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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를 20년 넘게 최측극으로서 보좌한 조선 중기 최고의 ‘문제적 인물’ 최명길. 그는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연이은 전란 속에서 오로지 민생과 국가의 안위만을 생각한 사람이다. 그는 ‘매국노, 청나라의 앞잡이, 성리학의 배신자’라는 비난도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백성의 삶과 종묘사직이 유지될 수 있다면 욕 먹는 것이 아니라 목숨도 내놓겠다’는 각오로 악역을 자처한 인물이다. 그의 처세는 ‘청렴과 성실을 무기’로 한 ‘헌신과 소신’으로, 군주와 정권의 최전선 방패였다.

 

▶삶은 중요하다.

 

그러나 삶의 가치는 더 중요하다

 

7년간의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은 피폐해졌다. 임금이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가는 모습을 목격한 백성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기득권층은 민심 이반과 궁핍 등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의지조차 없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왕권 확립을 위해 무리한 세대교체를 추진했고 인목대비 폐모 등 엄격한 유교 원칙조차 가볍게 여겼다. 오직 왕권만 생각한 이기적 행태였다. 광해군에게도 치적은 분명히 있었다. 당시 중원의 혼란, 즉 명의 쇠퇴와 후금의 등장을 능동적인 외교로 유연하게 대처했다. 하지만 유학자들은 성리학 원리주의에 빠져 광해군의 이런 외교정책을 비난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제2의 역성혁명을 계획했고 반정 세력은 결국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세우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인조는 조선 최악의 무능한 군왕이 됐다.

 

치욕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전쟁을 겪은 조선은 후금 즉 만주족 오랑캐의 조공을 받던 국가에서 형제국으로, 그리고 종속국으로 전락했다. 그 과정에서 17세기 조선 지배층의 무능력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지배층은 현실을 무시한 채 후금과의 일전불사를 주장했고, 유일하게 전쟁을 피해야 백성과 나라를 살릴 수 있다는 작지만 큰 울림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 중심에 최명길이 있다. 그는 성리학자이며 양명학자 그리고 외교관이자 재상이었다. 그는 후금(청나라)에게 일시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평화를 얻자는 주화파의 대표 주자였다. 이 발언으로 ‘매국노, 성리학의 배반자’란 오명을 뒤집어썼지만 최명길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패배가 뻔 한 전쟁을 하는 것은 백성을 더욱 도탄에 빠뜨리고, 종묘사직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고, 누구도 선뜻 할 수 없었던 일을 묵묵히 해낸 최명길. 그의 이 같은 행적은 숙종 때 잠시 인정을 받는 듯 했지만 20세기 초까지 최명길의 이름 석 자는 조선 왕조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물론 지금은 그의 현실적 실용주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등장과 함께 이해도 역시 높아졌다. 조선 왕조의 가장 ‘문제적 남자’였던 그의 외롭고, 두렵고, 고난의 연속이었던 재상의 길을 통해 ‘모두를 살리는 원칙’과 ‘비난을 감수할 수 있는 소신’의 처세를 우리는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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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생각만이 정답이 아니다

 

최명길은 1586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영흥부사를 역임한 후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된 최기남이다. 어머니 역시 참판을 지낸 유영립의 딸로, 친가와 외가 모두 쟁쟁한 유학자 집안이었다. 최명길은 좌찬성 장만의 딸과 결혼했으나 곧 상처했고 이어 허인의 딸 허 씨와 재혼했으나 그녀 역시 최명길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

 

최명길은 어린 시절 집에서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 윤두수를 거쳐 이항복과 신흠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최명길은 여러 스승에게서 학문을 배웠는데 이를 통해 다양한 시각과 폭넓은 사고를 갖출 수 있었다. ‘한 가지 생각만이 정답이 아니라 사람마다, 상황마다 해결방법은 각기 다르게 표출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런 사고의 확장과 유연성은 훗날 최명길이 인조를 보좌해 쓰러져가는 나라를 그마나 버틸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최명길은 호기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학문적인 면에서도 주자학에 머무르지 않고 양명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양명학은 성리학에 비해 현실성, 유연성에서 좀 더 폭이 넓은 학문으로 ‘실천적 성리학’ 같았다. 최명길은 양명학을 공부하면서 음절, 문장 하나 고칠 수 없는 경전과도 같은 성리학으로는 사회의 현실적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학습을 거듭한 끝에 그는 성리학뿐 아니라 점술, 도학, 풍수지리는 물론 병법에도 조예가 깊어졌다. 훗날 인조반정에 참여할 때 그는 다양한 학문적 소양을 근거로 거사 날짜를 직접 결정하기도 했다.

 

최명길은 1605년 20세 때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했다. 그리고 진사시에 8등으로 급제하고 그해 과거 문과에 합격했다. 1년 만에 모든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 그는 ‘젊은 기대주’로 주위의 시선을 받으며 요직에 진출했다. 하지만 곧 명나라 사신과 불법적으로 접촉한 것이 문제가 되어 탄핵을 받았다. 가평으로 내려간 그는 김육, 조익, 장유, 이시백 등과 교류하면서 성리학의 현실적 대안론을 연구했다. 1614년 복권되었지만 3년 뒤 다시 불거진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면서 관직을 사퇴했다.

 

광해군은 급격하게 기득권 세력과 멀어졌다. 특히 권력에서 멀어진 서인 세력은 광해군의 통치를 ‘난정 亂政’으로 규정지으며 반정을 모의했다. 김류, 이서, 신경진, 이귀, 이괄, 김자점, 구굉, 구인후는 물론 최명길도 동생인 최내길과 이 거사에 합류했다. 1623년 4월, 최명길은 스스로 점을 치고 길일을 잡아 2000여 명의 군대를 동원했다. 반정의 성공으로 인조가 등극하고 최명길은 정사공신 1등급과 완성군의 군호를 받았다. 이후 최명길은 승진가도를 달렸다. 인사권을 쥐고 있는 이조좌랑을 거쳐 정랑, 참의, 참판을 역임했고 대사헌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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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하고, 소통하는 ‘행동파 재상’

 

최명길이 정치 전면에 등장하며 그의 성향을 드러낸 것은 두 건의 사건에서다.

 

첫 번째는 공신 간 벌어진 세력 싸움의 중재를 맡으면서이다. 인조반정 성공 직후 ‘누가 더 공이 많았느냐’를 놓고 서인 세력은 양분되었다. 여기서 최명길은 이른바 ‘양시양비론 兩是兩非論’을 내세웠다. 즉 ‘양쪽 모두 주장하는 점이 옳은 점도 있고 틀린 점도 있으니 극한 대결을 막기 위해 중용의 묘를 발휘하자’는 것이다. 일견 우유부단해 보이지만 최명길은 양쪽의 이익과 손실의 균형을 맞추는 합리적인 의견 제시로 조정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또 하나는 이괄의 난이었다. 인조반정의 공신 이괄은 2등 공신으로 봉해졌고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자신보다 공이 적은 이들이 1등 공신이 된 것에 이괄은 불만을 표시했다. 이괄은 난을 일으켜 하루아침에 한양에 도달했다. 인조가 도성을 비우고 피신하자 민심은 다시 흉흉해졌다. 최명길이 나섰다. 총독부사를 자원, 전장에 나간 그는 대원수 장만과 협의해 반란을 진압했다. 최명길은 책상물림 선비가 아니었다. 그는 반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누구도 하기 힘든 일을 나서서 처리하는 해결사의 기질도 보였다. 그의 이러한 적극성과 참여 정신은 어려서부터 여러 학풍의 스승에게 접했던 학문의 넓은 폭과 유연성, 그리고 양명학을 공부하며 ‘주자학만이 사회 모순 타개의 대안’이 아니라는 깨달음의 발로였다. 즉 그는 생각하고, 고민하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는 ‘행동파 재상’이었다.

 

최명길은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집권 서인은 물론 남인과도 의견을 소통해 총 12개의 정치개혁안을 내놓았다. ‘토지는 지주가 아닌 실제 농사 짓는 사람이 소유해야 한다’는 것과 ‘양반에게도 군역을 부과해야 한다’는 등 토지, 조세, 군역 등 다방면의 혁신적인 안을 내놓았다. 또한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공신들의 비리를 척결해야 한다고 인조에게 건의했다. 이러한 개혁안은 ‘기존의 법과 제도로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없다’는 인식의 결과물이었다. 반대도 거셌다. 같은 당인인 서인들도 그의 개혁안이 급진적이라고 비판했고 더구나 최명길이 공신들의 비리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면서 공신세력과 대척점에 서기도 했다. 기득권 세력에게 최명길은 공공의 적이었다. 최명길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사사로운 이권에 개입하거나 사리사욕을 탐하지 않았다. 정적들은 최명길의 약점을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공격의 명분을 찾는데는 실패했다. 결국 최명길의 박식함, 공정성 그리고 사심 없는 일처리 방식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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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의 대쪽 같은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최명길이 대제학으로 근무할 때다. 과거시험 답안지를 검토하던 그는 수준 높은 답안을 발견하고 기뻐했다. 하지만 다른 시험관들은 ‘답안자가 문벌이 약하고 우리와 같은 당파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급제를 반대했다. 최명길은 모두의 반대를 뿌리치고 끝내 답안자를 뽑았다. 그가 바로 조선 유학의 거두 송시열이다. 평소 최명길은 상당히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였지만 옳은 길, 원칙 앞에서는 누구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1626년 인조의 생모인 계운궁 구 씨가 사망했다. 이때 조정에서 장례식 시비가 불거졌다. 인조는 자신의 어머니가 ‘왕의 생모’이므로 당연히 대비의 예로 장례식을 행하고 싶었다. 하지만 예학자들은 인조가 할아버지 선조의 대를 이은 셈이니 예법에 따라 ‘왕자비의 예’로 장례를 치를 것을 주장했다. 최명길이 나섰다. ‘일단 왕자비의 예로 장례를 치르고 제사와 사당은 대비의 예로 모시자’는 중재안을 냈고 이 의견을 인조는 받아들였다. 조정의 주류를 이루는 성리학자들은 이를 반대했고 급기야 최명길 탄핵론까지 등장했다. 인조는 어머니 장례식을 통해 어머니는 물론 자신의 생부도 왕으로 추존하고 싶었고 최명길은 인조의 의중을 미리 간파하고 있었다. 중재안을 낸 이유도 그것이었다.

 

▶개인적 비난보다 국가 안위와 백성의 목숨이 더 소중

 

1627년, 후금은 조선을 침범했다. 후금의 군대는 거침이 없었다. 최명길은 홀로 후금군 진영에 들어가 강화협상을 진행했다. 후금군의 장수는 인조와의 면담을 요구했다. 조정은 들끓었다. ‘오랑캐와 마주앉아 강화를 논의하는 것도 예의에 벗어난 행동인데 어찌 임금이 오랑캐를 만난다는 것인가’란 논리였다. 최명길은 인조에게 ‘그래도 후금군의 장수를 만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라가 스스로 싸울 힘도 없고 또한 싸워도 승리하지 못함을 알고 있는데 어찌 듣기 좋은 주장만 하는가. 그리된다면 어떻게 나라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이럴 때일수록 말을 순하게 해 그들의 말을 들어주면서 싸움을 늦추고,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고 홀로 주장했다.

 

후금은 철수했다. 그들은 사실 조선 정복이 목적이 아니었다. 명나라와의 싸움에 집중하기 위해 배후인 조선을 견제하는 것이 조선 침공의 목적이었다. 조선과 후금은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즉 형제국이 된 것이다. 하지만 조선 조정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사헌부, 사간원에서 강화를 주장한 최명길의 탄핵을 주장한 것이다. 인조는 할 수 없이 최명길을 경기도 관찰사로 내보냈다. 최명길은 동료들의 “대감의 행동이 자칫 매국노처럼 매도당할 수 있다”는 우려 섞인 충고에도 오히려 대범하게 이를 받아넘겼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개인적인 비난보다 ‘국가의 안위와 백성의 목숨이 더 소중하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었다. 여론이 잠잠해지자 인조는 최명길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이조판서로 대제학을 겸임했고 곧이어 호조와 병조판서를 겸직했다. 1634년 후금은 명을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병력 파병을 요구했다. 그는 주전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후금의 요구를 단칼을 거절하지 말고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후금의 요구에 응하지 않아도 몇 년은 무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명분과 방법이 아닙니다. 나중에 전쟁이 터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주자학의 명분론에 사로잡힌 사대부의 정신적 만족을 위해 사직과 백성을 희생시킬 수 없습니다.”

 

최명길이 주장한 화친은 일방적 항복이 전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최명길은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을 기를 때까지 시간을 벌자”고 주장했다. 이것이 ‘나라를 운영하는 치국의 실리적 방편이다’라고 ‘선화후전론 先和後戰論’을 편 것이다. 즉 협상과 양보를 통해 전쟁을 막고 그 사이에 국력을 회복시켜 전쟁에 대비하자는 안으로 매우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명에 대한 극단적 사대주의, ‘오랑캐인 후금과는 마주앉아서도 안 된다’는 주자학의 논리가 조선 사대부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1636년 5월, 후금의 왕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으로 하고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에 사신을 파견했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명나라의 황제가 있는데 오랑캐가 황제를 칭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사신조차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최명길은 또 홀로 사신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다. 이 같은 결정에 청나라의 사신은 대노하고 돌아갔다. 최명길은 후속 조치를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중치 못한 처신으로 청나라에게 전쟁을 빌미를 주었다. 이제부터라도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먼저 사신을 보내 청나라의 분위기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피난과 병력 동원 등을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향후 중요한 일은 대신들과 상의하고 승지나 내관들에게도 비밀로 해야 한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은 그를 ‘매국노, 의리를 저버린 주화론자’로 비난했다.

 

▶항복 문서를 쓰는 신하도, 그것을 찢는 대신도 필요하다

 

1636년 11월,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리던 청의 선봉 부대가 쳐들어왔다. 조정은 의견이 분분했다. ‘싸우자, 화의하자’ 논쟁만 하고 있었다. 그 사이 청나라 기병대가 숭례문까지 들이닥쳤다. 인조는 강화도로 도망가려다 발목이 잡혔다. 이때 최명길이 나섰다. “전하, 신이 청나라 장수를 만나 정묘년의 맹약을 어긴 것을 책망할 것입니다. 만약 그가 듣지 않으면 신은 그 자리에서 죽을 것이요, 청의 장수가 대답을 하면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그 시간에 남한산성으로 어가를 행차하십시오.”

 

최명길은 호위병 20명과 함께 숭례문을 나섰지만 호위병들은 모두 도망갔다. 청의 장수를 만난 그는 ‘선전포고도 없이 군대를 일으켰으니 이는 강화조약을 어긴 것이다’라고 힐난했지만 청의 장수는 ‘전쟁과 강화’ 둘 중에서 선택하라고 호통쳤다. 시간을 끌고 돌아온 최명길은 다음 날도 또 대답을 안 하고 시간을 끌었다. 청의 장수는 분노해 최명길을 죽이려 했지만 부관들이 말렸다. 그 틈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남한산성에는 한 달이면 바닥 날 식량만 있을 뿐이었다. 왕을 보호하기 위한 지원군도 남한산성 근처에도 접근할 수 없었다.

 

최명길은 ‘주화론 主和論’을 주장했다. 당시 이조판서 김상헌 등을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척화론 斥和論’을 주장하며 최명길을 ‘청나라의 첩자, 뇌물에 매수된 매국노’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그해 청과의 화의에 나섰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백성과 종묘사직만은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최명길의 변치 않는 신념이었다. 말할 수 없는 굴욕과 수치심을 감내하며 청나라를 설득했다.

 

드디어 화의가 결정되었다. 사실상 항복이었다. 항복 문서가 필요했고 누군가 작성해야 했다. 그러나 누구도 쓰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최명길이 붓을 들었다. 김상헌은 울면서 그 항복 문서를 찢었다. 최명길은 아무 말 없이 찢어진 항복 문서를 줍고는 다시 썼다. 그리고 말했다. “나라에 김상헌과 같이 문서를 찢는 신하도 필요하고 나처럼 이를 다시 붙이는 신하도 있어야 한다.” 김상헌은 자살을 시도했다. 김상헌 등 척화파의 주장은 ‘어차피 오랑캐에게 지는 것이나 조선이 망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니 전쟁을 해야 한다’였다. 그들 역시 충신이었다. 다만 최명길과는 다른 방법의 충성심인 것이다.

 

1637년 1월 인조는 지금의 송파인 삼전도에서 ‘삼두고배 三頭叩拜’ 즉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군신의 예를 올리며 치욕적인 항복을 했다. 훗날 사간들은 최명길이 임금에게 치욕적인 항복의 예를 올리게 한 장본인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남한산성에 있던 서인 당인들 중 상당수는 최명길의 판단과 처신을 마음으로는 동조했다. 큰 불을 끈 최명길은 전란을 수습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해 좌의정이 되어 청나라 수도 심양으로 갔다. 그의 목적은 포로로 잡힌 백성들의 귀환과 척화파 대신들의 송환이었다. 최명길은 800여 명의 백성들과 함께 귀환했다. 다음해 최명길은 영의정이 되었다. 그때 이른바 ‘환향녀 사건’이 불거졌다. 환향녀는 정묘, 병자호란 당시 청에 끌려간 부녀자들을 비하하는 용어였다. 사대부들은 ‘이들은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오랑캐에게 능욕을 당했으니 마땅히 이혼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최명길은 반대했다.

 

“이들이 미풍양속을 해쳤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조정과 대신들이 방책을 마련하지 못한 잘못으로 욕을 당한 것이다. 이들은 자의로 불륜을 저지른 것이 아니다. 그러니 ‘환향녀’라는 비난도 금지해야 하고 이들과의 이혼은 절대 안 된다. 만약 이혼을 하게 된다면 이들을 귀환시킬 명분이 사라지게 되어 죽을 때까지 고향땅을 밟지 못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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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보다 음지를, 명예보다 실질을 찾은 명재상

 

1637년, 청나라는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파병을 요구했다. 최명길은 단호히 거절했다.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과 명나라를 직접 공격하기 위한 파병은 명분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고 최명길은 판단했다. 최명길은 청나라의 수도 심양으로 가 조선의 입장을 설명하겠다고 자원했다. 거의 사지로 가는 셈이었다. 인조는 최명길의 충성심을 높이 사 표범가죽 옷을 한 벌 선사하며 궁 밖까지 직접 배웅했다. 최명길은 가족에게 “이번에는 내가 살아오기 어려울 것 같다. 장례물품과 염할 때 쓸 물건을 갖고 가야겠다”며 유언 같은 작별 인사를 던졌다. 그만큼 어려운 임무였던 것이다.

 

심양에 당도한 최명길은 청 태종에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조선의 파병 불가를 설득하고 요청했다. “파병을 할 수 없습니다. 성에서 내려가 항복을 한 것과 명을 공격하기 위한 파병은 다릅니다. 이로 인해 나라가 어려운 지경에 처하더라도 명과의 최소한의 의리를 지킬 것입니다. 여기 온 대신들 중에서 한두 사람이 이 자리에서 죽어도 후대에 면목이 설 것입니다.” 청 태종은 분노해 최명길을 옥에 가두기도 했으나 결국 풀어주고 말았다.

 

이후 최명길은 청나라와의 모든 외교관계를 전담했다. 매년 사신으로 가 조공 물량 하향 조정과 조선인 포로 귀환을 위한 협상에 힘을 쏟았다. 인조는 병석에 있으면서도 최명길을 불러 모든 국정을 논의하고 자문을 받았다. 하지만 최명길은 1640년, 김자점, 김류 등과 사림파 사대부들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낳은 장본인이라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고 영의정 직을 사퇴했다. 최명길은 약 2년 여를 야인으로 지내며 양명학 공부에 매진했다. 그리고 그 학통을 양아들인 최후량과 손자 최석정에게 전수했다. 사실 최명길은 상당기간 후사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조카를 입적시켜 아들로 삼았다. 그가 최후량이다. 그런데 얼마 후 재혼한 본처에게서 아들이 태어났다. 이럴 경우 양아들을 파양하고 자신의 핏줄로 가문을 잇게 하는 것이 조선 사대부의 관습이었다. 하지만 최명길은 파양하지 않고 최후량에게 가문을 잇게 했다. 예에 앞서 의리를 중시하는 모습이었다.

 

“한 번 부자의 인연을 맺었는데 상황이 변했다고 어찌 그 연을 끊겠는가.”

 

1642년 다시 영의정에 복직한 최명길에게 최대의 위기가 닥쳤다. 사실 최명길은 청과의 대외 업무를 총괄하면서 명나라와도 비밀리에 소통을 하고 있었다. 임경업 장군과 승려 독보가 그 주인공들이었다. 명나라의 파트너는 장군 홍승주였다. 그런데 홍승주가 청에 항복하면서 그간의 행적이 밝혀진 것이다. 청 태종은 진노하여 소현세자를 인질로 잡았다. 그리고 최명길을 심양으로 불러들였다. 조선 조정은 ‘그런 일이 없다’라고 발뺌을 하자 했지만 최명길의 생각은 달랐다.

 

“청나라가 우리와 명과의 비밀 소통 증거를 갖고 있을 수 있다. 처음에 속였다가 발각되면 그 화가 주상에게까지 미치니 차라리 속이지 않고 사실을 말하는 것이 낫다. 어쩌면 나와 임경업 장군, 두 사람만 죽으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청 태종은 최명길에게 형구를 씌워 소환했다. 최명길은 혹독한 고문을 받고 북관에 2년간 감금되었다. 2년간 유배 생활을 하며 최명길은 옆방에 감금되어 있던 김상헌을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해묵은 감정을 풀었다. 그간 김상헌은 최명길에게 “도의를 저버린 매국노 겁쟁이”라고 비난했고 최명길은 “명분만 좇는 꽉 막힌 사람”이라고 김상헌을 비난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인정했다. 비록 방법은 달랐지만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똑같다는 것을. 김상헌은 “이제야 서로의 우정을 되찾으니 문득 100년 의심이 풀리는구나”라고 마음을 표현했고 최명길은 “그대의 마음은 돌 같아 끝내 돌이키기 어렵지만 내 마음은 둥근 고리 같아 때로는 돌아간다오”라고 화답했다. 2년 뒤 최명길은 소현세자, 김상헌 등과 함께 귀국했다.

 

인조는 최명길을 신임했다. 하지만 최명길은 인조에게도 ‘아닌 것은 아니다’는 간언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1645년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고 장례를 3년 상이 아닌 7일장을 지내자 최명길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인조에게 정면으로 반박했다. 또한 인조가 소현세자비 강 씨를 죽이려할 때도 ‘용서해야 한다’고 간언했다. 이처럼 최명길은 공포와 두려움이 앞서는 상황에서 상대가 임금이라도 한 번 정한 원칙과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1647년 6월, 최명길은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조는 큰 슬픔에 잠겼다. 3일간 조회를 중지하고 5일간 고기반찬을 거절했으며 친히 제사를 지내고 최명길의 남은 가솔에게 3년간 녹봉을 지급하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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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 ‘문제적 남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마라

 

최명길의 처세법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명문가의 후손으로 그 역시 편하고 쉬운 길을 갈 수 있었다. 굳이 얕은 처마 밑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최명길은 모두가 명분과 체면 때문에 오른쪽으로 갈 때 홀로 왼쪽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런 신념에 대해선 그를 아끼던 동료조차도 우려를 표했지만 최명길은 ‘자신의 악역으로 다 같이 사는 방법’을 선택했다. 모두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때 나설 수 있는 것은 용기만이 아니다.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현실을 타개할 최적의 길을 찾을 수 있는 냉정한 지혜도 필요한 것이다.

 

직장 생활에서 누군가는 꼭 해야 하지만 선뜻 나서기 쉽지 않은 일들이 의의로 많다. 상사에게 보고하는 프로젝트의 실패 가능성, 업무 실적 달성의 어려움, 예산보다 더 소요되는 경비, 성과를 낼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전시성 프로젝트. 직장 동료의 반복되는 비리, 사적인 용도로 쓰는 법인카드와 회사 경비, 부서나 부장 간의 알력으로 타부서의 프로젝트를 의도적으로 반대 혹은 방해하는 행위 등이 그것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니다’, ‘잘못됐다’를 외칠 수 있는 직장인은 흔치 않다. 옳지만 혼자서 가야하는 외롭고 괴로운 상황보다는 잘못된 것임에도 다 같이 할 때 1/n로 줄어드는 가벼운 책임감의 유혹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직장인의 선택은 두 가지 뿐이다. 첫째는 먼저 부서장에게 잘못된 점, 개선해야 할 점 등을 상세히 보고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부서장이 당신의 보고를 묵살한다면 차선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기록이다. 업무일지를 꼼꼼히 쓰고 결재 서류도 협조처와 단서조항을 첨부해 남겨야 한다. 물론 “그것 보라고. 내가 애초부터 이 프로젝트는 안 될 것이라 반대했잖아. 기안서와 결재 서류에 난 도장 찍지 않았고 첨부 서류를 작성해 놓았어. 난 책임 없다고”라는 100% 면피 용도는 아니다. 하지만 직급별로 갖는 권한과 책임에서 권한보다 더 큰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

 

또 하나는 부서장의 직속 상사에게 보고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자질이 아니다. ‘왠지 부서 동료 간의 의리를 저버리는 것 같다’는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당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분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래야 살아있고 발전성이 있는 조직이 된다.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 조직을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 오히려 올바른 선택일 것이다. 면밀하게 진행 상황을 체크하고 완벽하게 자료를 준비해야 한다. 대안까지 마련한다면 최상이다. 이것은 잘못된 것을 반복하고, 실패를 뻔히 알면서도 암묵적으로 진행되는 ‘부서의 붕괴’를 막는 방법이다.

 

이때 가장 좋은 것은 빠른 타이밍이다. 배가 바다에 가라앉은 다음에 나 혼자 구명조끼를 입고 뛰어드는 모습은 비록 살아남아도 직장 내에서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없다. 배의 작은 균열이 시작되는 순간, 모두를 혹은 최대한의 인원을 살릴 수 있을 때가 가장 좋은 것이다.

 

분명 용기가 필요하다. ‘배신자, 혼자 살기위한 고자질쟁이, 스파이, 부원을 팔아먹은 나쁜 놈’ 등등 별별 소리를 다 듣게 되겠지만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언젠가 한번은 경험해야 할 역할로 받아들여야 한다. 쉬운 길, 같이 가는 길, 많은 사람이 다니는 길에서 새로운 경험, 경력을 쌓기는 어려운 것이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 쉽게 가지 못하는 길에서 당신의 능력은 훈련되고 더욱 숙성되는 것이다.

 

최명길처럼 ‘나를 버리고 전체를 살리는 용기’를 내는 순간, 당신의 회사에서 존재감 100% ‘긍정의 문제적 사원’이 될 것이다.

 

박기종 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자료제공 Citylife
발행일 2016.03.17기사입력 2016.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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