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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 후반, 메디치 가문은 딸을 결혼시킬 때 결혼 지참금으로 현금 대신에 그림을 들려 보냈다. 그 그림은 이내 피렌체 부자들 사이에서 고가로 유통되다, 독일의 부유한 화랑 주인 손에 넘어간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 폭격으로 작품은 불타버린다. 불행 중 다행으로 흑백사진이 하나 남아 있어 그 윤곽만을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 있는데 바로 ‘위대한 로렌초’가 당대 최고의 화가 루카 시뇨렐리를 피렌체로 초청해 주문한 ‘판의 궁정’이다.

 

 


그림 (1) 루카 시뇨렐리의 ‘판의 궁정’. 정력이 센 목동 수호신 ‘판’이 숲 속을 거닐던 아름다운 요정을 강제로 추행하려다 실패한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면에는 피렌체 최고 권력자인 ‘위대한 로렌초’가 피렌체 황금시대의 왕으로 신격화되는 과정이 담겨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불에 탔으나 흑백사진이 남아 윤곽을 알아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흔히 아주 정력이 센 목동들의 수호신 ‘판(Pan)’이 숲 속을 거닐던 아름다운 요정을 강제로 추행하려다 실패한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작품 이름을 ‘사랑의 실패’라고 붙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신화적인 내용뿐 아니라, 피렌체 최고 권력자인 위대한 로렌초가 피렌체 황금시대의 왕으로 신격화되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르네상스 시대 후반기, 힘든 일을 하지 않아도 배불리 먹고 노래하며 즐길 수 있는 지상낙원 ‘아르카디아’가 원죄를 짓고 추방당한 천국 ‘에덴동산’을 대신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아르카디아는 노래하기를 즐기는 목동의 수호신 판의 고향이다. 목동들이 돌보지 않아도 들판에서 배불리 풀을 뜯어 젖이 부푼 암염소들이 스스로 제 집을 찾아드는 그런 천국이었다. 부족함 없이 풍요로웠을 뿐더러 악기 연주와 노랫소리가 끊이질 않는, 환희로 가득 찬 지상낙원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런 이상향을 묘사한 대표적인 작품 두 점이 전해 오는데, 그중 하나가 피렌체에서 그려진 ‘판의 궁정’이고, 다른 하나는 베니스 화가 조르조네가 그린 ‘전원의 합주’다.

 

루카 시뇨렐리는 위대한 로렌초의 초청을 받을 정도로 유명했다. 또 조르조네는 당시 유럽 귀족으로부터 주문이 밀려 베니스에서 가장 큰 공방을 운영하던 화가였다. 그런데 똑같은 주제를 회화로 표현한 작품이지만, 언뜻 봐도 사뭇 다르다. 이 대가들이 지상낙원 아르카디아를 서로 다르게 표현한 배경이 있지 않을까?

 

먼저 위대한 로렌초의 주문으로 피렌체에서 그려진 ‘판의 궁정’이란 작품부터 감상해보자. 1482년 12월 마지막 주 유난히 밝은 빛을 내는 별이 피렌체 밤하늘에 나타나자, 위대한 로렌초 측근 인문학자들은 이 반짝이는 별을 새로운 지도자가 탄생하는 길조로 보고 소문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위대한 로렌초를 신성화시키기에 아주 적합한 역사적인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고 본 것이다. 이후 유난히 반짝이는 별을 기리는 ‘별들의 축제’ 행렬이 피렌체 거리를 가득 메웠다. 나이가 어려 축제의 주관자가 될 수 없었던, 위대한 로렌초의 13살짜리 어린 아들이 축제를 후원하는 책임을 맡았다. 책을 보던 인문학자들은 밤하늘만 쳐다보고, 점성술사가 사제들을 대신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한때 가장 기독교적인 도시였던 피렌체가 신비주의에 휩싸이게 됐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목동 수호신 판의 몸은 털로 뒤덮였고 강한 근육질의 염소 다리를 한 형상이었다. 이마에 뿔도 두 개나 갖고 있었다고 한다. 화가는 신화 내용대로 왕좌에 앉아 있는 수호신 판의 형상을 묘사해놨다(그림①). 그리고 판의 아래에는 술의 신 ‘바쿠스’가 술에 취해 비스듬히 누워 피리를 불고 있는 형상으로, 그 옆에는 피리를 불고 있는 벌거벗은 요정을 그려 넣었다. 아르카디아의 수호신 판이 나체로 거닐던 요정을 추행하려 하자, 도망가다 힘이 빠진 요정이 갈대로 변신했다. 화가는 갈대로 만든 피리를 불고 있는 요정을 작품에 그려 넣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작품은 신화 내용대로 풍요 속에서 음악 소리가 끊이질 않는 인간의 지상낙원을 묘사해놓은 것만 같다.

 

하지만 전해 내려오는 신화에 등장하지 않는 몇몇 표식을 눈여겨보면 해석은 사뭇 달라진다. 먼저 화가는 판이 목에 걸고 있는 둥그런 갑옷에 염소 별자리를 정교하게 묘사해놨다. 당시 점성술사들은 고대 로마제국을 황금시대로 이끈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똑같이 위대한 로렌초도 염소자리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는 점괴를 내놨다(1월 3일 새벽에 출생). 그들은 위대한 로렌초가 지도자가 될 천운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주장했다.

 

화가는 아르카디아를 주관하는 수호신 판의 형상에 염소 별자리 표식을 남겨놓음으로써, 위대한 로렌초를 곧 판처럼 피렌체를 황금시대로 이끌 주인공으로 묘사했다. 위대한 로렌초를 신격화하려고 애쓰던 인문학자들 요구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판의 머리에 난 염소의 뿔은 원래 천상이 인간에게 준 번영과 풍요의 선물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 그림에는 왕관을 나타내는 초승달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판이 염소의 뿔을 달고 있는 게 아니라, 왕관을 쓰고 있는 형상으로 그려진 것이다. 화가는 이런 의미가 담긴 상징물을 활용해 판으로 상징된 위대한 로렌초에게 왕관까지 씌워 놓았다. 이렇게 위대한 로렌초 측근 인문학자들은 피렌체의 새로운 황금시대를 술과 음악이 끊이질 않는 풍요의 시기로 묘사했고, 이 풍요의 황금시대를 다스려갈 주인으로 그들이 섬기는 위대한 로렌초를 추대했다.

 

 


그림 (2) 조르조네가 그린 ‘전원의 합주’. 역시 판의 고향인 아르카디아를 묘사했다. 허름한 옷을 입은 목동이 화려한 의상을 입은 귀족이 연주하는 현악기 류트의 음을 따라 노래를 부른다. 르네상스 시대 베니스에서 그려진 지상낙원은 도시를 떠나 풍요와 음악이 넘치는 전원생활을 동경하는 귀족들의 삶으로 묘사됐다.

 

이러는 와중에 베니스에서는 지상낙원 아르카디아가 또 다른 모티브로 그려진다. 베니스 화가 조르조네의 작품을 보면(그림②), 허름한 옷을 입은 목동이 화려한 의상을 입은 귀족이 연주하는 현악기 류트의 음을 따라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목동 앞에 피리를 들고 요염한 뒤태를 보이는 여인을 묘사했다. 목동이 젊은 귀족이 연주하는 음을 따라 노래하느라 피리를 불 수 없어 피리를 들고 있는 여인을 그려 넣은 것이다. 이처럼 르네상스 시대 베니스에서 그려진 지상낙원은 좀 더 현실적으로, 도시를 떠나 풍요와 음악이 넘치는 전원생활을 동경하는 귀족들의 삶으로 묘사됐다.

 

위대한 로렌초가 피렌체 황금시대의 왕으로 신격화되는 과정에서 피렌체 사회는 종교적 이상향이었던 ‘에덴동산’과 세속인의 이상향 ‘아르카디아’로 분리되는 중요한 시점을 맞는다. 종교는 세속적인 삶 속에서 개인 신앙으로 남지만, 신학은 그 권력을 잃고 만다. 이런 과정을 거쳐 르네상스 시대를 규정짓는 인간 존중의 시대로 들어선다. 이렇게 이 두 예술작품은 지상낙원 아르카디아의 주인공이 신화의 주인공 판에서 인간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르네상스 시대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를 찾아 발굴해낸 인문학자는 인간 존중 사상의 원천을 제공해줬고, 예술가들은 이런 변화를 작품으로 표현해냈다. 하지만 이 작품이 그려질 당시 피렌체 본점을 제외한 메디치 은행 지점이 모두 파산하는 바람에 돈으로 맺어진 후원 네트워크 사슬은 끊긴다. 신화로 포장된 메디치가의 민낯이 드러나고, 60년 권력도 막을 내린다. 그러자 메디치가를 혐오하던 피렌체 시민들은 한때 국부라고 추앙하던 코시모의 무덤 평판까지 뜯어내는 폭력성을 드러낸다(후에 복원됐다).

 

이처럼 역사는 우리에게 ‘신화가 무너지면 폭력이 발생하고, 사회는 무질서로 빠져든다’는 또 하나의 교훈을 전해준다.

 

성제환 원광대 경제학부 교수자료제공 매경이코노미
발행일 2016.02.16기사입력 2016.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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