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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진나라의 혁명가 상앙. 그는 군주를 설득해 20년간 개혁정치를 펼쳤고, 재상이 되어 무한할 것 같은 권력과 명예를 누렸다.

하지만 그는 온몸이 찢기는 죽임을 당했다. 원인은 단순했다. 배운 것 많고 지혜로웠지만 상앙의 눈은 현재만 바라보는 근시였다.

그는 자신의 개혁정치가 빚어낼 빛과 그림자를 살피지 못했고 무엇보다 다가올 미래 권력의 관리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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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 지상주의의 근본 ‘서자 콤플렉스’

 

춘추시대가 끝나고 중국은 전국시대(기원전 475~기원전 221년)로 접어들었다.

춘추시대의 패자는 관중이라는 걸출한 재상의 보필을 받은 제나라 환공이었다. 하지만 그 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세상은 다시 분열되었고 수십 개의 국가들이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 끝에 전국시대는 진, 초, 위, 조나라 등 7개 국가로 정립되었다.

이 중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는 위魏나라였다. 이 무렵 작은 위衛나라에서 상앙이 태어났다. 이때가 기원전 395년이다.

 

상앙의 원래 성은 공손으로, 그의 본명은 공손 앙이었다(후일 그는 상앙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의 가문은 주나라 왕족과 위나라 귀족의 후손으로 명문가였다.

상앙의 아버지는 위나라의 공자였지만 어머니는 첩이었다. 때문에 상앙은 평생 첩의 아들이라는 ‘서자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남달리 총명했던 상앙은 유학을 공부하면서도 특히 법가에 심취했다.

그는 자신을 ‘유학자’라 설명했지만 예와 인을 강조한 유학보다는 ‘힘과 법으로 세상을 교화’하는 법가에 동조했다.

태생적 한계를 직감한 상앙은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출세하려는 욕망이 강했다.

그는 또한 남을 믿지 못하는 성품이었다. 상앙은 세상에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강력한 위魏나라로 갔다.

 

상앙은 뛰어난 판단력, 해박한 지식과 정치적 감각으로 곧 두각을 나타내 위魏나라 실력자인 재상 공숙좌의 가신이 된다.

공숙좌는 상앙의 재주를 아꼈고 천하를 경영할 인물로 평가했다. 공숙좌는 평상시는 물론 전쟁터에서도 상앙을 항시 대동했다.

한번은 전쟁 중에 적국에 잡혀 포로가 되었다 돌아온 공숙좌가 병에 걸렸다. 위나라 혜왕이 공숙좌를 문병 왔다.

잠시 주변을 물린 공숙좌가 혜왕과 비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재상, 후일 재상의 후임으로 어떤 인물을 등용해 쓰면 좋겠는가?”

 

“군주, 저의 가신인 상앙을 중용해 쓰셔야 합니다. 그는 천하 인재로 재상감입니다.”

 

혜왕이 선뜻 대답하지 않자 공숙좌가 대담한 건의를 했다.

 

“군주, 상앙을 중용하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그를 반드시 죽여야 할 것입니다. 그를 살려두면 필시 우리 위나라의 후환이 될 것입니다.”

 

혜왕은 다시 침묵했고 확실한 대답 없이 그 자리를 떴다. 곧 공숙좌가 상앙을 불렀다.

 

“혜왕에게 너를 천거했으나 답변을 듣지 못했다. 또한 너를 중용하지 않을 거라면 죽이라고 내가 건의했다. 너는 바로 이 나라를 떠나라.”

 

“재상, 너무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혜왕에게 저를 천거했는데도 그 말을 듣지 않았는데 반면 저를 죽이라는 말 또한 듣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위나라를 떠나지 않겠습니다.”

 

이처럼 상앙은 대담성과 상황을 분석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상앙의 예상대로 궁에 돌아온 혜왕은 “별 재주도 없는 상앙을 나에게 추천하는 것으로 봐서 공숙좌가 노망이 든 모양이다”라고 측근들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이때가 기원전 361년으로 상앙의 나이 34세 때이다.

 

 

▶귀족 세력 와해를 가져온 중앙집권의 ‘변법’

 

결국 상앙은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곳이 위나라가 아니라고 결론내리고 진 秦나라로 떠난다.

당시 진나라는 이른바 전국7웅 중에서도 가장 낙후된 나라였다.

하지만 새로 왕이 된 진 효공은 강력한 국가를 건설해 전국시대 패자를 꿈꾸는 야심가였다. 그는 천하에 인재를 초빙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진나라로 간 상앙은 번호표를 받고 진 효공의 면접을 기다렸다. 기다림은 세월이었다.

상앙은 머리를 써 효공이 총애하는 신하 경감과 선을 댔다. 그를 통해 상앙은 효공과 대면할 수 있었다.

상앙은 효공과 총 세 번의 면접을 치렀다. 앞선 두 번의 면접 때 상앙은 효공에게 하늘과 성군의 예와 도를 설파했으나 효공의 반응은 그다지 뜨겁지 않았다.

마지막 세 번째 면접에서 상앙은 효공에게 패자의 도를 설파한다. 단기간에 강력한 국가를 만들고자 한 효공은 상앙의 말에 매료당했다.

상앙은 효공에게 농업 장려로 백성을 배부르게 해 나라의 재정을 튼튼하게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농전사상 農戰思想’을 주장했다.

 

효공은 그 자리에서 상앙을 등용했다. 상앙은 진 효공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대대적인 개혁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군사, 재정, 법제, 토지, 관리체계 등 진나라의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계획해 이를 지속적으로 시행했다.

후대 역사가들은 상앙의 개혁정치를 ‘변법 變法’이라 불렀다.

 

1차 변법은 기원전 359년부터 실시됐다. 상앙은 진나라의 모든 가구를 5, 10가구의 단위로 정리했다.

그리고 이 단위별로 세금과 병역의 의무를 부과했다. 또한 이 단위 가구에서 범죄가 발생했는데도 고발을 안 하면 연좌제로 엄하게 처벌했다.

물론 포상도 단위 가구에 똑같이 시행했다. 이는 훗날 오가작통법으로 발전했다.

이 고발제도를 통해 상앙은 진나라의 모든 백성을 실질적으로 감시하고 통제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또한 등급제를 실시했다. 위로는 귀족부터, 아래로는 일반 백성 모두에게 총 20등급의 작위를 부여했다.

작위에 따라 옷, 집, 생활 등 모든 실생활과 명예까지 차등을 두었다.

작위 등급은 철저하게 공로의 유무와 대소를 따져 부여했다. 공을 세우면 작위를 주었고 공이 없으면 귀족이라도 작위를 박탈했다.

이로 인해 자연히 백성들은 전쟁에 참전하거나 농업 생산량을 늘리는 방법 등으로 작위를 받았다.

대신 귀족들은 지위를 유지하려는 중압감에 시달렸다. 귀족계급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약 10년간의 개혁정치를 통해 자신감이 붙은 상앙은 기원전 350년 2차 변법을 시행했다.

전국을 31개 현으로 통합했다. 그리고 현에는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해 강력한 중앙집권제인 군현제를 구축했다.

또한 상앙은 노예제의 부분적 폐지를 주장했다.

이는 노예를 과세와 병역 의무가 있는 양인으로 신분을 전환시켜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만드는 동시에 귀족, 호족 가문의 세를 약화시키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제도를 통해 상앙은 안정적인 세수를 확보했고 토지개혁과 도량형 통일 등으로 진나라의 국력을 신장시켰다. 상앙의 변법은 진나라를 변방의 작은 국가에서 전국시대 강자로 변모케 했다.

상앙이 진나라 효공의 오랜 숙원인 부국강병의 진나라를 만든 것이다.

 

개혁에는 당연히 부작용과 반발이 있기 마련이다. 귀족들은 반발했고 효공조차 우려를 표명했다. 하지만 상앙은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그는 “군주, 시대를 앞서 나가려면 비난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개혁에 있어 모든 의견을 조율하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닙니다. 결과가 좋으면 부작용과 반대 여론도 수그러질 것입니다”라고 효공을 설득했다.

하지만 진나라 귀족 가문은 서로 연합해 변법을 저지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오죽하면 하루에 변법 반대 상소만도 수천 개가 진왕 효공에게 올라올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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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 없는 엄한 법 집행으로 태자를 모욕하다

 

상앙은 멈추지 않았다. 진 효공 역시 상앙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상앙은 법을 제정하고 이를 시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법이라도 백성들이 따르지 않으면 소용없었다. 상앙은 묘수를 냈다. 하루는 남문에 나무를 심어놓고 팻말을 붙였다.

‘이 나무를 북문으로 옮기면 금 50근을 포상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그러자 상앙은 포상금을 100근으로 올렸다.

며칠이 지나도 나무를 옮기는 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날, 한 백성이 나무를 북문으로 옮겼다. 상앙은 즉시 이 백성에게 포상금 금 100근을 지급했다. 그제야 백성들은 정부의 말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나무를 옮겨 신뢰를 얻다’는 뜻으로 사람들은 이를 ‘이목지신 移木之信’이라 불렀다.

 

상앙이 당근책만을 쓴 것은 아니었다. 법의 집행 못지않게 처벌에도 가혹할 정도로 엄중했다. 그는 ‘거열형’을 만들었다.

이는 사람의 사지를 소나 말로 묶고 각 방향으로 달리게 해 온 몸을 찢는 무시무시한 형벌이었다.

또한 그는 법을 비난하는 자도 잡아들여 처벌했지만 법을 칭송하는 자 또한 처벌했다.

이는 ‘일반 백성들은 법을 지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법의 좋고 나쁨을 평가할 수 없다’는 상앙의 강한 법치주의에 입각한 태도였다.

 

어느 날, 태자가 변법을 위반하는 일이 벌어졌다. ‘법 앞에서 예외가 없다’를 천명한 효공과 상앙이었지만 장차 다음 왕권을 물려받을 태자를 벌할 수는 없었다.

대신 태자의 스승을 처벌했다. 태자의 스승은 진왕 효공의 형제로 태자에게는 백부인 공자 건이었다.

상앙은 태자 대신 스승인 공자 건의 코를 베면서 태자의 죄를 물었다.

그리고 태자의 다른 스승들은 모두 먹물로 얼굴에 문신을 새겨 넣어 죄인임을 만천하에 알렸다.

황족인 공자 건은 충격을 받고 은둔했다. 태자는 분노했다.

아무리 상앙이 아버지 진 효공의 신임을 받고 있지만 자신의 스승을 벌하는 것은 태자를 모욕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태자는 복수를 다짐했다.

 

20년간 지속된 변법으로 나라는 예와 인보다 법이 앞서는 통제 국가가 되었고 진나라는 강력한 군사강국으로 우뚝 섰다.

진나라는 서서히 굴기(몸을 일으킴)를 시작했다. 상앙은 정치, 군사, 외교를 총괄하는 실권자가 되었다.

그는 위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위나라 혜왕은 그를 후하게 대접했다.

과거 공숙좌가 혜왕에게 상앙을 천거했지만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일을 안주삼아 이야기 하면서 두 사람은 양국의 선린을 다짐했다.

 

상앙은 위나라 혜왕에게 “위나라와 제나라가 분쟁이 발생해도 진나라는 중립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위나라의 관심을 제나라로 돌리고 그동안 진나라를 정비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3년 후, 상앙은 5만 대군을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했다. 다급해진 위나라에서는 수비대장으로 공자 앙을 임명하고 상앙을 막게 했다.

공자 앙은 상앙이 위나라에 있을 때 친분이 있던 관계였다.

공자 앙은 이 전쟁을 상앙과의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상앙은 이를 역으로 이용했다. 그는 공자 앙에게 편지를 보냈다.

 

‘진나라는 위나라와 전쟁을 할 생각이 없다’ 주력군은 잠시 뒤로 물리고 중간지대에서 만나 회포를 풀면서 해결책을 찾자는 내용이었다.

 

공자 앙은 실제 진나라 군이 철수하는 것을 보고 중간지대인 옥천산으로 향했다.

수행원은 측근 몇 명뿐이었다. 술자리는 진행되었다.

잠시 상앙이 자리를 뜨자 이를 신호로 매복해 있던 진나라 군이 일제히 공자 앙을 공격해 그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진나라는 여세를 몰아 위나라를 향해 대군을 휘몰았다. 옛 수도인 안읍까지 포위당하자 위나라 혜왕은 수도를 버리고 도망갔다.

상앙은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전국시대 모든 국가와 사대부들은 일제히 상앙의 이번 작전을 ‘신의를 저버린 배신행위’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상앙은 이 공으로 총리 격인 대량조에 임명되면서 ‘열후 列候’에 봉해지고 ‘상 商’ 지역 15개 마을을 봉토로 받았다.

그 후로 이름도 공손 앙에서 상앙으로 불리게 되었다. 상앙은 효공과 함께 진나라를 다스리는 실질적 지분이 있는 2대 주주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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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앙, 자신이 만든 법으로 처벌되다

 

상앙은 거칠 것이 없었다. 효공의 전폭적인 신임으로 그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막강한 권세가 되었다.

물론 왕족, 귀족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상앙의 엄격한 법집행을 원망하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상앙이 조야에 명망 있는 선비 조량을 만났다. 상앙이 조량에게 물었다.

 

“내가 지금 진나라를 다스리는데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부탁하네.”

 

“일개 선비인 저의 의견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재상이 되어 진나라의 많은 부분을 개혁했고 성과를 보았다네. 옛날 목공 때의 명재상 백리해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 어떤가?”

 

“제가 옳은 소리를 아무리 해도 듣지 않겠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백리해는 현명하고 어진 재상입니다. 그는 살아서 오랑캐도 복종시켰고 백성들은 모두 그를 신뢰했습니다.

그가 죽자 백성들 중에서 울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에 비해 공께서는 왕과의 첫 만남도 경감에게 소개를 부탁해 만났고 백성을 위한 정치보다는 군주의 치적 만들기에 우선했습니다.

또한 공이 만든 법으로 태자를 욕보였고 무서운 법으로 죽거나 다친 백성의 수가 한둘이 아닙니다.

이들의 원망이 쌓여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왕보다 공을 더 무서워합니다. 하지만 인심을 잃으면 오래 갈 수가 없습니다.

공께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싶으면 하사받은 봉토를 반납하고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그리고 덕을 쌓아야 합니다.

지금처럼 국정을 장악하고 힘을 과시한다면 장차 효공 사후에 닥칠 복수를 다짐하는 무리들을 어떻게 당하려 하십니까?”

 

조량의 간언을 상앙은 듣지 않았다. 그리고 5개월 뒤 병을 앓던 진 효공이 죽고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진 효혜왕이다.

효혜왕은 태자 시절의 수모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무려 8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던 스승 공자 건도 복귀했다.

공자 건은 복귀하자마자 상앙을 반란죄로 고발했다. 물론 상앙은 반란을 모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효혜왕과 귀족 세력은 상앙을 공격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다.

상앙은 더 이상 진나라에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야반도주했다. 위나라로 가기 위해 국경에 도착했다. 하지만 성문은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상앙이 수문장에게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없었다. 새벽이 되어야 문을 열 수 있다는 법 때문이었다.

할 수 없이 여관을 찾았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문전박대를 받았다. 여행증이 없는 사람을 받으면 여관 주인을 엄중하게 처벌하는 법 때문이었다.

상앙은 공교롭게도 자신이 만든 법으로 인해 위험한 지경에 빠진 것이다.

이를 후대 사람들은 ‘자기가 만든 법으로 자기 목숨이 위험하다’는 뜻의 ‘작법자폐 作法自斃’라는 고사성어를 만들어냈다.

상앙은 한탄했다.

 

“아, 법의 폐해가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우여곡절 끝에 상앙은 위나라로 탈출했지만 위나라 역시 상앙을 반기지 않았다.

그가 공자 앙을 속이고 위나라를 대패시킨 과거 원한을 잊지 않았고 또한 상앙의 망명 신청을 받아들이면 진나라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했다.

위나라는 오히려 그를 잡아 진나라로 보내려했다. 간신히 탈출한 상앙은 자신의 봉토인 상 지역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식솔과 양민, 노비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했다.

하지만 진나라를 상대하기에는 이미 자신의 ‘변법’으로 인해 너무나 강력해진 국가로 변해있었다.

 

상앙은 꾀를 냈다. 작은 국가 정나라를 공격해 힘을 비축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정나라로 가는 길에 민지라는 곳에서 진 효혜왕의 군대에게 공격당해 상앙은 죽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진 효혜왕은 상앙의 시체를 수도인 함양으로 가지고 와 거열형에 처하고 상앙의 삼족을 연좌제로 몰아 모두 몰살했다.

상앙은 자신이 만든 법인 연좌제의 덫에 걸려 멸문지화를 당했고 자신 또한 거열형으로 시신조차 보존치 못했다. 역사의 아이러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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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세학 | 미래 권력에 대비하지 못한 ‘오늘만 산다’

 

중국 역사상 3명의 혁명가가 있다.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을 패자로 만든 명재상 관중, 전국시대 진나라의 개혁을 추진한 상앙 그리고 송나라 신종 치세에서 신법으로 개혁정치를 편 왕안석이다.

이 중에서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성공한 개혁으로 칭송받는 것은 관중이 유일하다.

물론 상앙의 개혁은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는 개혁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집안이 멸문을 당했다.

왕안석의 개혁 역시 중도에 실패했고 한때 역사가들에 의해 실패한 정치가로 낙인찍혔다.

 

이 세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은 것은 바로 열린 귀, 넓은 가슴 그리고 세상을 포용하는 관용의 차이였다.

관중은 위로는 왕부터, 아래의 백성까지 모두에게 어진 정치를 펼쳤다.

하지만 왕안석과 마찬가지로 상앙 역시 마치 ‘천상천하 유아독존’식의 오만에 가득한 정치를 함으로써 많은 적을 만들었고 끝내 그 적의 공격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상앙의 개혁 정치인 ‘변법’을 성공한 정치로 보는 측면이 있다.

낙후된 변방국가 진나라를 전국시대 패자로 만들었고, 효혜왕은 상앙을 미워해 죽였지만 그가 만든 정책인 변법을 지속했다.

그리고 100여 년이 지난 기원전 221년 진나라의 시황제가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만드는데 성공한 점은 상앙의 변법이 부국강병에서는 효과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상앙은 후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역사가 사마천은 <사기>에서 ‘상앙은 인정머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잔인한 정치가’였다고 평가했다.

 

상앙은 법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 그는 ‘법으로 강한 국가를 만들 수 있고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의 소유자였다.

그의 이런 뜻은 부국강병을 원하는 진 효공의 목적과 부합해 꽃피울 수 있었다.

하지만 상앙이 간과한 것은 엄한 법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상식이었다. 법은 수단이고 방법이지 목적은 아니다.

그는 법으로 세상을 바꾸고 교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지만 실제 세상은 법보다 인정, 의리, 대의, 예의가 지배하는,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상앙은 자신이 만든 법으로 인해 자신은 물론 그의 가문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었고 그의 업적은 아침이슬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상앙은 현재에 충실했다. 그것은 법가의 기본 사상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시간의 축적이고 시간은 현재의 권력에서 미래의 권력으로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무리 느려 보이고, 오지 않을 것 같아도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다.

 

상앙은 귀족 세력의 와해를 통해 현재의 권력을 만끽했지만 미래 권력의 0순위인 태자를 모욕하면서 잠재적 불안 요소를 스스로 만들었다.

태자가 자신을 무시한 상앙을 죽이겠다고 결심한 순간, 고개를 들었을 때 사방은 모두 상앙의 적으로 가득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현재의 권력 즉 진 효공이 죽자 상앙은 혼자 외톨이로 남았다.

그 막강했던 권력도 효공이 존재함으로써 그 힘이 발휘된다는 것을 상앙은 잊은 것이다.

현재에만 몰두하고 미래를 대비하지 못한 것이 바로 상앙이 실각하고 죽임을 당한 첫 번째 이유이다.

 

상앙은 이방인이었다. 본래 위나라 사람인 그가 진나라에서 아무리 뿌리를 내리려 해도 그는 영원한 이방인의 신분이었다.

그의 성공은 진나라 본토 출신 누군가의 성공과 명예를 잠시 대신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상앙의 두 번째 실수이다. 또한 그는 엄한 법 집행으로 법의 효용성을 넘어선 부작용을 스스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법이 자신을 보호할 때 그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법이 자신을 통제하는 순간, 법의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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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勇, 知, 德 중에 으뜸은 德將형 리더

 

지휘관을 일반적으로 세 부류로 나눈다. 용장 勇將, 지장 知將 그리고 덕장 德將이다.

<삼국지>의 장비나 2차대전 영웅 패튼 장군 등이 용장이고, 한국전쟁 시 연합군사령관 맥아더, 2차대전 독일 지휘관 롬멜은 지장일 것이다.

그리고 대표적인 덕장이 바로 2차대전 미군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을 꼽을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사람들이 지휘관으로서 역사의 한 획을 긋고 그 전공과 이름을 후세에 남겼지만 가장 성공한 이는 아이젠하워이다.

그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대통령이 된다고 더 훌륭한 사람인가의 질문이 있을 수 있지만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이젠하워는 더 화려한 군생활을 보낸 맥아더가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군복을 벗은 것에 비하면 순탄한 군생활과 정치 행보를 걸었다 할 수 있다.

원래 아이젠하워는 동기들에 비해 승진도 늦고 그리 두각을 드러낸 존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성공한 지휘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리더십과 처세학의 기본이 배려와 관용으로 무장되었기 때문이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다.

다그치고 앞장서서 전진하는 용장형의 상관도 있고, 영리하게 이익만 찾아다니는 지장 스타일도 있지만 가장 주목받는 것은 역시 덕장이다.

 

덕장은 사람을 모으는 재주가 있다. 그들은 많이 듣고, 많이 양보하고, 많이 용서하고, 많이 베푸는 것에 익숙한 리더이다.

5분 지각에 사정도 듣지 않고 소리를 지르고, 점심시간도 12시 땡! 하면 시작해 1시 땡! 하면 자리에 앉아있어야 하고, 약간의 실수에도 시말서 제출 요구를 남발하는 용장형 리더의 부서는 겉으로는 일사분란하고 조직화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을 연결하는 것은 규칙과 원칙뿐이다.

 

용장과 지장은 자신감이 넘치고 자신의 똑똑함을 알기에 남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생각과 판단만이 옳은 것이라 주장한다. 그들은 직원을 하나의 인격체이자 동료가 아닌 쓰임새로 판단하는 버릇이 있다.

등급과 점수를 매기고 장점보다 단점을 더 찾으려 하는 것이다.

이런 리더의 조직에서 창의적인 업무와 훈훈한 직장의 덕목을 찾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오로지 생존게임만 벌어지는 것이다.

 

용장, 지장도 좋지만 결국 ‘덕장’이 되어야 한다. 덕장이라고 무조건 황희 정승처럼 호인 역할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원칙, 사규, 고과 등에 있어 객관적이고 냉정한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 판단의 밑바탕에 ‘상대에 대한 배려’, ‘상대의 장점을 보려는 노력’, ‘상대를 존중하는 예의’가 든든한 받침이 되는 덕장이 되라는 것이다.

직장을 인간에 비유하면 냉정하고 잔인할 정도로 차가운 인간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많은 조직원을 통솔하고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 찾아낸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차가운 쇠덩어리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동료들끼리는 그 옛날 모발 단속하는 고등학교 학생주임의 손에 들려있던 30cm 자를 들이대지는 말아야 한다.

 

옛말에 ‘덕을 쌓으면 10년이 가고 원한을 품게 하면 100년이 간다’는 말이 있다.

뛰어난 업무 성적, 실적을 올려도 그것의 약효는 10년은커녕 1년도 지속 못한다.

회사는 ‘1단 칭찬, 2단 기대, 3단 평가’의 순환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흥부네 까치처럼 누구 덕 보려고 관용과 배려의 마음을 갖고 행동을 해도 ‘덕장의 지속력’은 ‘당연한 업무 성과’보다 파장력이 큰 것이다.

성공과 실패, 그 차이를 들여다보면 의외로 당연시되고 무심했던 인간관계가 숨어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박기종(커리어코칭칼럼니스트) / 사진 pixabay자료제공 Citylife
발행일 2016.06.23기사입력 2016.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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