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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루칩 작가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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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수수수수수…. 바람이 불고 낙엽들이 수없이 흩날려 점점이 흩어진다. 세계가 눈앞에서 점묘화를 그리는 순간. 가슴 울리는 장면을 접할 때 우리는 그 순간을 표현할 적당한 형용사들을 떠올린다.

유승호 작가의 작품은 바로 그 순간을 점묘화로 표현한 작품이다. 그는 작은 글씨를 계속 써나가며 그림을 그린다. 이런 작품을 그리는 작가는 어떤 남자일까? 그가 좋아하는 소설책은 뭘까? 작품을 보다보니 사람이 궁금해졌다. 그리하여 먼지가 폴폴폴 날리는 국도를 구불구불 열심히 달려 그가 있는 경기도 장흥으로 간다. 작품을 보면 그는 아마도 낄낄 웃을 줄 아는 남자일 것이다. 그러나 적막과 적막 사이에 고요히 존재할 줄 알고 외로움에 눈물 흘릴 줄 아는 남자일 것 같다. 그림 속 수다와는 반대로 만나면 말수가 적은 남자일지도 모른다. 뼈마디가 두드러지는 예민한 손가락을 가진….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며 한참을 가다보니 어느덧 목적지인 가나아트센터 레지던스에 도착했다.

장마가 잠깐 소강상태에 접어든 여름. 점심나절이다. 그동안의 축축함을 보상이라도 하듯 쨍쨍하게 내리쬐는 햇빛 아래 검은 상자형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업실들은 왜 하나같이 이렇게 서늘하고 추운건지 절로 어깨가 움츠려든다. 복도에 이르니 특유의 물감 냄새가 콧속으로 훅 밀려든다.
507호의 문을 열었다. 인사 대신 변기에 물 내리는 소리가 크게 맞이한다. 동시에 그가 쓰레받기를 들고 화장실에서 나오다 마주쳤다.

“산 앞이라 벌레가 많아서요.” 멋쩍은 듯 말하는 작가를 보니 웃음이 난다. 어쩐지 상상했던 그대로여서.

작업실 문 안쪽 윗벽에는 ‘유승호’라고 쓰인 문패가 달려있다. ‘유’라는 글씨는 흐늘흐늘 팔다리를 늘어뜨린 사람모양으로 ‘유순한, 흐르는 듯한, 유연한’ 등의 연상작용과 합쳐져 영락없이 작가와 싱크로율 100%다.

10년 전 유승호의 작품을 보며 생각했다. 그는 아마도 말맛을 아는 사람일 것이라고. 연습장에 ‘꾸룩꾸룩’이라고 계속 쓰면 정말 글자가 꾸룩꾸룩거리는 것 같은 재밌는 느낌이 든다. 마치 글자가 살아있는 것처럼. 유승호의 작품을 가만히 바라 보면 우리는 평면에 그려진 그림들이 슬금슬금 움직이다가 왁자하게 귓전을 울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멀리서 보면 평범한 산수화인데 가까이서 보면 ‘야호~야호~야~호~’로 이루어진 허상의 산수화다. 손끝에서 작은 글씨들이 서로 손을 잡고 새롭게 의미가 생산되는 기쁨과 환희의 놀이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그래서 낄낄 웃게 되는. 참, 그러고 보면 이 낄낄낄이라는 글자. 정말 웃는 것 같지 않습니까? 낄낄….

글자들의 소리를 듣고 있자면 달콤하고 즐거운 감각에 휩싸인다. 수다스러움이 꽉 채운 고요함처럼 역설적인 다중감각이다. 우리는 유승호 작가가 던져 준 푸르른 공기, 맴맴거리는 여름의 소리, 메아리에 취한다. 보는 감각이 듣는 감각으로 변화되는 순간이다. 역사적으로 이런 공감각을 표현한 화가들은 특히 창의성이 뛰어난 사람들로 평가받는다. 예를 들면 화가 파울 클레는 바흐의 다성음악을 이미지로 표현했다.

글을 그냥 읽으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간 순서대로 읽게 되지만 이미지인 경우는 공간에 글자들이 웅성이게 된다. 시간을 벗어난 현장감을 지니게 되고 글을 읽는 게 아니라 ‘듣거나 볼 수’ 있게 된다.

 

 

즐거운 세계를 이루는 아릿한 슬픔

작품 속의 깨알 같은 글씨들을 보고 내뱉는 외마디 탄성이 첫 느낌이라면 그 다음 느낌은 왠지 모를 아릿한 슬픔이다. 얇고 가벼운 글자체 때문일까? 글자들은 곧 살아 움직이다 사라져버릴 것 같다. 글자. 그것은 표현이지 실체가 아니니까. 진짜 산도 아니고, 진짜 나무도 아니며, 진짜 물도 아니니까…. 우리의 생각을 반영한 언어들로 이루어진 대체물이니까. 어쩌면 그가 느끼는 세상은 그렇게도 가볍고 슬프고 즉물적이며 순간적이고도 덧없는 것일까?

멀리선 진지해 보이는 산수화가 가까이서 보면 엉뚱한 글자로 이루어져 있어 웃음이 나다가도 은근히 날카로운 블랙 코미디 같은 암시를 발견하고 뜨끔하기도 한다.

유승호 작가의 작품이 마냥 발랄하지만은 않은 이유는 수많은 문자를 섬세하게 그려내는 과정이 쾌락보다는 고통에 더 가깝기 때문은 아닐까. 그림을 보면 만만치 않은 무게감이 상대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다.

작품을 앞에 두고 누구도 이 무지막지한 노동의 양을 모른 척 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원래 화가란 직업은 작업실에 혼자서 인생을 걸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시간과 대면해야 하는 직업이다. 직접 경험해 보기 전에는 그 갈등의 무게를 상상하기 쉽지 않다. 아티스트가 제 하고 싶은 대로 살며 희희낙락 하는 인생일 거란 선입견은 경험해 보지 않은 자들의 오해다. 작업 중의 고통은 어떻게 견디세요? 그는 대답한다.

“시끄러울 정도로 큰 음악을 들어요. 일렉트로닉이나 라운지 음악 같은. 제가 공백 상태인 걸 못 참나 봐요.”

‘공백’. 분과 분 사이의 빈 틈. 상념과 상념 사이의 공간. 불안감과 허무감 사이의 여백.

그렇지만 작가가 괴롭다 말하는 ‘공백’이 실은 그와 떨어지기 힘든 속성이 아닐까 싶다. 유승호의 문자들은 홀홀히 떨어지는 가벼움을 가진, 한데 뭉쳐 보이기도 하지만 본래 한 자 한 자 스스로 완결된 의미를 가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문자 산수화 이후 지난해 전시에서부터 보이는 그의 작품들에 익숙한 먹글씨 대신 점들이 등장한다. 동그란 점들은 서로 이어져 수수께끼 같은 형상들이나 글자를 이루고 있다. 자세히 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상투적 이미지들이 쉽게 눈에 띄기도 하고 안보이다가 ‘헤헤 놀랐지’ 하는 느낌으로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점은 선보다 외롭다. 폐곡선으로 야무지게 그려진 원들은 저마다 독립적인 완성도를 지닌다. 오히려 문자보다 존재감이 단단하다. 점과 점 사이는 일정하거나 의도적으로 살짝 떨어져 있다. 점과 점, 문자와 문자 사이의 ‘공간’들이 매력적인 긴장감을 형성한다. 피아노 음과 음 사이에 멜로디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작가가 재료로 사용하는 문자와 점들은 전시장의 벽이나 다른 공간에 그려지기도 한다. 예컨대 엉엉 우는 글씨들은 허름한 벽에 그려진다. 그래서 더욱 슬픈 느낌이다. 파리가 ‘애애애애애앵~’이라는 글씨 형태로 날아가다가 그만 탁 죽어버린 모습은 파리채와 함께 전시된다.

 

 

우리 그냥 빤짝 만나요

`우리 그냥 빤짝 만나요`라는 재미있는 제목의 작품에는 남녀의 성기 이미지가 언뜻 보인다. 별들도 보이고 하트도 있다.

산수화에 비해 살짝 난해해지는 작품이다. 언뜻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은 무얼 말하는 걸까? 작가는 대답 대신 “재밌는 거 보여줄게요”라고 말하며 주섬주섬 박스 하나를 열어 보인다. 거기엔 그의 아이디어 스케치가 들어 있다. 스케치는 마치 선생님이 숨겨 놓은 해답지처럼 수수께끼 같은 작품의 답안이 담겨 있다. 어떻게 글자가 그림으로 변하는지, 그림이 또 어떤 연상으로 글씨로 변하는지 그려져 있다. 예를 들면 처음엔 ‘제프월’이라는 독일 사진작가의 이름으로 시작된다.

“이 글씨가 로봇 팔로 변하다가 증발되더니 火(화)자가되고 작전명 발키리가 됐다가 강아지가 됐다가 독일이 됐다가 독일 국기가 돼요. 그러다가 개가 아프고. 왜 개가 아프겠어요. 킥킥. 그걸 이미지화시킨 작업이에요.”

이런 식으로 남녀의 성기는 하트 모양이 되고 다른 몇 가지 단계를 더 거쳐 `우리 그냥 빤짝 만나요`가 탄생했다.

그리고 보니 매사에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작품들은 유승호 작가 자신과 닮아있다. 산골소년의 서정성과 천진난만함, 느슨한 농담과 놀이 사이사이에는 논리적인 생각의 과정과 치밀한 계산이 똑같은 무게추로 양팔저울을 이루고 있다. 절제감각은 작품을 만들어 내는데 필수다. 숨막히고 집요한 작업과정과 대조되는 형광색 배경의 날나리티 나는 발랄함, 화장실 낙서처럼 보이는 가벼움과 솔직함. 이것은 보일 건 보이고 숨길 건 숨기는 능력을 바탕으로 한다. 가까이 다가가되 결코 질릴 정도로 달라붙진 않는 균형감각. 이 남자, 연애를 해도 잘하겠다 싶다. 허술한 듯 핫핫 웃고 있는 유연한 미소를 띤 그가 돌아서자 견고한 작가의 근력이 단정한 어깨에 딱 버티고 있었다.  

 

 

■ 작가 유승호는 누구?

1973년 충남 서천 비인면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한성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1998년 제5회 공산미술제 공모전에서 `천川천川히` (종이에 먹, 국립현대미술관 소장)로 우수상을 받으면서 처음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문자의 조합과 반복적 쓰기를 통한 작품으로 큰 주목을 받았으며 쓰기·그리기의 경계에 대해 질문과 함께 유머와 재미라는 언어의 속성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2003년 제22회 석남미술상 수상했으며 2007년 ‘echowords’(미즈마 아트갤러리, 도쿄), 2006년 ‘echowords’(서미앤투스,서울), 2005년 ‘echowords’(ONE AND J. GALLEYR, 서울), 2003년 ‘echowords’(석남미술상 수상전, 모란갤러리), 2000년 ‘시늉말’(서남미술전시관, 서울), 1999년 ‘히히히’(조성희 화랑, 서울) 등 총 6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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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미(아트 칼럼니스트·봄봄 대표 bomi1020@empal.com)자료제공 LUXMEN
발행일 2012.04.26기사입력 2011.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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