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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국왕으로 있던 18세기 후반은 조선의 문예부흥기로서 사회 각 분야의 발전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이 시기는 세계사적으로도 역동적인 움직임이 있던 시대다.

미국이 신생 국가로 새롭게 탄생한 1776년은 정확하게 정조가 즉위한 해였다.

유럽에서는 1789년 프랑스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나 자유와 평등에 바탕을 둔 근대 시민 국가가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중국에서는 건륭제(1736~1795년)가 왕위에 있으면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건륭제는 강희제, 옹정제에 이어 18세기 청나라의 정치, 문화 발전을 견인한 군주였다.

동서양 모두 새로운 발전의 전기를 마련해가던 18세기 후반, 정조는 강화된 왕권과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문화 중흥을 위해 애썼다.

 

정조는 학술 정책 연구기관인 규장각을 중심으로 각종 편찬 사업을 주도했다.

이것은 선왕인 영조가 ‘속대전’ ‘속오례의’ ‘속병장도설’ ‘여지도서’ 등의 간행을 통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문화 정리 사업을 이어받는 길이기도 했다.

‘경국대전’과 ‘속대전’을 잇는 법전인 ‘대전통편(大典通編, 1785년)’을 비롯해 외교문서를 정리한 ‘동문휘고(同文彙考, 1788년)’, 병법서인 ‘병학통(兵學通, 1785년)’, 무예의 기술을 그림과 함께 정리한 ‘무예도보통지(1790년)’ 등을 간행했다.

그뿐 아니라 각 관청의 연혁과 기능을 정리한 ‘탁지지(호조)’ ‘춘관통고(예조)’ ‘추관지(형조)’ ‘홍문관지’ ‘규장각지’와 같은 책들이 저술되면서 국가 기관에 대한 역사와 기능이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다.

 

정조는 청나라의 문물 수입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청대의 학술 사조가 총정리돼 있는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5022책을 수입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런 책은 청과 서양의 선진 문물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됐다.

 

‘군서표기(群書標記)’는 당시 편찬된 책의 목록을 정리한 것으로 정조가 세손으로 있던 1772년부터 사망한 1800년까지 직접 지은 어정서와 명을 내려 편찬하게 한 명찬서가 기록돼 있다.

 

정조의 편찬 사업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집인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간행한 것이다.

정조는 이순신 장군의 행적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에 신하들에게 명을 내려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각종 기록을 모으게 한 후 1795년(정조 19년) 책으로 출판했다.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널리 기려 후대에도 충무공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의도가 컸다.

책에는 교유문(敎諭文), 사제문(賜祭文), 기(旗)·곡나팔(曲喇叭)·귀선(龜船) 등의 도설(圖說), 이순신의 세보와 연표, 난중일기 등이 수록돼 있다.

 

우리가 이순신 장군의 일기로 잘 알고 있는 ‘난중일기’는 원래 제목 없이 ‘임진일기(1592년)’ ‘계사일기’(1593년) 등 연도별로 모아진 일기다.

후에 정조가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하면서 ‘난중일기’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2건의 귀선도(龜船圖)는 실물이 남아 있지 않은 거북선의 크기와 모양을 알려주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책 간행 사업을 넘어 정조는 문화 중흥을 위해 미술 작업에도 앞장섰다.

정조는 천재 화가 김홍도를 눈여겨보고 그를 궁정 화원에 임명해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했다.

우리는 흔히 김홍도를 서민의 생활상을 그린 풍속 화가로 알고 있지만, 실제 김홍도는 정조의 총애를 받는 궁중 화원이었다.

김홍도는 화성 행차와 관련된 병풍이나 행렬도, 그리고 국가의 행사도를 비롯한 각종 궁중 그림의 제작을 주도했다.

정조가 단행한 1795년 화성 행차의 주요 장면이 담긴 8폭의 병풍 그림 ‘수원능행도(水原陵幸圖)’는 바로 김홍도의 주관하에 그려진 대표적인 기록화다.

 

김홍도와 정조의 인연은 1773년 29세의 김홍도가 영조의 어진과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의 초상화를 그리며 맺어진다.

훗날 정조는 당시를 술회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김홍도는 그림에 교묘한 자로 그 이름을 안 지 오래다. 30년 전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화사(畵事)에 속한 일은 모두 홍도가 주관하게 하였다.” (홍재전서, 1800년(정조 24년)).

 

이후 김홍도는 왕이 된 정조의 어진 제작에 참여하면서 더욱 신뢰를 받았다.

정조가 화원 신분인 김홍도에게 파격적으로 안기찰방이나 연풍현감과 같은 지방의 수령직을 준 것 역시 두 사람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김홍도는 산수화와 기록화, 신선도 등을 많이 그렸지만 정감 어린 풍속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밭갈이, 추수, 씨름, 서당 등에서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소탈하고 익살스러운 필치로 묘사했다. 이

런 그림은 정조의 국정 자료로 활용됐던 측면도 있다.

정조는 국정 개혁에 대한 의지가 매우 강했고 따라서 일반 서민들의 삶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왕이라는 신분 때문에 그는 직접 서민들 가까이에서 그들의 삶을 관찰하고 생활의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한 의견을 들을 수는 없었다.

이에 정조는 최측근인 김홍도에게 서민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오라고 지시했고 김홍도는 이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정조는 국가적인 출판 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개인 기록도 철저히 남겼다.

학자 군주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정조는 증자가 말한 ‘일찍부터 일기 쓰는 습관’이 있었다.

현재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일성록(日省錄)’의 모태가 된 것은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쓴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였다.

 

1785년(정조 9년) 정조는 존현각일기와 즉위한 후의 행적을 기록한 ‘승정원일기’ 등을 기본 자료로 해 중요사항을 나눠 왕의 일기를 편찬할 것을 명했다. 규장각 신하들이 실무를 맡았고, 1760년(영조 36년)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의 기록이 정리됐다.

당시 왕의 비서실에서 작성하는 승정원일기가 있었기 때문에 정조는 승정원일기와 다른 방식의 편찬을 지시했다.

 

일성록은 주요 현안을 강(綱)과 목(目)으로 나눠 국정에 필요한 사항을 일목요연하게 찾을 수 있는 방식으로 편찬됐다.

일성록에는 신하들이 올린 상소문을 비롯해 왕의 동정과 윤음(綸音·임금이 백성이나 신하에게 내리는 말), 암행어사의 지방 실정 보고서, 가뭄과 홍수 구호 대책, 죄수 심리, 정부에서 편찬한 서적, 왕의 행차 시 처리한 민원 등이 월, 일별로 기록돼 있다.

내용은 주요 현안을 요점 정리하고 기사마다 표제를 붙여서 열람을 편리하게 했다.

 

일성록에는 위민(爲民) 정치를 실천한 정조의 모습도 잘 나타나 있다.

격쟁(擊錚·꽹과리를 두드려 억울함을 호소함), 상언(上言)에 관한 철저한 기록이 그것인데, 일성록에 1300여건 이상의 격쟁 관련 기록이 실려 있다.

정조는 행차 때마다 백성의 민원을 듣고 그 해결책을 신하에게 지시함으로써 최대한 백성 의견을 반영하려 했다.

 

정조는 개인 문집을 남긴 최초의 왕이기도 했다.

그의 호 홍재(弘齋)를 딴 문집 ‘홍재전서’ 184권 100책은 정조가 얼마나 철저하게 학문을 연구했는가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경연에서 신하와의 토론에 있어서 막힘이 없었다는 정조, 그 비결은 철저한 공부였다.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독서광이었음은 기록에서 잘 드러난다.

 

“내가 춘저(春邸·세자궁)에 있을 때 평소 책에 빠져 연경에서 고가(故家) 장서를 사왔다는 소식이 있으면 문득 가져와보라고 하여 다시 사서 보았다…경사자집(經史子集)을 갖추지 않는 것이 없는데, 이 책들은 내가 다 보았다.” (홍재전서 ‘일득록’)

 

앞에 언급했듯 홍재전서 중 군서표기는 정조 자신이 직접 지은 책과 신하에게 명해 편찬한 책들에 대해 그 출판 경위와 주요 내용을 해설해놓은 저술이다.

군서표기를 통해 정조 시대에 경학과 역사, 언어, 병법, 법률, 음악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다양한 책들이 편찬됐음과 함께 왕성한 출판 활동과 문화 운동을 확인할 수가 있다.

 

정조는 선왕인 영조의 업적을 계승해 대대적인 편찬 사업을 추진했다.

이런 성과물은 18세기 후반 조선 사회가 학문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상당히 수준 높은 국가를 만들어갔다는 지표가 된다.

학자 군주 정조의 노력과 성과가 적지 않았기에, 18세기 영·정조 시대를 우리는 당당히 조선 후기 르네상스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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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정윤정자료제공 매경이코노미
발행일 2016.06.20기사입력 2016.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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