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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에서 결혼을 앞둔 딸을 둔 어머니는 딸의 손을 꼭 잡고 나신으로 조각된 ‘다비드’와 ‘헤라클레스’의 조각상이 전시된 피렌체 시청사 건물이 위치한 광장으로 나들이를 다녀와야 했다. 남자의 벌거벗은 몸을 볼 기회가 흔하지 않았던 당시에 딸들에게 남자의 몸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랬다고 한다. 지금이야 시청사 광장이 관광 명소가 됐지만, 당시에는 아주 훌륭한 성교육 장소였던 모양이다.

 

르네상스 시대 천재 조각가로 칭송받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상, 그리고 미켈란젤로가 가장 싫어했던 후배 조각가 바치오 반디넬리의 ‘헤라클레스와 카쿠스’라는 두 조각상은 피렌체 시청사 정문 입구에 나란히 사이좋게 전시돼 있다. 겉으로는 사이좋게 놓여 있지만, 이 조각상들만큼 당시 상반된 정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작품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1504년 1월 25일, 피렌체에서 이름깨나 있는 예술가와 장인, 그리고 정부 관계자 32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미켈란젤로와 앙숙이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비너스의 탄생’으로 이미 명성을 떨친 화가 보티첼리도 초청받았다. 얼마 안 있으면 완성될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상을 어디에 전시할 것인가를 놓고 조언을 구하려는 목적이었다.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다비드를 그리스도 탄생을 예언한 선지자로 여긴 참석자는 다비드상을 피렌체 성지인 두오모 성당이 위치한 광장에 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 성향이 강한 참석자는 다비드를 이스라엘을 침공한 거인 골리앗을 돌팔매로 물리친 용맹스러운 전사로 여겨 피렌체 시민이 모두 볼 수 있는 시청사 광장에 전시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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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 천재 조각가로 칭송받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상, 그리고 미켈란젤로가 가장 싫어했던 후배 조각가 바치오 반디넬리의 ‘헤라클레스와 카쿠스’라는 두 조각상은 피렌체 시청사 정문 입구에 나란히 사이좋게 전시돼 있다. 두 조각가의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이해관계가 얽혀 한자리에 놓이게 됐다. 왼쪽 다비드상은 진품은 아니다.


이 회의에서 결론을 내릴 수가 없자, 참석자들은 미켈란젤로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미켈란젤로는 외국 귀족들로부터 주문받을 목적으로 외국 사신들이 드나들 때 잘 보이는 시청사 정문 입구에 놓이길 원했다. 미켈란젤로는 다비드 조각상을 주문용 ‘Calling Card’로 활용할 속셈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종교적 관점과 정치적 관점, 그리고 주문을 받기 위한 전시 작품으로 활용하는 등 다비드 조각상 한 작품을 놓고 해석이 제각각 달랐다.

 

원래 이 작품을 주문할 때는 다비드를 그리스도 탄생을 예언한 선지자로 여겨, 다비드 조각상을 피렌체에서 가장 성스럽게 여기던 두오모 성당 외벽에 설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작품이 완성되던 1504년, 피렌체 정부가 처한 국내외 상황은 매우 곤혹스러웠다. 메디치 가문이 지배하던 60년 독재 시대가 끝나고(1434~1494년), 모처럼 시민이 주인이 된 공화정 시대를 맞이했으나 공채이자를 지급하지 못할 정도로 재정이 어려웠다.

설상가상 피렌체에서 생산되는 양모제품을 수출하는 유일한 항구였던 피사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피렌체가 이렇게 사면초가에 처하자 시민들도 불안해했다. 메디치 가문을 추방하고 어렵게 탄생한 피렌체 공화정 정부는 시민 지지와 공화정 정부의 정당성을 찾을 상징물이 절실히 필요했다. 피렌체 공화정 정부는 다비드상을 시민이 잘 볼 수 있는 시청사 광장에 전시해, 피렌체 시민들이 이스라엘을 침입한 거인 골리앗을 물리치고 조국을 지켜낸 영웅 다비드와 같은 덕목을 갖춰주길 원했다.

 

기대와 달리 다비드상으로 상징되던 공화정 정부는 오래가지 못하고, 메디치 가문이 복귀했다.

 

메디치 가문에서 교황(레오 10세)이 선출되고 피렌체를 다스리게 되자, 피렌체 시민들은 메디치 저택을 방문하려고 줄을 길게 늘어섰다. 예술의 최대 후원자였던 권력층이 바뀌면 예술의 주제도 바뀌기 마련이다.

 

앞서 공화정 정부가 다비드 조각상을 내세워 공화정의 정신적 상징물로 삼았듯, 메디치 측근들은 권력의 정당성을 성경이 아닌 고대 신화에서 찾으려 했다. 그중에서도 로마제국 황제들의 용맹스러운 권력을 상징하는 헤라클레스가 안성맞춤이었다. 고대 신화에 의하면 소떼를 몰래 훔친 괴물 카쿠스는 성격이 포악해 아무도 당할 자가 없었다. 이 괴물은 헤라클레스에게 도전하는 교만을 부리다 결국 헤라클레스가 내려친 곤봉으로 죽고 만다(헤라클레스의 10번째 노역). 헤라클레스는 피렌체 권력을 새로이 장악한 메디치 가문으로, 헤라클레스에게 죽임을 당한 카쿠스는 메디치 가문을 추방시킨 공화주의자를 상징한다. 그래서 ‘헤라클레스와 카쿠스’라는 대리석 조각상을 보면 헤라클레스 손에 곤봉이 들려 있고, 죽임을 당한 카쿠스는 헤라클레스 발밑에 깔려 있는 형상으로 묘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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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미켈란젤로의 다비드 대리석 조각상 진품이다. 피렌체 갤러리에 전시됐다. 다비드를 두고 그리스도 탄생 예언자나, 이스라엘을 침공한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용맹스러운 전사 등 다양한 해석을 내놓는다.


정권이 바뀌며 정치적인 성향을 띤 예술가들도 곤경에 처해졌다. 얼떨결에 공화주의자로 칭송받게 된 미켈란젤로도 예외는 아니었다. 메디치 정권은 이 작품을 바치오 반디넬리라는 조각가에게 주문하려 했다. 이 조각가의 형은 메디치 가문이 추방당했을 때, 메디치 가문이 보유한 그림과 보석을 소중히 보관해준 친분이 있었다. 메디치 가문이 이 조각가에게 작품을 주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미켈란젤로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은 이 조각가가 자신과 오랫동안 앙숙이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친분이 두텁다는 점이었다. 미켈란젤로는 극약처방이라도 내려야 될 상황이었다. 메디치 저택을 찾아가 무료로 제작하겠다는 제안까지 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를 반 메디치 성향을 지닌 예술가로 여긴 메디치 측근들은 결국 바치오 반디넬리를 택했다. 미켈란젤로가 이 후배 조각가가 자신이 이미 오래전에 그려놓은 밑그림을(아마 삼손인 듯하다) 베꼈다고 주장했지만 허사였다.

 

이후 피렌체 정부가 발주하는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아닌 바치오 반디넬리 손으로 제작됐다. 피렌체 권력을 다시 장악한 메디치 가문은 자신의 권력이 헤라클레스와 같이 강력한 힘을 지녔다는 점을 과시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잘 보이는 시청사 광장에 전시하게 한다. 이런 당시 정치적 배경에서 이 조각가가 완성한 헤라클레스와 카쿠스 대리석 조각상은 당대에 천재로 칭송받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상과 나란히 피렌체 시청사 정문에 놓이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렇게 1500년대 초반의 예술작품들은 주문자의 권력을 연출하는 작품과 같았다.

 

평화의 시기에는 화려한 색으로 치장된 그림이, 정치가 격변하는 시기에는 그림보다는 조각 작품이 시민의 눈길을 끌게 마련이다. 그래서 메디치 가문이 재집권하는 1500년대 초반 피렌체에서는 그림보다도 조각에 대한 주문이 많았다. 당대 최고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을 피렌체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것도 이런 시대적 배경 때문이다.

 

하지만 한때 반 메디치 성향을 보여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작품 주문을 받지 못했던 미켈란젤로는 이후 다시 메디치 가문의 총애를 받게 되고, 자신의 고향인 피렌체를 중심으로 전성기를 맞이하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성제환 원광대 경제학부 교수자료제공 매경이코노미
발행일 2016.01.25기사입력 2016.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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