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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드디어 내가 주문한 예배당 건축을 끝냈구려! 어떻게 지어졌는지 보고 싶네. 최소한 상상만이라도 할 수 있도록 해주게.”

 

사생아로 메디치 가문에서 두 번째로 교황의 자리에 오른 ‘클레멘스 7세’가 선조들의 시신을 안장할 예배당을 완성한 미켈란젤로에게 보낸 감사 편지다.

 

‘위대한 로렌초’가 사망하고 얼마 안 돼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급작스럽게 추방당하는 바람에 메디치가 자손들은 로렌초의 영묘조차 마련하지 못했다. 한때 ‘조국의 수호자’로 칭송받았던 위대한 로렌초가 사후에는 이렇게 천대받을 줄 누가 알았으랴. 교황은 임시로 모셔진 위대한 로렌초와 자신의 아버지 시신을 한 예배당에 모시기로 결정했다. 이어 예기치 못하게 피렌체를 다스리던 형과 조카가 사망하자 이들의 시신 또한 함께 안장하기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원래 계획은 불가피하게 여러 번 수정됐고 심지어 미켈란젤로가 “교황님, 나는 당신의 종이 아닙니다”라고 불평할 정도로 메디치 가문과 미켈란젤로의 불편한 관계가 지속됐다. 우여곡절 끝에 미켈란젤로는 이 예배당을 메디치 선조들의 영묘 조각상으로 장식했고 그렇게 오늘날 ‘(신)성구실’이라 불리는 걸작이 탄생한다.

 


산 로렌초 교회 신성구실. ‘위대한 로렌초’와 메디치 가문의 입상 영묘. 미켈란젤로는 이 예배당을 메디치 선조들의 영묘 조각상으로 장식했는데 영묘에 조각된 얼굴은 영묘 주인과 전혀 관련이 없는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완성품이라기보단, 미완성 작품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거칠게 조각된 것이 특징이다.

 

이곳 입구에 들어서면, 양쪽 벽면에 얼굴만으로는 누군지 알 수 없는 장군 형상으로 조각된 두 개의 대리석 입상(立像)이 있고 바로 아래 나체로 조각된 여자와 근육질의 남자가 비스듬히 누운 포즈로 조각돼 있다. 완성품이라기보다는, 미완성 작품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칠게 조각된 것이 특징이다.

 

후대 미술사가들은 비스듬히 누운 형상으로 제작된 조각상을 ‘밤과 낮, 그리고 황혼과 새벽’으로 이름 짓고, 인생의 덧없음을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미켈란젤로는 왜 누구를 기리는 영묘인지 알 수 없도록 영묘를 제작했을까? 르네상스 시대 귀족이나 고위 성직자의 영묘를 제작할 땐 형상을 생전의 모습과 유사하게 묘사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우리나라도 비석을 세울 때 후손들이 알아보기 쉽도록 이름을 반드시 새겨 넣는다. 미켈란젤로가 메디치 가문의 영묘를 조각하면서 특정인을 위한 영묘를 상징하는 표식을 명확히 남기지 않은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당대 최고 조각가로 교황의 영묘(말썽 많던 교황 율리우스 2세)까지 제작한 경험이 있었던 미켈란젤로다. 하지만 미켈란젤로가 다듬은 대리석에만 열중하면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은 더욱 미궁에 빠지고 만다. 필자는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 복귀해 다시 권력을 잡아가던 당시 상황을 곁들여 작품 감상을 해보려 한다. 의외로 쉽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메디치 가문은 추방당한 지 18년이 지난 1512년, 추기경이었던 위대한 로렌초의 둘째 아들(후에 교황 레오 10세) 덕분에 피렌체로 복귀할 수 있었다. 메디치 가문이 다시 피렌체로 돌아왔지만 마키아벨리와 같은 공화주의자 때문에 피렌체 민심은 메디치 가문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메디치 가문을 더욱 난처하게 한 것은 메디치 은행이 파산해 빈털터리가 됐다는 점이다. 한때 막대한 부와 유럽 군주와의 친분 등으로 피렌체를 보호해주던, 과거의 메디치 가문이 아니었다. 단지 피렌체 시민들은 교황의 후원이 있으면 다른 국가가 피렌체 영토를 침범하지 못할 것이라 여기고 메디치 가문을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다시 피렌체 권력을 장악한 메디치 가문은, 조심스럽게 특정 지도자를 우상화하기보다 시민 공동체를 우선시하던 마키아벨리 시대의 공화정 전통을 그대로 따랐다(적어도 초창기에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메디치 가문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교황 레오 10세는 동생을 교황군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철부지 조카는 스스로 피렌체 시민군 사령관이라 칭했다. 또 교황은 이들을 교황이 지배하는 도시의 군주(공작이란 칭호)로 임명했다. 이렇게 종교 권력의 힘으로 교황은 물론이고 친지들까지 모두 귀족 반열에 오르게 된다.

 


사진②. 산 로렌초 교회 내 ‘위대한 로렌초’ 시신이 안장된 석관. 위대한 로렌초의 시신은 사제들이 미사를 행하는 제대의 맞은편 벽면에 위치한 직사각형 대리석 석관에 안치돼 있다. 미켈란젤로는 두 벽면에 조각된 후손들 조각상이 위대한 로렌초의 시신이 안장된 석관을 바라보는 구도로 조각함으로써 예배당 주인이 위대한 로렌초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표시했다.

 

미켈란젤로가 메디치 가문의 영묘를 제작할 때 메디치 가문은 상인 가문에서 귀족으로 신분이 상승됐지만, 피렌체에서는 공화정을 염원하는 시민 열기가 수그러들지 않았다. 피렌체는 자신을 드러내려는 메디치 가문과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시민들의 상반된 입장이 공존하는 분위기였다.

메디치 가문의 주문을 받은 미켈란젤로는 상인에서 귀족으로 격상한 메디치 가문의 위상과 특정 개인의 우상화를 자제하는 상반된 분위기를 작품에 그대로 반영해야만 했다. 당시만 해도 귀족 가문은 영묘를 제작할 때 얼굴 형상이 드러나는 조각상을 제작할 수 있었지만, 아무리 부자라 해도 상인들은 얼굴의 형상이 들어간 거대한 조각상을 영묘로 제작할 수 없었다. ‘국부’로 추앙받던 ‘코시모’도 조각상 없이 교회 바닥에 ‘국부’라고 새겨진 평판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교황의 권력으로 귀족 반열에 오른 메디치 후손들은 얼굴 형상을 묘사한 거대한 조각상 영묘를 제작할 수 있게 됐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문 후손들의 영묘를 대리석으로 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특정 개인을 드러내는 것을 꺼린 공화정 체제 전통을 따라 영묘에 조각된 얼굴은 영묘의 주인과 전혀 관련이 없는 형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조각상에 묘사된 상징물을 보고 영묘 주인을 분간해내는 수밖에 없다(사진ⓛ).

먼저 장군 복장을 하고 모자를 쓰지 않은 형상으로 조각된 영묘는 교황의 동생으로 당시 교황청 군대 사령관을 지냈던 ‘줄리아노’다. 미켈란젤로는 공식적으로 군대 사령관을 지낸 인물임을 상징하기 위해 장군의 손에 지휘관을 상징하는 바통을 살며시 쥐어줬다. 그러나 교황 승인 없이 스스로 피렌체 시민군 사령관이 된 조카 로렌초의 영묘에는 장군 모자만 씌워놓고 바통은 살짝 빼놨다. 피렌체 시민이 이 철부지를 지휘관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섬세한 상징물을 조각해놓는 방식으로 영묘의 주인을 드러내는 조심스러운 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럼 위대한 로렌초는 어디에 있을까.

 

위대한 로렌초의 영묘가 장군 형상을 한 후손 영묘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제작됐을 법한데, 어디를 둘러봐도 찾기가 쉽지 않다(현재 위대한 로렌초 영묘라고 새겨져 있는 문구는 후에 추가됐다). 위대한 로렌초의 시신은 사제들이 미사를 행하는 제대의 맞은편 벽면에 위치한 직사각형 대리석 석관에 안치돼 있다(사진②). 후손들은 교황의 권력으로 장군이 되고 귀족으로 신분이 상승됐기 때문에 전통에 따라 얼굴이 조각된 영묘로 추앙받을 수 있었지만, 아무리 위대한 로렌초라도 평민이었기 때문에 얼굴의 형상이 조각된 영묘를 가질 수 없었다.

 

미켈란젤로는 두 벽면에 조각된 후손들 조각상이 위대한 로렌초의 시신이 안장된 석관을 바라보는 구도로 조각함으로써 이 예배당 주인이 위대한 로렌초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표시했다.

 

미켈란젤로가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아 작품 활동을 하던 시기에 메디치 가문의 위상은 예전만큼 견고하지 못했다. 공화주의자로부터 시기도 많이 받았다. 메디치 가문을 위해 일하던 미켈란젤로는 피살 위협 때문에 수도원 지하에 6개월간 숨어 지낸 적도 있다.

 

이런 미켈란젤로의 신중한 성품 때문에,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후에도 메디치 가문의 영묘임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은 이 대리석 조각품만은 훼손당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가 오늘날까지도 미켈란젤로의 천재적인 재능을 감상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된 것 아닐까.

 

 

성제환 원광대 경제학부 교수자료제공 매경이코노미
발행일 2016.02.23기사입력 2016.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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