 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글창제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세종은 지배사회가 글을 독점함으로써 피지배계급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려는 국가 경영보다는 쉬운 글을 만들어 모든 백성이 서로 소통하는 것이 더 합리적임을 깨닫고 비밀스럽게 조직을 운용했다.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한글창제 비밀 테스크포스팀(TFT)’이 구성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세종은 창제 팀과 수많은 회의와 토론을 거쳐 한글을 만들어 반포했지만 만만치 않은 반대에 봉착하기도 했다. 최만리, 하위지 등 세종이 평소 아꼈던 신하들마저 한글 창제의 반대논리를 거창하게 폈지만 세종을 당할 수는 없었다.

 

세종은 유교적 가르침, 과학적 근거, 언어학적 논리 등 수많은 격론을 통해 한글을 발표할 수 있었다.

 

이처럼 세종 리더십의 기본은 실력을 바탕으로 하는 전문성이다. 세종의 왕자시절부터 몸에 베인 학문 연구는 왕이 된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새벽 4시에 기상 해 밤 12시가 넘어 취침할 때까지 세종은 공부와 경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세종은 온갖 질병에 시달렸다. 고질적인 안질환은 점점 심해져 재위 말년에는 앞에 서 있는 신하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요즘으로 말하면 혈관질환에 당뇨 게다가 각종 풍질환까지 있어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럼에도 세종의 백성을 위한 리더십은 변함이 없었다. 특히 가뭄이 계속되어 수많은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자 세종은 이를 모두 자신의 부덕으로 여겼다. 신하들이 극구 반대했지만 경복궁 경회루 옆에 초가집을 짓고 그곳에서 무려 2년4개월을 기거하며 백성의 아픔을 함께 했던 사실은 지금도 감탄하게 되는 ‘공유’의 리더십이다.

 

이런 일도 있다. 한 백성이 ‘임금이 착하지 못하니 이런 수령을 보내 백성이 고생 한다’는 소리를 하다 잡혀 들어왔다. 당시 법에 의하면 그 백성은 ‘불경죄를 저지른 것으로 장 100대에 3년 유배가 가능한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나 세종은 ‘무지한 백성이 한 소리이나 이유를 살피는 게 먼저다. 죄를 묻지 마라’고 풀어주라 했다. ‘악노 사건’도 있었다. 곡산에 사는 ‘악노’라는 이가 ‘주술’로 사람을 죽였다는 죄를 짓고 문초를 받았다. 세종이 그 이야기를 듣고 신하를 파견해 알아보니 ‘악노’는 순순히 ‘내가 그랬다. 나를 죽여 달라’고 말했다. 자백도 있겠다 더 이상 조사할 게 없을 것이라는 담당 신료들의 생각과 달리, 세종은 ‘주술로 사람을 죽였다는 상황 자체가 애매하고 그렇게 쉽게 자백해 버리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며 더 깊이 조사할 것을 명한다. 신하가 그리 해 보니 ‘악노’는 ‘억울했지만 모진 고문에 고통을 받느니 차라리 자백하고 죽는 게 낳겠다고 생각했다’는 진술을 하게 된다. 이에 세종은 고문과 매를 가한 관리들을 처벌하고 제도를 정비하도록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세상 돌아가는 순리를 과학적으로 학습하지 않고 수많은 개연성을 추측할 능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섬세한 면도 있었다. 당시 제도로는 노비가 아이를 낳았을 때 받는 ‘출산 휴가’는 고작 7일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7일의 휴식으로 출산의 후유증이 가라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이에 ‘관비가 아이를 낳으면 100일의 출산 휴가를 줄 것’을 명했다. 개인의 노비에까지 제도를 들이대기엔 한계가 있었고 ‘관비 제도’가 일반 노비 운영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사회 상황을 고려한 조치로 보인다. 아울러 세종은 아무리 개인이 소유하는 사노비라 하더라고 노비의 주인이 임의로 노비를 죽이는 일을 금지할 것을 명했다.

 

언행 일치, 독선 없는 겸손의 리더십

 

세종 리더십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말과 행동의 일치이다. 세종은 모든 제도와 정책을 시행함에 많은 부분에서 이른바 예행 연습을 통해 실수와 폐해를 줄이는데 노력했다. 언행을 조심하고 겸손하게 함으로써 모든 신하들 특히 반대파의 목소리마저 수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세종은 정인지 등에게 고려사에 대한 정리를 명했다. 학자들은 세종의 명을 받들어 많은 노력과 수고로 책을 엮었지만 세종은 그 내용을 보고 불같이 화를 냈다. 특히 정몽주를 역적으로 기술한 부분에서 세종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정몽주가 비록 아버지 태종에게 죽은 정적이었지만 세종은 그를 고려의 충신으로 본 것이다. 조선의 입장에서 고려사를 집필한 신하들이 꾸지람을 들은 이유는 바로 ‘왜곡’이었다. ‘역사는 바르게 기술해야 한다’는 게 세종이 갖고 있던 역사관이었던 것이다. 세종에게 퇴짜를 맞은 정인지의 <고려사>는 훗날 수차례의 수정을 거쳐 문종이 즉위한 후에 완성되었다.

 

리더에게 가장 크게 요구되는 ‘인재등용’ 부분에 있어서도 세종은 해박한 지식과 원칙, 그리고 정치적 고려라는 통치자로서의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또한 일단 등용한 인재에 대해서는 그가 실수를 하는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보여주는 리더로서의 호방함을 보이기도 했다.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던 황희를 받아들여 무려 18년간 재상으로 중용했고 한 번 믿는 신하에 대해서는 깊은 신뢰를 보여 충성을 유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종에게서 본받아야 할 리더십은 성실함과 솔선수범이다. 앞에서 이야기 했지만 초가집을 지어 기거하고 반찬의 개수를 줄이는 등 임금으로서는 과도할 정도로 자신의 행동을 규제하고 통제했다. 이는 왕으로서의 적당한 정치적 쇼가 아닌 진심으로 백성을 위하는 그의 성실성과 마음의 표출인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세종의 리더십은 바로 지식의 힘이다. 세종은 단순한 생각과 즉흥적인 발상에서 명령을 내리거나 정책을 시행하지 않았다. 많은 토론을 통해 균형 감각을 갖추고 그것을 공론화해 수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심사숙고를 하게 하고 이를 바르게 쓰이게 하는데 세종의 폭넓은 지식이 적용되었음은 물론 그런 세종에 대한 신하들의 존경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세종은 항상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지적을 해 달라.”

 

“백성들이 어디가 아픈지 알려 달라.”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함께 만들어가자.”

 

이런 세종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창업 후 50여 년이 지난 조선은 비로소 국가로서의 틀과 경영의 시스템이 완성되었고 그리고 후대 왕들에게는 가장 모범적인 ‘닮고 싶은 임금’의 전형이 탄생된 것이다. 어쩌면 세종이 무려 32년간 통치를 한 것도 조선왕조 500년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초석이자 행운인 셈이다.

 

자기 헌신의 솔선수범 리더십

 

현대 직장에서 세종과 같은 리더십을 찾거나 바랄 수는 없다. 그만큼 세종의 리더십은 독보적이며 헌신적이며 게다가 본인에게는 대단한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는 왕조 계급 사회였다. 하지만 좁혀 보면 세종의 수많은 리더십의 모습 중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을 발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리더의 모습이다. 공부하지 않고, 세상 돌아가는 흐름도 챙기지 못한채 알량한 옛날 경험 하나로 판단하고 지시하는 상사를 요즘 세상에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가 ‘저 사람은 끝물이군’ 생각하는데 본인만 ‘역시 나의 연륜은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군’ 하며 혼자 자뻑놀이나 하다 어느날 옷을 벗게 된다. 공부하지 않는 리더는 결코 회사에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세종에게 배울 또 하나의 리더십은 솔선수범하는 성실성이다. 직장의 리더는 전쟁터의 지휘관처럼 제일 앞장서서 전진해야 하고 궂은 일이나 힘겨운 일, 빛나지 않을 일도 부하들과 함께 나눠야 한다. 본인은 뒤에 숨어 팀원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다 ‘잘 되면 본인 덕, 안 되면 찌질한 직원 탓’을 한다면 그는 팀원은 물론 경영진에게 결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책임지지 않는 리더에게 누가 권한과 영광의 기회를 주겠는가.

 

왕자로 태어나 왕으로 32년을 살다가 54세에 생을 마친 세종. 그는 왕으로서 모든 면이 완벽한 리더였지만 개인적으로는 단 하루도 편하게 잠자리에 들지 못했던 불행(?)한 왕이기도 했다. 그렇다. 리더는 행복하고 즐겁고 신나는 일보다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자리이다. 그래서 리더의 고민은 오늘도 계속된다. 당신은 지금 회사일로 어떤 선택에서 고민하고 있는가. 그러면 당신은 리더로서의 첫 번째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책상서랍 속의 대책’이라는 말이 있다. 게으른 공무원을 일컫는 표현이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30년 전 누군가가 세운 ‘정책서’를 ‘사건이 날 때 마다’ 꺼내 발표하고 또 집어넣는 행태를 꼬집은 것이다. 공부하는 리더에게 책상 서랍 속의 기획은 있을 수 없다. ‘내문서’에 보관되어 있는 보고서를 꺼내 문구나 바꿔 제출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 공부하고 실천하고 함께 하는 리더가 되려면 오늘도 내일도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 할 것이다.

 

[사진 포토파크]

 

박기종자료제공 Citylife
발행일 2015.07.30기사입력 2015.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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