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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모습을 감춘다. 사위는 어둑한 저물녘이다. 너른 벌판이 눈앞에 펼쳐지고, 어디에선가 정겨운 새소리가 들려온다. 원경에서 바라본 마을 외곽의 풍광은 더할 나위 없이 고요한데, 왜일까. 평화가 감도는 이 분위기가 이내 깨질 것만 같은 불안감은. 한 차례 장면이 바뀐다. 케이트(샬럿 램플링)는 개를 끌고 산책을 나가 이제 막 돌아오는 모습이다. 늘 마주치던 우편배달부는 남편 이름으로 된 편지를 건네고, 그것을 받아든 그녀는 천천히 실내에 들어선다. 제프(톰 커트니)는 여느 때처럼 식탁에서 신문을 읽고 있다. 아내는 그런 남편 앞에 봉투를 내려놓는다.

 

영국 영화 '45년 후'는 이처럼 노부부의 단조로운 일상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그 단조로움이 한 통의 편지로 인해 긴장과 갈등 국면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그린다. 남편의 50여 년 전 첫사랑 카타야가 빙하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그 분기점이다. 1962년 제프는 스물아홉, 카타야는 스물일곱. 둘은 스위스 산자락을 여행하고 있었고, 예기치 못한 사고를 겪었으며, 실종된 카타야는 지금껏 발견되지 않았다.

 

빙하 안에서 그런 옛 연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구절에서 제프는 굳어버린다. 그리고 첫사랑이 과거 모습 그대로일 것이라는, 거의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한다. "죽은 항공병들도 아이슬란드에서 완벽하게 보존돼 있었어. 다큐멘터리에서 봤어. 워낙 빨리 얼어서 죽었을 때하고 똑같아." 이어지는 말이 아내의 가슴을 쑤신다. "1962년 모습 그대로라니, 난 지금 이 모양인데…."

 

45년 만에 아내는 남편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긴 세월을 함께하며 남편의 모든 면면을 알고 있다고 여겼던 게 착각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날 이후 남편은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다락방에서 첫사랑의 사진을 홀로 뒤적댄다. 잠자리에 누웠을 땐 아내가 몰랐던 옛 연인에 대한 기억을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그것을 듣는 아내의 마음은 적잖이 심란하다.

 

영화가 집중하는 건 그런 노부부의 내면 정서다. 그 미세한 변화 양태를 변주하는 샬럿 램플링과 톰 커트니의 연기는 정말이지 발군이다. 마치 훌륭한 배우만이 다다를 수 있는 어느 위대한 정점을 보는 듯한데, 몇 번을 다시 봐도 경탄을 금치 못한다. 실제로 결혼 45주년을 앞둔 사람처럼 노부부의 자연스러운 일상과 복잡다단한 내면을 완벽에 가깝게 표현해낸다. 두 배우가 이 영화로 제6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남녀주연상을 거머쥐었다는 사실은 일견 지당해 보인다.

 

결혼 45주년을 며칠 앞두고 촉발된 부부 관계의 미세한 변화. 옛 모습 그대로 빙하 속에 갇혀 있을지도 모를 옛 연인을 추억하며, 그 당시 생기 넘치던, 삶이 의지로 충만하던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기 시작한 남편. 그런 남편의 45년 만의 달라진 모습에 당혹감을 느끼며 극심한 내적 혼란을 겪게 된 아내. 영화는 제프가 첫사랑의 시신을 확인하러 가지 않고, 결혼기념일 파티의 화목한 분위기로 마무리되지만, 한 가지 분명한 메시지를 던진다.

 

수십 년 세월을 관통하여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임을 말이다. 그러면서 결국 사랑이란 시인 릴케의 말마따나 "두 개의 고독이 서로를 보호해 주고, 서로의 경계를 그어놓고, 서로에게 인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김시균 기자자료제공 매일경제
발행일 2016.05.26기사입력 2016.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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