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작년 6월 법정관리를 받던 해상 선박운항 전문 업체인 팬오션(Pan Ocean)이 닭고기 전문 기업 하림에 인수됐다. 최종 인수대금은 무려 1조80억원. 왜 닭고기 회사는 관련도 없어 보이는 해운사를 비싼 가격에 인수했을까?
이것은 기업의 전형적인 문어발식 확장 전략일까? 이러한 기업 행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닭고기 공급의 가치사슬(공급 단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든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을 위해서는 원재료 획득부터 최종 상품의 유통과 판매로 끝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를 기업 전후방의 가치사슬이라 부른다. 이러한 가치사슬을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가는 기업 전략 결정의 핵심 사항이다.
닭고기를 시장에 공급하기 위해 우선 농가에 병아리나 종란을 공급하고 사육을 위탁한다. 위탁된 병아리가 상품성 있는 닭으로 성장하면 이를 매입해 도계 및 육가공 등의 과정을 거친다. 소비자의 눈에는 하림이 중소·중견기업 규모의 단순한 닭고기 회사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하림은 닭고기 공급의 30%를 점유한 이 분야 최대 규모 회사다.
또한 하림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닭고기 공급의 전후 과정, 즉 사료, 사육, 도계 및 제조, 육가공으로 이어지는 닭고기 생산의 거의 전 과정을 수직계열화한 회사이기도 하다. 여기에 옥수수 등 축산에 필요한 사료의 주 원료 곡물들을 미국과 브라질 등에서 수입해 축산 농장에 공급하는 국내 사료 유통계의 큰손이다. 사료 유통은 하림의 가장 큰 사업부문이다.
닭이나 돼지, 소도 곡물 사료를 먹여서 키우기 때문에 곡물은 축산업의 필수 원재료다. 하지만 사료는 전체 95%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서 운송비가 곡물 확보 비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높다. 곡물 값 자체의 변동이 클 때도 있지만 주로 운송비 변동이 원가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때로는 운송 업체마다 운임이 달라 원가 구조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은 연간 300만t의 곡물을 수입하는 하림에 곡물 운송 과정의 안정성을 도모해야 할 필요성을 높였고 팬오션 인수에 대한 동기로 작용했다. 특히 하림은 벌크선 사업이 주력인 팬오션을 인수한다면 운송비를 크게 낮출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렇다면 벌크선이란 무엇일까? 해상 운송은 크게 컨테이너선과 벌크선으로 구분한다. 컨테이너선은 화물을 담은 규격화된 컨테이너를 운송하는 화물선이다. 반면 벌크선은 곡물, 석탄 등 원자재를 포장하지 않은 채 실어 나르는 운송선을 말한다. 팬오션은 전체 매출의 약 80%를 벌크 부문에서 올리는 국내 벌크선 부문 1위 해운사다.
따라서 하림의 팬오션 인수는 국내 최대 사료 수입 회사와 최대 곡물 수송 벌크선사의 통합인 것이다. 인수계약 체결 발표 이후 하림과 팬오션 주가가 동반 상승했는데, 이는 두 기업의 사업 영역이 서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시장의 긍정적인 평가가 반영됐기 때문이다.
하림은 더 나아가 팬오션을 통해 곡물 트레이딩 사업에 직접 뛰어들었다. 이는 하림이 꿈꾸는 한국판 카길(Cargill)로 도약하기 위한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카길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세계적인 곡물 기업이다. 자체 인공위성을 이용해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주요 농장의 작황을 매일 점검하는 연매출 약 150조원의 세계 최대 곡물 비즈니스 업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전 세계의 밥상을 지배하는 기업으로도 유명하다.
하림은 팬오션 인수로 자산 규모 약 9조원, 재계 순위 30위권의 대기업으로까지 성장했고 형태적으로는 카길의 사업 모델과 유사한 모습을 갖추게 됐다. 한편으로는 1조원이 넘는 인수자금 지불은 그룹 전반의 재무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기업 신용도 측면에서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대우건설 인수 후 그룹 전체가 위험해진 금호 사례처럼 높은 인수금액은 자칫 '승자의 저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한진해운과 현대해상이 높은 용선료(고비용 장기운송 계약)로 인해 유동성 위기를 겪는 것과 달리 팬오션은 법정관리를 거치면서 불리했던 용선료 계약을 정리했고 기업 구조조정도 실시했다. 그 결과 최근 팬오션은 2000억원대 영업이익을 올리며 이러한 우려를 불식하고 있다.
팬오션을 품고 종합 곡물회사로의 새로운 비전을 향해 도전하는 하림을 더 이상 닭고기 회사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