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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은 대부분 아버지와 싸웠다. 자기보다 ‘큰 아버지(융의 개념으로 ‘great father’)’를 둔 덕에 예술의 기본 모토에 해당하는 저항과 거부를 실현할 수 있는 예술가로서의 기회를 얻기도 했다.

 

반대로 자식들과는 어땠을까? 대부분 예술가의 자식농사는 형편없었다. 로댕, 피카소의 자식들은 금치산자나 다름없었다.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다빈치, 카라바조, 뭉크, 베이컨 등 수많은 예술가들은 독신자거나 동성애자로 아이를 낳지 않았다. 렘브란트는 모든 자식의 죽음을 경험해야 했다. 라파엘로, 반 고흐, 에곤 실레 등은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어쨌거나 미술가의 자식 중에서 아버지를 압도할 만한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대(大) 피터 브뤼겔과 소(小) 피터 브뤼겔처럼 자식에게 화업을 물려주는 경우가 대표적인 자식 성공 사례다. 도제 시스템이 없어진 후에는 고작 르누아르가 아들을 잘 키운 모범적인 가장에 속한다. 르누아르가 피카소나 뒤샹 같은 거장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던 일은 아니었을까?

여하튼 미술사 거장들의 망친 자식농사 내막을 살펴보자.

 

로댕은 숱한 여자를 만났고 사랑했지만 정작 자식은 아들 하나밖에 없었다. 로댕은 젊은 시절 재봉사인 로즈 뵈레를 만났다. 아마 모델로 만난 듯한데, ‘젊은 여인의 초상’이라는 작품이 끝난 후 두 사람은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그러나 정식 결혼을 원한 뵈레와 달리 로댕은 ‘예술가에게 결혼은 독’이라는 핑계로 결혼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뵈레가 아들을 낳았을 때도 결혼을 생각지 않았고, 겨우 가족에게 알렸을 뿐이다.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는 마야’, 1938년, 캔버스에 유채, 피카소. 피카소는 자식들을 별로 챙기지 않았고, 유족들도 피카소의 장례식에 온 자식들을 불청객으로 대우했다.

 

평생 독신으로 어머니, 누이동생과 살았던 클림트는 모델과 정을 통하고 그녀들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여럿 낳은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클림트의 여성 편력, 특히 모델들과 정을 통한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로 회자됐다. 사실 그림 속 모델들의 표정과 포즈, 그리고 분위기는 엄격하고 딱딱한 아틀리에에서 작가의 요구에 의해 용이하게 생산될 수 있는 종류의 것들은 아니다.

 

여기에는 분명 클림트만의 어떤 모종의 자유로움과 퇴폐와 에로티시즘과 향락의 아우라가 존재했음을 추측케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다시 말해 이런 진한 관능의 분위기는 클림트의 모델이 단순히 모델이 아닌, 그 이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실제 모델과 가장 친밀해지는 방법으로 모델과의 육체적 접촉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다시 말해 모델들은 클림트와 정을 통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단순히 그려지기 위한 포즈를 넘어선 기묘한 포즈를 자연스럽게 취해줄 수 있었던 셈이다. 클림트는 이런 모델들에 관한 한 금전적으로 인색한 적이 없었으며, 늘 어떤 식으로든 돕고 싶어 했다. 그런 사실은 그의 인간미를 칭송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경제적 곤경을 모면해주는 대가로 그녀들은 아마 그에게 최선을 다해 ‘관능’을 자아내는 모델 노릇을 해줬을 테니.

 

1918년 클림트가 세상을 뜬 후, 사생아를 낳았던 여자들이 제기한 유자녀 생계부양비 지급청구 소송이 스무 건이나 됐는데 이 가운데 네 건이 받아들여졌다. 그중에서도 모델 중 가구공의 딸인 열아홉의 미치 짐머만은 서른여섯의 클림트와 사랑에 빠졌다. 두 아들(첫째는 구스타프, 둘째는 오토)을 낳았는데,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희망1’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아이들은 당연히 여자의 성을 따랐고, 클림트는 가끔씩 그들을 찾아갔다. 그녀의 요양 등으로 인해 10년쯤 소원하게 지내다 클림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기 4년 전 그녀는 두 아들을 데리고 클림트 작업실 근처로 이사 왔다. 타인의 눈을 의식한 클림트는 작업실을 옮겼고, 두 사람 사이도 그렇게 끝이 났다.

 

피카소는 여자들과 끊임없이 연애하고, 동거하고, 결혼했던 것에 비하면 자식이 정말 없는 편이다. 공식적으로 7명의 여자 중 3명의 여자에게서 총 4명의 자식을 낳았다. 피카소는 말년에 자식들 문제로 괴로움을 당했지만, 그런대로 안정된 생활을 유지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마지막 여자 자클린느 덕분(?)이었다.

 

1970년대 90세로 접어든 피카소는 여전히 화가와 모델을 그리는 한편, 마지막으로 가족의 사랑을 담은 몇 점의 그림을 제작했다. ‘모성’도 그중 하나다. 피카소는 이전부터 틈틈이 어린 자식들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못난 자식들 때문에 괴로워했고 자상한 아버지 노릇을 못한 점이 마음에 걸렸으나, 그림 속에서만은 애정을 표출했다. 사실 자식으로서의 아이가 아닌, 아이 자체는 그가 늘 사랑한 대상 중의 하나였다. 마치 개, 고양이, 생쥐, 거북이, 앵무새를 포함한 모든 동물을 사랑했듯이.

 

그렇지만 피카소는 아이들에게 예술적 영감과 상상력을 제공받는 경우에나 좋아했지, 자신을 방해하거나 징징거리면 금세 싫증을 냈다. 그런 피카소의 아이들이 평범하게 잘 자랐을 리 만무하다. 피카소의 맏아들이자 그의 이름을 물려받은 파울로는 일평생 직업도 야심도 없이 아버지의 운전사로 살다 결국 가망 없는 알코올중독자로 전락했다. 피카소의 다른 자식들도 대체로 머리가 명민하지 못했고 무능했으며 아버지 사후에 챙길 막대한 상속에만 관심이 있는 부류였다.

 

유일하게 피카소를 먼저 차버린 프랑수아 질로는 1965년 ‘피카소와 함께한 삶’이란 책을 출간한다. 그녀는 이 책을 통해 피카소와 살았던 10년 세월 동안 참기 힘들었던 고통에 대해 냉정하게 피력했다. 특히 피카소의 파렴치한 애정 행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화가 난 피카소는 자신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부당한 침해라며 판매금지 처분 신청을 냈으나 기각된다. 그 불똥이 질로가 낳은 클로드와 팔로마에게까지 튀었다. 둘은 휴가철마다 아버지 집에서 보냈는데 그것조차 금지당했다. 더불어 또 다른 부인 마리 테레즈가 낳은 마야까지도 아버지 얼굴을 볼 수 없게 됐다. 1966년 클로드가 아버지를 상대로 상속권 소송을 제기하면서 피카소와 자식들 간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여인의 세 단계’, 1905년, 캔버스에 유채, 구스타프 클림트. 클림트는 모델들과 정을 통함으로써 보다 자유로운 포즈를 끌어냈으며 모델에게 금전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피카소는 자신의 단골 이발사며 친구로 마지막 순간까지 절친했던 아리아스에게 말했다.

 

“아리아스. 자네는 행복한 사람이야. 자네 아들들은 직업을 가져 열심히 일하고 자네를 사랑하지 않나. 내 자식들은 무위도식하며 기껏 한다는 짓이 나를 상대로 소송 거는 짓이라네.”

 

피카소가 자식들과의 사랑의 단절로 괴로워하며 폭음하자 당시 아내였으며 무려 50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는 자클린느는 남편의 건강을 염려하면서 장남 파울로를 제외한 다른 자식들의 집안 출입을 엄격히 차단했다. 또한 그녀는 이전 부인 마리 테레즈의 뜬금없는 방문과 편지질, 전화질에 화가 나 30년 동안 지급하고 있는 수당을 중지하라고 피카소에게 요구하기도 했다.

 

피카소의 장례식, 4월임에도 눈보라 치던 날 장남 파울로를 제외하곤 피카소의 다른 세 자식인 마야, 클로드와 팔로마, 그리고 손녀 마리나(훗날 자신의 비참한 유년시절이 모두 할아버지 탓이라고 비난하는 책을 출간)와 손자 파블리토(과산화수소수를 마시고 자살)는 불청객이라며 장례식 참석조차 허용받지 못했다. 그들은 근처 언덕 위 먼발치에서 장례식을 지켜봐야만 했다.

 

‘예술가의 가장 위대한 아이는 예술작품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

 

유경희 미술평론가자료제공 매경이코노미
발행일 2016.01.18기사입력 2016.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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