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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동 쪽방촌©매일경제 이승환 기자, ©낙원악기상가

 

“1950년대의 폐허에서는 명동의 술과 종삼의 여자만이 50년대 작가의 진정한 고향이었다.” (-고은 <1950년대>)

 

문인들은 기생을 사랑했고, ‘말을 알아듣는 꽃’ ‘해어화(解語花)’는 시인들에게 빠져들었다.

종로에는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를 쓴 백석이 기생 자야와 나누던 밀애와 시인 이상의 기생 금홍이와의 떠들썩한 사랑이 서려 있다.

파고다극장엔 시집 출간을 앞두고 요절한 기형도의 마지막 순간이, 익선동에는 <임꺽정>의 홍명희의 의기가, 돈의동에는 풍과 흥취가 넘쳐흐르던 요정 ‘명월’이 있었다.

 

종로를 들었다 놨다 한 기녀들, 그리고 그녀들을 사랑한 문인들.

이제 100년 전의 요정은 사라지고, 예인들의 노래는 오래된 축음기 속에 남았다. 백석과 이상, 기형도가 사랑한 종로 해어화, 그 풍류의 길을 따라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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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그대로 덮혀 있는 종로의 도시한옥

 

선술집, 비둘기와 노인으로 점철된 종로에는 최근 ‘핫한 동네’로 미디어에 소개되고 있는 익선동을 중심으로 낙원동과 돈의동 등 오래된 동네들이 모여있다.

조선의 가장 화려한 시절부터 모두의 삶이 퍽퍽했던 일제강점기를 몸 한가운데로 뚫고 지나온 종로는 시대의 상처와 아픔을 고스란히 견뎌냈다.

 

종로3가역에서 낙원상가 방향으로 걷다 보면 나오는 익선동은 1920년대 지어진 ‘도시형 한옥’ 100여 채가 비좁게 어깨를 맞대고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부동산개발업자’ 정세권이 주택개발사 ‘건양사’를 지어 분양하고 그 돈으로 독립열사를 후원했던 곳이다.

말끔하게 닦아놓은 듯한 북촌 부지를 대부분 양반이나 부자들에게 분양했다면 비용이 덜 들어가는 규격화된 개량한옥이 많은 익선동은 ‘중산층’이 타깃이었다.

1920년대에 조성된 이 도시형 한옥 마을에는 모진 세월을 정면으로 마주한 시대의 예인들과 돈벌이를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억척스러운 사람들이 대거 모여 살았다.

 

재개발 취소 사태를 거쳐 지난해 3월 ‘서울형 도시재생 선도지역’으로 지정된 익선동에는 작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임꺽정>의 홍명희를 시작으로, 조선 최초로 레코드를 취입했던 판소리 명창 ‘동편제’ 송만갑(대부분의 기생들이 그의 창법을 따랐다), 내시이자 관광요정 ‘오진암’의 주인이었던 서예가 이병직 등이 살았다.

관광요정 ‘대하’, ‘명월’(현재의 비즈웰오피스텔), ‘오진암’(현재의 이비스 앰배서더 호텔)이 있었던 익선동 골목길에는 한복집, 점집, 악기점 세 가지가 많다.

3대 요정(삼청각, 오진암, 대원각)이 주변에 있어 지방에서 올라온 기생들이 사글세로 많이 살았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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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암은 1970~80년대 요정정치의 산실로 대한민국 3대 요정 중 한 곳이었다.

2012년 종로구 부암동으로 이전하면서 2013년부터 이비스 앰배서더 인사동 호텔이 영업을 개시했다.

1910년에 상량한 1953년 들어선 한국 최초의 한옥상업시설이다.


▶100년 전의 풍류… 익선동의 관광요정

 

익선동에 위치한 ‘국내 1호 관광요정’ 오진암은 제3공화국의 실력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단골집이었다.

화류계에서 가장 오래 유지됐던 요정으로, 사람들은 화투를 치며 자리가 나길 기다렸다.

‘오진암’과 ‘대하’는 전통의 강호로 1950년대부터 요정으로 운영돼왔고 1973년생 ‘명월’과 ‘청풍’은 신진세력이었다.

1970년대 말 관광요정으로 지정된 ‘명월’은 1980년대 전성기를 누렸고 1960년대부터 있었던 청풍(익선동 99번지)은 2012년까지 번성했던 요정 ‘도원’으로 변했다.

 

“많은 음독사건이 일어났지요. 다른 기생과 외도를 한 남자를 기다리다 목숨을 끊는 처녀들이 많았어요.”(북촌문화연구소 은정태 소장) 현재 익선동에서 가장 잘 나가는 술집 ‘식물(식물 카페 앤 바 오픈 스페이스)’ 자리 역시 기생이 살았던 건물로 전해진다.

낡은 창문은 거울로 되살리고 폐허가 된 낡은 한옥 지붕은 빈티지한 카페 인테리어로 바뀌었다.

 

번성과 퇴출을 반복하던 요정은 1970년대 관광요정 문화가 창궐하며 다시 살아난다.

1971년~1973년 관광정상화가 되면서 하루에 당시 공무원 월급의 절반 이상씩 벌어들이는 기생도 많았다.

 

그러다 두 번의 오일쇼크를 겪고 부침을 거듭하면서 요정 문화는 88올림픽을 끝으로 사그라든다.

1990년대 들어오면서부터 해외 관광수요 증가로 완전히 사라진 것.

오진암 자리였던 그랜드 앰배서더 호텔 인사동 외벽에는 대문과 안채, 안채로 들어가는 길, 부암동으로 이전하기 위해 해체하는 과정 등의 사진이 붙어 있다.

정인숙 사건과 선운각, 한일회담과 청운장, 남북회담의 삼청각과 오진암에 대한 기록은 요정과 정치의 관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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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동 쪽방촌©매일경제 이승환 기자, ©낙원악기상가


▶‘종삼’이 있던 돈의동 vs 낙원동의 텍사스촌

 

1921년 문을 연 명월(돈의동 145)이 있던 돈의동은 한때 약 80개의 요정이 즐비했다.

일제강점기 신탄 시장이 1930년대 없어지면서 술집들이 들어섰고 전쟁을 거치며 사창가가 형성됐다.

이곳이 돈의동의 유곽인 ‘종삼’이다. 탑골공원에서 종로5가까지 동서로 1km, 남북으로 100m 정도 되는 종삼에서 일하던 여성의 수는 한때 약 1500여 명에 달했다고.

 

조금 더 걸으니 서울에서 가장 밑바닥 주거형태라는 8000원짜리 ‘꼬방동네’가 나온다.

1970년대 후반 가출 청소년들이 모여들던 ‘동광엄마네집’은 당시 하루 300원(현재는 8000원)이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보유자 임춘앵의 집(돈의동 75-1)도 돈의동에 있다.

1950년대 중반부터 극장으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국극의 인기는 꺾인다.

집을 담보로 재기공연을 준비했던 임춘앵의 좌절감은 어땠을까.

 

1968년에 생긴 낙원상가는 종로에 생긴 가장 큰 변화였다.

해방 후 소개지 낙원자유시장에 ‘텍사스촌’이 형성됐고, 유흥업소 활황으로 악사 인력시장도 만들어지며 자연스럽게 낙원상가가 생겨난 것.

1982년 야간통행금지가 없어진 것도 결정적이었다.

낙원동 파고다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된 기형도(1960~1989) 시인을 생각하니 유하 시인이 쓴 ‘파고다극장을 지나며’가 떠오른다.

‘끈질기게 그 자리를 지키는구나, 파고다 극장/한땐 영화의 시절을 누린 적도 있었지/내 사춘기 동시상영의 나날들’.

1970년대 후반부터 파고다극장을 중심으로 수많은 게이바가 생겨났지만 1990년대 사이버공간과 이태원으로 신세대가 이전해가자 구세대만 낙원동에 남는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커트 비용이 3500원이라는 피카디리 이용소가 나온다. 기형도도 이곳에서 머리를 잘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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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의 꽃미남 백석과 기생 자야(김영한)의 사랑

 

종로에 오면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 김영한 여사의 사랑이 떠오른다.

오똑한 콧날과 형형한 눈빛의 백석이 굳게 다문 반듯한 입술을 열어 시어를 쏟아내면 어떤 여자도 감당하기 어려웠으리라.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중략)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같은 것은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中

 

머리 한쪽이 치켜 올라간 파격적인 헤어 스타일의 시인 백석은 이국적인 생김새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1936년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시절, 교사 회식 자리에서 함흥권번의 기녀 ‘자야(子夜, 본명 김영한)’와 사랑에 빠진 백석.

그는 종로3가 단성사 극장에서 둘이 함께 본 <전쟁과 평화> 주인공 나타샤를 자야에 빗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쓴다.

 

두 사람이 종로 청진동에 살림을 차린 비슷한 시기 종로 우미관 뒤편에서는 천재 시인 이상이 기생 금홍과 함께 살림을 차린다.

자야와 함께 살 방법을 강구하며 만주로 떠난 백석. 그리고 해방과 전쟁, 분단과 함께 완벽히 헤어진 두 사람.

26살에 떠나 보낸 그를 평생 기다린 김영한은 세상을 떠나기 전, 평생 모은 1000억원 상당의 요정 대원각 부지를 10년의 삼고초려 끝에 법정스님에게 시주한다.

 

삼청각, 오진암과 함께 1960~80년대를 주름 잡은 최고급 요정으로, 현재 성북동의 절 길상사가 바로 그 대원각이다.

백석이 84세의 나이로 북한에서 사망한 4년 뒤인 1999년 겨울 김영한 여사도 영면,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마당에 뿌려진다.

사랑이 아무것도 아니게 된 시대에, 1000억원보다 시 한 줄이 갚질 수도 있음을, 스물 둘의 기생 자야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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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어화> 스틸컷©롯데엔터테인먼트


▶기생학교 ‘권번’과 말을 이해하는 꽃 ‘해어화’

 

16살의 나이로 조선권번에 들어간 자야(김영한)는 가곡과 궁중무를 배우며 <삼천리문학>에 수필까지 발표하고 일본 유학을 할 정도로 재주가 많았다.

당시 기생들은 기예를 지닌 엔터테이너로 여성의 문화사를 새로 썼다.

 

최근 개봉작 <해어화>에는 다음과 같이 기녀를 모임자리에 내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고려관 하나~ 국일관 둘~” 예인을 키워내던 기생학교 대성권번에서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던 서연희(천우희)와 정소율(한효주).

연희와 소율에게 예술을 가르치던 산월(장영남)은 기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과 말, 학문과 예술을 아는 말, 감히 꺾을 길 없는 고귀한 몸과 꽃이다. 재주란 그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며 기생이란 다름 아닌 예인이다.”

노래, 악기 연주, 춤, 시서화를 고루 배웠던 기생은 일류 풍류객들 앞에서 기예를 평가 받아야 했고 위신을 떨어뜨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는지, 또는 여자로서나 자식으로서의 본분을 평가받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기생조합의 일본식 명칭인 ‘권번’은 직업적 기생교육기관이자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기생의 활동을 관리하던 조합이다.

기생 등록, 화대 관리, 세금 납부 등을 도맡아 하며 11~20세 중반 소녀들을 1~3년 동안 교육했다.

 

<조선미인보감>(1918, 경성신문)은 권번 혹은 기생조합에 등록된 기생 605명의 인적 사항을 싣고 있다.

‘십오 세의 연소 기생, 시조잡가 곧잘 하고, 거문고가 능란함도, 숙성하다 하겠거늘, 국한문을 능히 알아, 서사통정 할 만하니, 기특하다 김연홍이, 그 뉘 아니 일컬으랴, 아름답고 맑은 체격, 추수부용 새로 핀 듯, 집은 듯한 어깨 모양, 맵시 동동 똑딱도다’-기생 김연홍 <조선미인보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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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어화> 스틸컷©롯데엔터테인먼트


▶시대를 사로잡은 예인, 기생

 

“률을 못하나, 소리를 못하나 춤을 못 추나 술을 못 먹나, 태도가 없나, 백기가의 구비함은 가히 여중호걸이요, 화중신선이로다.” <매일신보> 1914.2.1

<기예는 간데 없고 욕정의 흔적만이, 권번>은 1914년 당시 신문기사에 실린 ‘예인 100인’ 중 8명의 남자를 제외한 92명의 예술인이 모두 기생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만큼 기녀들의 기예 수준이 높았다는 얘기가 된다.

 

최초의 재즈가수이자 여배우 1세대로 활동한 복혜숙은 300편 이상의 영화, 연극, TV극에 출연했고 콜럼비아 사의 제의로 음반을 취입하기도 했다.

영화감독 나운규의 연인이었던 류신방은 영화 <벙어리 삼룡>에 출연했으며 ‘꽃중의 꽃’을 가리키는 ‘화중선’을 기명으로 한 여류명창 이화중선은 일제강점기 때에 임방울과 함께 음반을 가장 많이 녹음한 당대 최고의 예인이었다.

염상섭 <만세전>의 이인화, 김유정 <따라지>의 아끼꼬, 이효석 <계절>의 보배 등이 학생에서 여급으로 전환한 주인공이었다는 것이 작가의 말이다.

 

기생이 지닌 기예 대신 창기로서의 이미지만 남은 것이 아쉬웠다는 이영태 작가는 이 책에서 가무악, 해학과 말주변 외에도 잔치나 술자리의 성격과 분위기를 파악하는 ‘분별품류(分別品流)’, 손님의 성향 등을 간파하는 ‘형척인물(衡尺人物)’이라는 명기의 기본 요건을 자신이 처한 시대에 맞게 재해석했던 용동(인천)권번 출신의 기생들을 소개하고 있다.

 

만개한 꽃으로 누추한 시대를 비추었던 해어화. 그녀들은 2016년에 여전히 많은 책과 이야기로 남아 있다.

 

▷<권번 : 기예는 간데없고 욕정의 흔적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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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사진 이영태/인천문화재단


단순히 말하는 꽃이 아니라 기예를 바탕으로 해학과 말주변을 지녀야 진짜 해어화일 수 있었고, 그런 명기들을 상대편 남자들은 존중하여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이런 명기가 사라지게 된 데에는 일제의 기생 등록 정책 ‘권번’이 생겨났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인천 지역 흩어진 자료들을 이리저리 모아 용동권번 기생들의 삶을 어렵사리 복원해냈다.

 

다양한 관점에서 인천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문화의 길> 총서 열두 번째 책으로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 이영태가 ‘권번(券番)’을 창으로 삼아 인천의 근현대사를 들여다본다.

 

▷<권번과 기생으로 본 식민지 근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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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미연 저/아르케북스 펴냄


저자는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의 권번과 기생들이 예술 활동을 통해 단절 위기에 처한 전통예술을 이었다고 본다.

사회활동을 통해 여성의 사회 진출을 보다 확고하게 하는 역할 또한 수행함과 동시에 역사적, 사회적 변동의 기류를 통과하면서 예술가로, 사회인으로 주체적인 활동을 보여주었다는 것.

 

기생들은 식민지적 근대가 요구한 일방적인 문명사회의 강요에서 벗어나, 탐욕의 생존전략이 아닌 스스로 자아를 찾기 위한 노력과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전통예술이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문화로 거듭나는데 일조를 하였다는 것이 저자의 이야기다.

 

 

박찬은 기자 / 사진 이영근, 롯데엔터테인먼트, 매경DB 자료제공 북촌문화연구소자료제공 Citylife
발행일 2016.06.16기사입력 201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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