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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역사에서 유일한 혁명의 주인공은 왕안석이었다.

그는 문치주의로 허약해진 국가의 개조, 개혁 정책을 실시했다.

황제를 비롯, 관료, 백성의 전폭적인 지지로 시작된 왕안석의 개혁은 그러나 불과 5년 만에 실패로 귀결되었다.

기득권층의 반발, 황제의 변심 등 실패의 여러 원인 중에서 주목할 것은 바로 왕안석의 고집불통에 가까운 원칙론과 다른 사람의 의견과 존재를 무시한 그의 처세이다.

그는 ‘자신은 변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변할 것을 요구했다. 이것이 왕안석의 혁명이 실패한 근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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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가난에 지방근무를 자원한 인재

 

960년 중원을 통일하고 송나라를 건국한 송 태조 조광윤.

그는 무력으로 권력을 쟁취한 자신의 사례가 역사에서 반복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태조는 건국공신 중에서도 무신들을 철저히 탄압했다.

그야말로 무신의 씨를 말리는 무자비한 숙청으로 중국 역사에서 이른바 ‘토사구팽’의 최대 실천가가 되었다.

그 뒤 송나라는 칼 대신 붓이 권력이 되었다.

 

건국 이후 100여 년이 지난 11세기 초부터 문신과 예학의 나라 송나라의 약점과 폐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군사의 수는 많고 군사비는 국가 재정 지출의 최대 항목을 차지했지만 실제적인 무력은 보잘것 없는 나약한 군대, 나라가 되었다.

북쪽의 거란은 송나라의 최대 골칫거리였다. 그들은 국경을 수시로 넘어와 송나라를 괴롭혔다.

그리고 1038년, 송나라 서쪽의 서하는 거란보다 더 노골적이었다. 이들의 동진정책으로 송나라의 서쪽 국경지대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송나라는 거란에게는 한 수 접고 선린정책을 썼지만 서하에게만은 머리를 굽힐 수 없었다. 중원 패자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이었다.

 

송나라는 서하와 무려 7년간의 기나긴 전쟁을 치렀다.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이 무렵 거란이 송나라와 서하의 평화협정 중재에 나섰다.

서하는 송나라에 신하의 예를 취하고, 송나라는 매년 비단 13만 필, 은 5만 냥, 차 2만 근을 서하에게 하사품으로 주기로 했다.

송나라는 명분을, 서하는 실리를 얻은 것이다. 물론 중재 역할을 한 거란에게도 송나라는 막대한 양의 비단과 은을 주기로 했다.

 

송나라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나라를 운영할 수 있을까.

1021년, 왕안석은 장시성 무주 임천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왕익은 하급관리였다.

왕안석은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다녔다. 집은 항상 가난했지만 왕안석의 몸에는 학자 집안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5세 때 시경과 논어를 익혔고, 12세 때는 독학으로 고전을 공부했다. 학습 능력은 ‘동급 최강’이었다.

하지만 왕안석이 17세 때인 1038년, 40대의 아버지는 과로와 가족 부양의 중압감에 고민하다 병을 얻어 죽었다.

왕안석은 졸지에 ‘소년 가장’이 되었다. 서하가 송나라를 침공한 무렵이다.

 

1042년, 21세의 왕안석은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했다.

그는 주로 지방 관청에서 근무했지만 성실과 능력 그리고 뛰어난 학식으로 ‘꽤 똑똑한 젊은 관리’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25세 때 수도인 개봉에서 근무하기도 했지만 왕안석은 지방 관청을 자원했다. 그것은 순전히 ‘봉급’ 때문이었다.

중앙관직은 폼 나고 힘 있는 자리였지만 봉급은 지방 관직이 수당이 붙어 훨씬 많았다. 가족의 생계를 염두에 둔 자원이었다.

 

왕안석은 26세 때 은현 현령시절 관리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낙후되고 가난한 시골 은현의 수리시설을 개선했고 관청의 곡식을 백성에게 싼 이자로 빌려주는 정책을 펼쳐 현민의 절대 빈곤을 해결했다.

은현에서의 왕안석의 실험은 당시 송나라 정관계에 신선한 충격파를 던졌다.

왕안석은 일약 중앙정계가 주목하는 스타가 되었다.

젊은 인재 왕안석을 중앙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당시 재상인 문언종이 시험 없이 특채로 중앙관직을 제안했지만 왕안석은 이를 사양했다.

대신 지방 관직 경험을 바탕으로 정책 제안서를 올렸다. 이것이 바로 <만언서 萬言書>이다.

왕안석은 <만언서>에서 관리의 부정부패, 대지주의 횡포, 기득권층의 무자비한 이권 개입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바른 정치’를 강조했지만 이 제안서는 휴지통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왕안석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지방 관청에서 자신의 개혁 정책을 다듬는데 시간을 할애했다.

이런 준비 기간이 있어 훗날 왕안석이 권력을 잡고 시행한 개혁 정치인 <신법 新法>이 태동할 수 있었다.

게다가 왕안석의 지방 근무는 인종, 영종 시기의 치열한 권력다툼에서 한 발 비켜 설 수 있는, 즉 권력투쟁의 회오리바람을 피할 수 있는 일종의 기회였다.

 

▶송나라 왕조의 유일한 개혁을 지휘하다

 

1067년, 5대 황제 영종이 죽고 새로운 황제가 등극했다. 그는 20세의 젊고 열정적인 신종이다.

신종은 영민했다. 그는 서하와의 오랜 전쟁으로 국가 재정이 파탄 나고 백성들이 절대 빈곤에 허덕여 도적이 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또한 그는 서하, 거란과의 굴욕적인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강한 국가를 만들려는 야심을 감추지 않았다.

신종은 대대적인 국가 개조를 계획했다. 하지만 관료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100년 동안 지속된 문치주의의 나약함과 안락함에 젖어 있던 그들에게 개혁, 열정, 개조 등의 단어는 ‘자신들의 기득권 내려놓음’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신이었던 사마광, 부필, 한유 등은 팔짱을 낀 채 신종에게 “폐하, 향후 20년간은 군사력 증대 같은 의견은 피력 안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폐하, 천하의 일은 급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등의 말을 하며 신종의 개혁에 협조하지 않았다.

 

‘사람 없음’을 한탄하던 신종은 문득 왕안석을 떠올렸다.

신종은 왕안석과 만난 일은 없었다. 하지만 당시 정관계에서 명망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왕안석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약 25년 여의 지방관 근무를 통해 왕안석은 ‘기득권의 대안세력’이 되어 있었다.

관리는 물론 사대부들도 왕안석을 ‘학식과 인품을 갖추고 있지만 관직에 욕심 없는 인물’로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 ‘만약 왕안석이 몸을 일으켜 정치 전면에 나서면 천하는 태평성대를 이룰 것이다’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또한 재상이자 학자인 사마광 역시 왕안석의 업무 능력에 후한 평가를 내렸다.

신종이 태자 시절 재상 한유의 학문과 정론에 대해 칭찬한 적이 있다. 이때 한유가 “태자마마, 이것은 저의 생각이 아닌 바로 왕안석의 견해입니다”라고 밝혀 신종은 이때부터 왕안석의 존재를 깊게 인식하고 있었다.

 

신종은 왕안석을 불렀다. 왕안석은 1068년 한림학사로 중앙 정계에 첫 발을 내딛었다.

한림학사는 황제의 명령서를 기안하고 또한 지근거리에서 황제에게 모든 정책 자문을 하며 재상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직이었다. 신종은 드디어 왕안석과 대면했다.

 

“지금 국가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무엇인가?”

 

“폐하, 국가경영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정책을 간결하게 정리해 실시해야 합니다.”

 

“태조께서 건국한 후 100여 년 동안 우리 송나라가 태평을 누린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늘이 도운 결과입니다. 비록 거란과 서하가 득세해 전란이 일어났지만 오랑캐가 크게 나라를 이루지 못한 것도 이유이고, 또 가뭄과 홍수 같은 큰 자연재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국가 재정이 흔들리고 그로 인해 나라와 백성이 모두 가난해졌습니다. 이를 바로잡는 구체적인 정책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신종은 결심했다. 한림학사 왕안석을 참지정사 즉 부재상에 임명하고 개혁을 진두지휘할 권한을 부여했다.

왕안석은 군사 업무를 담당할 군기감과 개혁의 총지휘소인 제치삼사조례사를 설치했다. 그리고 전면적인 국가 개조에 들어갔다.

그는 균수법을 제정했다. 이는 중앙정부가 농민들의 물자를 사들이고 농민들은 생산물 중에서 가장 생산량이 많은 것으로 국가 공물을 대체하는 법이었다.

또한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기 위해 민병제인 보갑제도 실시했다. 그리고 균등한 세금 징수를 위해 매년 토지를 측량해 과세를 했다.

가장 핵심은 정부에서 기금을 만들어 농민이나 백성들이 고리대금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 청묘법이었다.

이를 통해 정부는 안정적인 재정을 확보했고 백성들은 싼 이자로 급한 돈을 빌려 쓸 수 있었다.

자연히 화폐 경제가 활력을 띄면서 국가의 세금 수입도 증대했다.

 

왕안석의 이러한 개혁은 그가 만든 조직과 새로운 인재들을 관리로 등용해 탄력 있게 진행되었다.

왕안석은 국가와 백성 모두에게 이익과 혜택이 돌아가는 정책을 우선적으로 실행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국가는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자고 있던 ‘학자의 나라’에 서서히 힘이 붙은 것이다.

왕안석은 한림원을 재편해 유학에 치우친 학문의 다양성을 추구했다. 또한 기존 경전을 암송하는 능력만이 우선시되던 과거제도를 개혁했고 관리들의 인사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성과주의를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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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을 앞서 간 시대의 불운아

 

왕안석의 개혁이 진행될수록 반대와 저항도 거세게 일어났다.

사마광을 중심으로 하는 관료세력과 대지주, 황족 등 기존 보수기득권 세력이 모두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왕안석을 중심으로 한 개혁 주류세력인 <신법당 新法黨>과 대치되는 <구법당 舊法黨>을 형성해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구법당은 관료, 대지주, 화북 출신 사대부, 황제 주변의 궁인들을 모조리 한편으로 흡수했다.

왕안석은 서서히 벽에 부딪치기 시작했고 이때 개혁안의 부작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백성들의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개혁안은 현장에서 변질되어 오히려 백성들이 세금을 더 내게 되는 일도 벌어진 것이다.

백성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송나라는 ‘개혁 피로증후군’에 빠져 버렸다.

 

신종의 고민은 깊어졌다.

‘잘 살아보겠다’ ‘강한 국가를 만들겠다’는 의욕으로 출발한 개혁의 목표가 멀어지자 신종은 현실정치와 타협하기 시작했다.

1074년, 화북 지역에서 시작된 극심한 가뭄이 중국 전역을 강타했다.

구법당은 이를 기회로 삼았다. “왕안석의 신법이 이치에 맞지 않아 하늘이 노한 것이다”라는 논리로 왕안석의 탄핵을 주장했다.

고뇌의 시간을 보내던 신종은 그림 한 점을 보게 된다. 바로 ‘유민도 遊民圖’로 가난에 지친 백성들이 고향을 떠나 세상을 떠도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신종은 실망했다. “백성의 삶이 이렇게 척박한데 신법이 무슨 소용인가.” 왕안석을 비롯한 신법당 40여 명은 탄핵당하고 모두 지방으로 좌천되거나 관직에서 추방되었다.

그리고 왕안석의 자리는 구법당의 중심 사마광이 차지하게 된다. 5년간 국가 개혁의 최전선을 지휘한 왕안석의 의지가 꺾이는 순간이다.

 

1년 뒤, 왕안석은 지방에서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지만 이미 민심과 황제의 신임을 동시에 잃어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다.

그해 왕안석은 아들 왕방을 잃었다. 실의에 빠진 왕안석은 1076년 은둔했다. 그리고 1085년 개혁 군주 신종이 죽었다.

이제 단 하나의 가능성조차 사라져버린 왕안석은 이듬해인 1086년 죽고 만다.

이때가 그의 나이 66세로 공교롭게도 평생을 왕안석과 정치적 대립각을 세웠던 사마광도 같은 해 세상을 떠났다.

 

왕안석의 죽음은 쓸쓸했다. 그의 빈소에는 아무도 찾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한때 권력의 최정점에 있었고 수십 년 관직 생활을 했지만 적을 너무 많이 만든 것이다.

왕안석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남송, 명나라 때까지도 가혹했다.

하지만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19세기에 이르러 그의 실용주의 사상과 백성의 기본권을 강화한 개혁의 방향에 긍정적이면서도 올바른 평가가 내려졌다. 그는 ‘300년을 앞서간 시대의 불운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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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패의 처세학 1. |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

 

왕안석의 개혁은 시대정신의 산물이었다. 외세의 침략, 쇠약해진 국력, 재정 파탄, 백성들을 괴롭힌 고질적 가난, 극심해지는 빈부 격차 등의 종합적인 문제에 직면한 송나라는 이를 단번에 만회할 수 있는 정책과 사람이 필요했다.

물론 그 필요성의 공감대는 황제부터 관료, 백성들에게까지 고루 퍼져 있었다.

이때 지방 관료로서 작은 개혁의 성공을 연이어 이뤄낸 왕안석은 그 개혁의 주인공으로 부각되었고 결국 그는 송나라 개혁호의 선장이 되었다.

하지만 5년간 지속된 개혁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훗날 송나라가 금나라에 북쪽 땅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쫓겨 가 ‘남송시대’를 열었을 때 당시 남송의 지배세력은 이른바 ‘북송 패망론’의 원인을 ‘왕안석의 무리한 개혁정치’라고 규정했다.

이런 주장은 주로 주희 등의 성리학자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들은 개혁 정치의 후유증과 유학을 배제한 법가에 기초한 정책을 왕안석이 편 것을 공격했다.

 

물론 실패의 원인은 100가지도 넘을 것이다. 하지만 학자들은 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이유를 왕안석 개인의 성품에서도 찾았다.

그것은 왕안석의 신념을 넘어선 자기 아집이다. 왕안석은 개혁 정치를 위해 관료들을 대거 교체했다.

기존 관리들은 부패와 무능으로 모조리 내쫓고 이재에 밝은 강남 출신 신진 세력을 자신의 개혁 전위대로 삼은 것이다.

당연히 자리를 잃거나 권한을 상실한 기존 관리들은 개혁에 비협조적이었다.

고위직은 방관했고, 하급관리들은 업무의 실행을 늦추거나 정책을 현장에서 변질시켜 개혁의 방향과 목적을 상실케 했다.

 

왕안석은 다른 사람의 의견과 생각을 무시했다. 아니 애초부터 그들의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사마광, 구양수, 소식 등 당대의 지식인이자 재상들은 처음에는 왕안석의 정책을 지지했다.

방법론적인 차이는 있었지만 신종과 왕안석의 개혁 취지에는 동의한 것이다. 하지만 왕안석은 이들의 존재를 무시했다.

이들의 문제 제기나, 지적에 철저하게 무대응 하거나 “무식한 소리 하지 마라”, “공부를 더해 와라” 등의 거친 언사로 인격적 모욕감을 주기도 했다.

<자치통감>을 쓴 당대 최고의 학자 사마광, 당송팔대가로 학문과 문장에서 자부심 가득한 구양수나 소식에게 ‘무식하다’는 공격은 정책의 방향을 떠나 최소한의 인간적 신뢰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행동이었다.

 

상대를 인정하는 포용력, 상대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배려, 현실 정치에서 필요한 타협과 절충에서 왕안석은 실패한 것이다.

그로 인해 왕안석의 주장과 행동은 상대에게 불필요한 오해와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반대파를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역사가들은 ‘자기 사람만 고집하며 기존 조정 관료와 대립각을 세우고 남의 의견을 인정하지 않은’ 왕안석에게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날카로운 비판을 같이 했다.

즉 ‘국가와 사회를 개혁하려면 자신의 인품과 성격의 결점을 먼저 개혁해야 한다.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고집불통으로는 국가와 백성을 이끌 수 없다’고 지적한 것이다.

 

왕안석의 고집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하루는 사마광과 왕안석이 연회에 참석했다.

고관대작들이 속속 들어오자 하인들이 꽃을 손님의 가슴에 달아주었다. 다들 꽃을 단 채 입장해 앉아있는데 왕안석은 꽃을 거부하고 옆에 던져버렸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포증이 왕안석에게 술 한 잔을 권했다. 하지만 왕안석은 거부했다.

모든 대신들이 포증과 왕안석을 지켜보고 있었다. 포증의 거듭되는 청에도 왕안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술을 끝내 거부했다.

결국 포증도 포기하고 말았다.

주인의 체면을 봐서 한 잔 정도는 마시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는 융통성이 왕안석에게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또 있다. 평소 얼굴이 검은 왕안석에게 한 사람이 조언을 했다.

 

“대감의 얼굴에 기미가 많아 보입니다. 고수풀을 우려낸 물로 세수를 하면 기미가 없어집니다.”

 

“이것은 기미가 아니오. 내 얼굴이 본래 검은 색입니다.”

 

“고수풀은 기미뿐만 아니라 검은 얼굴에도 효과가 있습니다. 아니면 쥐엄나무를 우려내서 세수를 해도 효과가 좋습니다.”

 

“원래 타고난 것이 검은 얼굴인데 그깟 풀로 어떻게 되겠는가. 다 부질없는 짓이네.”

 

한번은 심부름꾼이 왕안석에게 편지를 갖고 왔다.

심부름꾼은 왕안석의 집에서 노비인 듯 사람을 발견하고 그에게 “이 편지를 왕안석에게 전해주시요”라고 건네 주었다.

그러자 그 노비가 봉투를 열고 편지를 꺼냈다. 깜짝 놀란 심부름꾼은 “아니, 노비 주제에 그 편지를 보는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큰소리가 나자 주위에 사람들이 몰렸고 그 중 한 명이 심부름꾼에게 “지금 편지를 들고 있는 저 사람이 바로 왕안석이네”라고 넌지시 일러주자 심부름꾼은 “하도 행색이 초라해 노비인줄 알았다”고 할 정도였다.

주위의 시선과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그의 면모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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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패의 처세학 2. | ‘동료는 물론 1인자와도 불통’

 

왕안석은 자신의 신념과 원칙을 고수했다. 물론 이 같은 처신은 국가 개혁의 선봉장이 갖추야 할 덕목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과 피해는 생각보다 컸다. 사람은 안 움직이고 조직은 가동되지 않았다.

오로지 왕안석 혼자 고군분투하는 꼴이었다. 한번은 신종을 비롯해 신법당, 구법당의 모든 관료가 회의를 열었다.

 

안건은 국가 행사에서 조정 관리들에게 매년 특별 하사품을 주었는데 이번에는 국가 재정이 어렵고 또한 홍수까지 겹쳐 주지 말자는 논의였다.

 신법당과 구법당의 모든 대신들이 그 안건에 찬성했다.

하지만 왕안석만이 반대하며 관례적으로 지급하자고 주장했다.

왕안석은 “하사품 몇 개 아낀다고 국가 재정이 단번에 풍족해지지 않는다. 조정 관료들을 예우하는 전통과 원칙이 손상되는 것이 돈을 쓰는 것보다 더 문제이다. 그러니 원칙대로 지급하자”고 원칙론을 앞세웠다.

사마광이 나섰다. “그 말도 일리가 있지만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조정의 관료들이 절약하는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백성들이 어찌 조정의 명을 따르겠소”라고 왕안석을 설득했다.

왕안석은 더욱 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관료들의 자세는 국가와 백성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요. 하지만 지금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 도적이 되는 일이 더 빈번합니다. 하사품 몇 푼을 아끼는 그런 행동보다 본질적인 개혁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신종은 결국 왕안석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조정 관료들은 원칙론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모든 조정 관료를 도둑으로 여기는 왕안석의 시선에 불편함과 분노를 느꼈다.

이처럼 왕안석의 소통의 부재는 비단 조정 관료들과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왕안석은 개혁의 최대 지지자인 황제 신종과도 ‘그 원칙론’으로 인해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신종은 개혁을 주관할 기구인 조례사를 신설하고 왕안석에게 이 조례사의 운영 등 모든 권한을 부여했다.

조례사는 국방, 재정, 토지개혁 등 모든 개혁정책을 주도했다. 하지만 조례사는 임시 기구였다.

1070년 신종은 조례사를 해체할 계획을 세웠다. 개혁 초기 강력한 정책 드라이브를 걸기 위한 조례사의 역할은 끝났고 이제 각 부서에서 개혁 정책을 집행하면 된다는 것이 신종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왕안석은 신종의 지시에 반대했다. 개혁정책의 지속을 위해, 또한 각종 제도 개선의 핵으로서 조례사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신종은 한강을 조례사 수장으로 임명하고 추밀원에서 조례사를 지휘하게 했다. 이는 조례사의 권력 약화를 의미했다.

하지만 왕안석은 신종의 이 같은 강력한 지시에도 응하지 않았다. 구법당에서는 왕안석의 행동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신종 역시 조례사 해체 건에서는 구법당의 의견에 손을 들어주었다.

이는 조례사라는 비상기구를 통해 왕안석이 황제의 권한까지 침범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왕안석의 실수이다.

왕안석은 개혁의 시작과 집행, 마무리를 위해 조례사의 존치를 주장했고 그의 의견은 분명 타당성이 있었지만 황제의 의중에 벗어나는 행동을 했다.

황제는, 1인자는 태생적으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동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것은 1인자의 존재 부정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유사한 도전을 미리 차단하려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왕안석의 불통은 이미 많은 적을 만들었다.

여기에 그의 개혁에 가장 강력한 후원자인 황제와의 불통은 그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원인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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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서 온 남자’ 같은 직장인이라면?

 

직장생활, 아니 이 세상을 살아낸다는 것이 어쩌면 자력갱생일 수 있다.

자신의 힘과 노력 그리고 약간의 운만 더해진다면 직장생활쯤은 그리 큰 걱정이 아닐 것이다.

직장은 사원 개개인이 모여 거대한 조직을 이루듯, 각각의 업무가 쌓이고, 합쳐지고, 발전하면서 회사의 목적을 향해 한 걸음씩 나가는 것이다.

직장인에게 상사와의 소통, 동료와의 융합, 후배와의 유대는 백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물론 이 중에서 어떤 것에 방점을 두는 가는 개인적인 성향, 조직에서의 목표에 따라 다르겠지만 세 부분 다 평균점 이상의 평가를 받는 것이 원활한 조직생활의 지름길이 되겠다.

 

회사는 직원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있다. 학벌, 인맥, 실력, 리더십, 후배들의 평판, 조직에 대한 충성심 등이다.

이 중에서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학벌과 충성심 정도는 이미 갖춰진 스펙이며 동시에 증명해 보일 기회가 있는 항목일 것이다.

또한 모자라는 학벌은 대학원이나 MBA를 주경야독으로 독파해 보충할 수 있다.

충성심은 조직과 상사에게 보여주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무너뜨리는 실수를 직장인들은 종종 범한다.

특히 별도의 TF팀 구성원 가운데 타 부서원과의 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몇 년씩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한 부서원들은 장점이든, 단점이든 ‘한 수 접어주는 것’이 있지만 같은 회사 동료라도 타 부서원의 입장은 다르다.

부서에 따라 목적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부서의 이익을 위해 배려와 타협을 상실한 채 오로지 자신의 목소리만을 크게 내세우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것은 용기가 아닌 만용이고, 열정이 아닌 이기주의라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원칙은 지키는 순간 아름답지만 선의를 위해, 대의를 위해 양보할 때 더욱 빛을 발한다.

몇 시간을 이야기해도 듣는 순간은 고개를 끄덕이지만 결론에서 한 걸음도 진전되지 못하고 자신의 원칙과 신념만을 내세우는 직장인을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것을 지켜냈다’라고 자부심을 갖지만 그 이면을 파고드는 ‘다른 사람, 주장,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불통주의자’라는 날카로운 평가를 피할 수 없다.

분명 같은 한국말을 쓰고, 동시대를 같이 살며, 같은 회사에 근무하지만 마치 ‘화성에서 온 남자’ 같은 직장인에게 회사는 차츰 신호를 보내게 된다.

처음에는 작은 부분에서 소외시키고 이윽고 혼자서 하루 종일 노트북 한 대와 씨름하는 업무를 배당한다.

결국 직장에서는 그의 인사카드에 ‘조직원과의 융합에서 심각한 문제를 노출한 부적응자’라는 빨간 딱지를 붙이는 것이다.

 

실력보다 앞서야 하는 것이 사람 관리이다. 물론 실력만 뛰어난 독불장군도 살아가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단 한 번의 작은 실수도 범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실수를 하거나 사규를 위반할 경우, 그를 변호하거나 동정할 수 있는 여론은 전혀 생성되지 않는다.

조직도 사람이 움직인다. 비록 실수를 했어도 그를 둘러싼 모든 조직원들이 ‘그의 실수를 용서해야 한다’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된다면 조직도 그를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세상에 진정한 자유인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유인을 꿈꾸고, 부러워하는 것이다. 회사원에게 진정한 자유는 조직을 떠나는 순간이 아닌, 주변인으로부터 ‘필요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기대감의 속박’, 어쩌면 그것이 직장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일 것이다.

개인으로서의 삶은 혼자 사는 것이지만 조직원으로서의 삶은 타인과의 부딪침의 연속인 것이다.

 

 

박기종(커리어코칭칼럼니스트) / 사진 pixabay.com자료제공 Citylife
발행일 2016.06.16기사입력 201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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