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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가옥과 함께 북촌을 대표하는 근대 한옥이자 일제강점기 서울 최상류층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백인제 가옥. 지난 11월18일 국내 대형 한옥 중 최초로 백인제 가옥이 시민들의 곁을 찾았다. 1000만 관객을 기록한 영화 <암살>의 촬영지로도 알려진 이곳은 영화보다 더 고요한, 그리고 더 깊은 느낌을 풍기며 순식간에 10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한다.

 

‘100년의 시간을 간직한다’는 말을 글로 표현하는 것과 현실에서 보고 느끼는 것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100여 년 전 사람들에게 일상이었던 공간이 어느덧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후손들에게 다가왔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고, 당시 시대상을 엿볼 기회로 다가온다는 얘기가 더욱 매력적으로 들린다. 바로 백인제 가옥의 이야기다.

 

11월18일, 백인제 가옥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자마자 서울시 공식 홈페이지에는 백인제 가옥을 찾고자 하는 이들의 문의와 가이드투어 신청(12월30일까지 하루 4번 운영)이 줄을 잇고 있다. 혼자 사색을 즐기며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 좋지만, 이 장소에 담긴 이야기 보따리를 상세하게 풀어보고자 한다. 11월20일 오후 3시, 사전에 신청한 투어 시간에 맞춰 북촌을 찾았다. 정해진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해 가옥의 이곳 저곳을 살펴보고자 사진기를 들고 걸음을 옮겼다. 역사적인 유물로서 인정받는 오래된 가택. ‘백인제가옥’이라 쓰인 현판을 바라보며 발을 들어선 순간, 한 폭의 그림 같은 가옥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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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문화재 제22호, 백인제 가옥

 

방문하기 앞서, ‘백인제 가옥’의 유래를 알아두는 것이 이곳에 담긴 역사적 사실과 배경을 이해하는 데 한층 도움이 된다. 1913년 한성은행 전무이자 조선재계의 1인자였던 한상룡은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460㎡ 대지 위에 전통방식과 일본양식을 접목해 근대 한옥(현 백인제 가옥)을 지었다. 이후, 재정난으로 인해 1928년에 가옥을 한성은행 소속으로 넘기게 됐고, 1935년에 개성 출신 민족 언론인이었던 최선익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그리고 1944년,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로 서울 백병원의 모태인 백인제 외과의원을 세운 백인제 박사가 가옥을 소유하게 된다. 1968년부터는 그의 아내 최경진 여사가 원형을 거의 보존해 안주인으로서 가옥을 지켜왔다. 현 명칭은 마지막 소유주인 백인제 박사에서 유래된 셈이다. 2009년, 서울시에서 백인제 가옥을 매입한 이후 가옥 내 원형과 달라진 일부분을 건축 당시 모습으로 복원, 민속문화재로 선보이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마쳐왔다. 그리고 2015년 11월, 백인제 가옥은 건축 당시 서울 상류층의 생활상을 연출 전시한 ‘역사가옥박물관’으로 첫 문을 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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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과 창문에 배인 역사의 잔존

 

백인제 가옥이 지어진 일제강점기엔 조선의 왕족과 고관대작들에게만 허용되고 일반인들에겐 엄격했던 규제가 풀리는 시점이었다. 그 당시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흔적들이 백인제 가옥 곳곳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흔적들은 백인제 가옥이 전통한옥의 방식과 일본의 건축 방식을 접목한 근대 가옥으로 알려지게 된 가장 큰 배경이다. 몇 가지 살펴보자.

 

가옥에 들어서기 전, 대문을 중심으로 길게 이어진 대문간채 돌담의 경우 위에는 사괴석(육면체의 화강석), 아래는 견치석(뒤가 뾰족한 각뿔형의 돌)으로 구성돼 이곳을 북촌의 다른 한옥과 분류시키고 있다. 집 안의 헛담(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지어진 담) 역시 담이 낮은 풍습을 가지고 있던 조선시대 전통양식과 달리 일본의 건물처럼 높게 지여져 있으며(서울시에서 1913년 건축 당시의 높이 그대로 복원했다), 전통한옥에선 볼 수 없는 2층 공간도 있다는 점이 백인제 가옥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는 집을 의도적으로 일본식으로 지어 경성 사람도 구경오거나 일본 사람들도 친근하게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 밖에도 안채의 대청과 툇마루에 전통적인 우물마루(‘井’자 모양의 마루)를 사용한 것과 달리 사랑채의 툇마루와 복도는 물론 사랑대청에도 일본식 장마루를 적용하거나 다다미가 깔려있다. 투어를 신청한 사람들과 함께 한옥에선 생소한 복도를 거닐며 유리창 밖을 바라봤다. 세심한 부분까지 조선과 일본의 양식을 골고루 섞은 이곳에서 그야말로 미디어 속에서만 보던 <모던 타임즈>를 떠올리다가도, 곧바로 웃음을 접었다. 우리나라 근·현대 100년의 역사를 알기 때문에 느껴지는 한편의 씁쓸함까진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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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눈에 보는 북촌의 사계

 

백인제 가옥 곳곳의 볼거리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가장 먼저 지난 7월 1000만 관객을 기록한 영화 <암살>을 촬영했던 백인제 가옥 ‘안채’의 경우 가족 중 직계 남성이 아니고서는 절대 입장이 불허한 곳이었다고 한다. 가이드투어 중 부엌, 다락방 앞에서 “이곳이 전지현, 이정재, 하정우가 있었던 장소”라는 얘길 듣자, 투어를 신청한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휴대전화 촬영속도가 빨라졌다. 혹은 영화 속에서처럼 서 보기도 하고 창 밖을 바라보기도 한다. 책이나, 영화 속에 나오는 장소를 찾을 때 느껴지는 특유의 친숙함과 설렘이 두 배로 다가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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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안채와 복도로 연결된 사랑채는 역사적 의미에서 백인제 가옥의 빼놓을 수 부분이다. 사랑채를 잘 살펴보면 다른 근대 가옥에 비해 넓다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이곳이 단순 살림 목적이 아닌 정치적, 사업적인 부분으로 연회를 대접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사랑채 대청의 문을 열면 바로 바깥의 사랑마당이 이어진다. 이는 특히 일본 고위 인사들을 위한 연회를 염두에 두고 이 건물을 지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 이 건물에서 역대 조선총독부 총독들을 비롯한 당시 권력가들은 물론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 2세도 연회를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이곳을 다녀온 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곳은 의외로 내별당이었다. 북촌의 높은 대지에 자리한 가옥의 위치상 북촌과 더불어 종로의 전경이 한 눈에 보이는 곳에 지어진 내별당. 사랑마당을 지나면 당시 남성들만 다닐 수 있었다는, ‘별채로 향하는 길’이 따로 조성되어 있다. 가는 길목에 풀과 돌계단, 나무 등이 꾸며져 있어 한눈에 봐도 집을 지었던 한상룡이 이곳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다. 내별당 안에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이곳은 혼자서 책을 읽거나 사색을 즐기기 위한 공간으로 쓰였는데, 내부 방문에는 누군가 찾아오면 간편하게 얼굴만 볼 수 있도록 네모난 작은 구멍이 만들어져 있어 유독 눈에 띈다. 유리창 밖을 내다보니 북촌의 한옥들이 마치 미니어처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다. 정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위치해 막대한 부를 쌓았던 그에게 이곳은 모든 것과 동떨어진 휴식처로 작용됐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남자들의 서재 욕구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말이다.

 

이승연 기자자료제공 Citylife
발행일 2015.12.10기사입력 2015.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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