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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사업의 금언 중 하나는 '부모 자식 간에도 절대로 동업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리 친한 사이더라도 돈 문제가 얽히면 사이가 틀어지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많은 사례에서 대기업 경영권을 두고 부모 혹은 형제간에 다툼이 법정 분쟁으로 비화되곤 한다.이런 통념을 무너뜨린 회사가 LG그룹이다.

 

LG그룹은 형제간, 사촌간, 그리고 사돈 간 신뢰를 지켜 75년간 성공적으로 대한민국의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했다. 2005년 그룹을 지탱하는 양대 축인 구씨 집안과 허씨 집안이 각각 LG그룹과 GS그룹으로 분리됐지만 아직도 두 그룹 간의 긴밀한 관계는 유지되고 있다.

 

바로 이런 전통을 세운 사람이 LG그룹의 구인회 창업주와 GS그룹 허만정 창업주다. 구인회 창업주의 "한번 사귄 사람과 헤어지지 말고, 헤어지더라도 적이 되지 말라"는 유훈은 바로 이런 LG그룹의 철학을 잘 나타내고 있다.

 

# 구씨와 허씨, 두 가문의 결혼이 경영 단초

 

구인회는 1907년 경남 진양군 지수명 승산마을에서 아버지 구재서 씨와 어머니 진양하 씨 사이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구연호는 조선왕조에서 언론과 비판 기능을 담당한 홍문관의 교리(교수)였고 자연스럽게 구인회도 할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우며 자랐다. 부모님의 결정에 따라 구인회는 일찌감치 13세 때 옆집 이웃 허만식의 장녀 허을수 씨와 결혼을 하게 된다. 양 가문 모두 승산마을에서 이름난 명문가였지만 한학을 전공한 구씨 가문과 달리 허씨는 개화 문물에 친숙한 집안이었다. 처남인 허선구는 구인회에게 신식 문물을 배울 것을 열심히 권유했다.

 

"매제, 세상이 변하고 있네. 신식 문물을 배워야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지 않겠는가?"

 

구인회는 허선구의 제안이 옳다 여겨 서울중앙고보 2년을 다닌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시 승산마을에서는 무라카미(村上)라는 일본인이 잡화류와 문구, 석유 등을 팔아 큰돈을 벌고 있었다.

 

"우리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일본인이 독점해 큰 부를 올린다니 안 될 말이다. 우리 몸에 닿는 물건은 우리 손으로 사고팔도록 하자."

 

구인회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1929년 지수협동조합을 세우고 싼값에 석유, 비누, 광목을 팔았다. 지수협동조합은 큰 인기를 끌었지만 반면 구씨 집안의 가세는 나날이 기울어 갔다. 결국 그는 본격적으로 사업을 하기로 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을 중시하던 집안 어른들은 반대했지만 구인회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 시작이 순탄치 않았던 '구인회 상점'

 

1931년 구인회는 자기 이름을 따서 동생들과 함께 경남 진주에서 포목상 '구인회 상점'을 열었지만 장마로 큰비가 내려 가게의 물건이 모조리 썩어 버리고 말았다.

 

"장마로 큰비가 내렸으니 오히려 올해 농사는 잘될 것이다. 연말에는 주머니가 두둑해진 농부들이 오히려 더 많이 가게에 들를 것이다!"

 

위기에서 그는 집안의 논밭을 팔아 오히려 더 많은 포목을 사들였다. 예상은 맞아떨어져 그해 말에는 장사에 크게 성공했다. 구인회 상점은 고객의 요청에 따라 고유한 무늬와 이름을 새겨주기도 하는 '별색 맞춤' 옷감을 제공했는데 이것이 고객들에게 큰 인기를 끈 것이다. 사돈 집안인 허씨와 함께 경영하는 조선물산도 날로 커져갔다. 구인회는 장사로 벌어들인 돈 중 일부를 몰래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와 함께 보내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나라를 위해 조금만 더 고생해 주십시오. 우리는 이곳에서 민족의 기틀을 닦겠습니다."

 


1961년 국산 자동전화기(모델명 GS-1)로 시험 통화하고 있는 구인회 LG 창업주(가운데). [사진 제공 = LG]

 

 

# LG그룹의 기반, 락희그룹을 만들다

 

1945년 광복 후 구인회는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화학공장 건물 일부를 사들여 '락희화학공업사'를 세웠다. 락희(樂喜)는 한자로 기쁘고 즐겁다는 의미도 있지만 행운을 상징하는 영어단어 러키(lucky)의 발음을 따기도 했다. 처음에 락희는 국산 화장품을 만들어 큰 인기를 끌었다. 사업이 번창해 나가는 도중에도 장인 허만식의 6촌인 허만정이 자기 아들인 허준구를 데리고 찾아왔다.

 

"이보게 인회, 자네가 장사 수완이 뛰어나지 않은가. 우리 셋째에게도 그 재주를 좀 알려주게."

 

흔쾌히 승낙한 구인회 밑에서 허준구는 경영수업을 받게 됐고, 그동안에는 사돈으로 느슨하게 얽혀 있던 구씨와 허씨 가문은 이때부터 '락희그룹의 동업자'로 결속을 다지게 된다. 두 집안의 사업지분 비율도 65(구)대35(허)로 50년간 유지된다.

 

6·25를 겪으며 한때 사업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연구 끝에 락희그룹은 '럭키치약'을 만들어 큰 인기를 끌었다. 치아 미백과 세척에만 특화된 외국 치약과 달리 개운한 뒷맛을 가진 럭키치약은 한국인들의 입맛에 꼭 맞았다. 이 밖에도 플라스틱, 화장품 등을 생산하면서 락희그룹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화학그룹으로 성장해 나가게 된다.

 

# 대한민국 최초의 전자회사, 금성사

 

구인회는 사업이 번창했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무언가 아쉬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주력 산품이 플라스틱, 화장품, 치약 등 지나치게 소비재에 집중됐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무언가 첨단 제품을 만들어야 할 때다. 그래! 전자 제품을 만들어 보자."

 

1959년에 그는 주식회사 금성사를 설립해 국내 최초로 라디오, TV, 선풍기 등을 수출했다. 당시 빠른 속도로 경제가 성장하고 있었기에 전자제품들도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며 팔려나갔다. 이렇게 번 돈으로 그는 연암문화재단을 설립해 장학사업에도 힘을 기울인다. 이후 '락희금성'으로 이름이 바뀐 그룹 경영권을 1969년 아들 구자경에게 물려준 후 별세하고 만다.

 

구 회장의 삶에서 일관적으로 구현된 것은 '가족'과 '인화'다. 눈앞의 작은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지인과의 의리를 중시하는 그의 철학은 이후 '국민기업' LG의 뿌리를 놓았다.

 

유태양 기자자료제공 매일경제
발행일 2016.05.26기사입력 2016.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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