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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주원장은 1368년부터 1398년까지 30년간 재위했다.

이 기간 동안 주원장은 무려 10만여 명의 공신, 군인, 대신, 관료를 숙청했다.

이유는 황제의 국가를 만들어 백성의 안위를 편하게 하겠다는 것. 숙청은 무자비했다.

개국공신, 혈육, 고향 친구 등 주원장의 머릿속에 있던 인물 전부가 해당됐다.

그러나 오직 단 한 명, 탕화만은 예외적으로 그 숙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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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배고픔을 함께 겪은 고향 친구 주원장과 탕화

 

징기스칸의 후예인 원제국은 급격히 붕괴되었다.

원나라를 세운 몽고족은 초심을 잃고 부와 권력의 달콤함에 빠져들었다.

드넓은 초원을 누비던 기마족의 기상은 사라지고 황궁에서 풍요와 안락에 취했다. 제일 먼저 관료조직이 무너졌다.

관리들의 부정과 부패로 백성들의 원망은 하늘 끝까지 닿았다.

백성들은 살기 위해 곡괭이와 호미 대신 칼과 창을 들고 도적이 되었고 점차 무리를 지어 세력을 형성했다.

머리에 붉은 띠를 동여매고 홍건적이란 조직을 만들어 중원을 휩쓸었다.

곽자흥, 진우량, 장사성 등이 홍건적을 이끌며 새로운 지배 권력이 되었다.

 

혼란의 시기, 탕화는 1326년 안휘성 봉양 시골에서 태어났다. 먹을 것, 잠잘 곳 하나 변변치 않은 빈민들이 사는 곳이었다.

탕화와 아이들은 한데 어울려 골목에서 병정놀이를 하며 지냈다.

탕화는 또래에 비해 키도 크고 담력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골목 병정놀이의 승리를 이끄는 꾀주머니였다.

그 당시 골목에서 어울려 놀던 친구들이 주원장, 서달, 주덕흥 등이었다.

이들 중 주원장은 탕화보다 3살이나 어렸지만 타고난 기개와 리더십이 돋보였다.

자연히 아이들은 주원장을 중심으로 뭉쳤다.

 

지독히도 가난한 시기였다. 가뭄과 기근 그리고 역병이 돌아 마을은 줄초상판이 되었다.

특히 주원장의 집안은 연이어 부모, 형제가 죽어 주원장은 졸지에 천애 고아가 되었다.

 

아이들은 먹을 것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았다. 밥을 먹을 수만 있다면 온갖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번은 아이들이 목축을 하는 부잣집에서 목동을 하며 먹고 자는 일을 해결했다.

탕화, 주원장, 서달, 주덕흥 등은 어린 송아지를 몰고 풀을 먹이는 등 온 종일 일을 했지만 겨우 밥 한 덩이를 손에 쥘 수 있었다.

너무나 배가 고팠던 아이들은 그만 송아지를 잡아 먹고 말았다. 배가 부르자 걱정이 밀려왔다. 이때 주원장이 나섰다.

그는 목장 주인에게 “송아지가 갑자기 땅을 파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땅 속에 몸통을 숨기고 꼬리만 살짝 땅위로 내놨습니다.”

목장주인은 노발대발하며 아이들을 흠씬 두들겨 패고 쫓아냈다.

하지만 탕화를 비롯한 아이들은 주원장의 대담함에 감동했다.

 

▶탕화, 주원장에게 하늘이 내린 기회를 잡게 하다

 

주원장은 어느날 “중이나 되겠다”고 황각사로 들어갔다. 하지만 절이라고 기근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시주 하나 들어오지 않는 절에서 나온 주원장은 탁발을 하며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이 시기 탕화는 주원장과 헤어진 후, 큰 세력을 이룬 홍건적 중에서도 각광받는 엘리트인 곽자흥의 부대에 또래 장정 10여 명을 이끌고 들어갔다.

이때가 1352년으로 탕화의 나이 27세 때이다. 곽자흥은 탕화를 군관급인 ‘천호 千戶’에 임명했다.

탕화는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작은 규모의 전투에서 지략을 발휘해 이내 곽자흥의 정예부대를 지휘하는 장교로 승진했다.

탕화는 고향 골목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을 잊지 못했다. 특히 주원장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는 편지를 썼다.

주원장은 탕화의 편지를 받고 곽자흥 군에 자원했다.

곽자흥은 주원장의 외모부터 마음씨 그리고 배포를 아끼고 좋아했다.

자신의 양딸인 마 씨를 주원장과 짝을 지어 줄 정도였다.

주원장은 탕화를 중심으로 서달, 주덕흥 등의 측근을 거느리는 부대장이 되었다. 몇 년 후 주원장은 곽자흥 부대의 2인자가 되었다.

 

1355년 곽자흥이 병사했다.

탕화는 주원장에게 ‘하늘이 주신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군사들을 모아 주원장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홍건적 군은 진우량, 주원장, 장사성 등의 부대로 분열되었다.

주원장은 인재를 모았다. 이때 영입된 이가 이선장으로 그는 회서파의 절대 지지를 받고 있는, 능력이 탁월한 관리였다.

 

물론 주원장의 급부상을 견제하는 세력도 형성됐다.

그들은 원래부터 곽자흥의 부하들로, 굴러온 돌인 주원장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은 동년배인 주원장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지만 사실은 불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탕화만은 비록 자신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공사석을 막론하고 주원장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이러한 탕화의 태도에 다른 장수들도 점차 주원장에게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주원장은 자신에게 심복하는 탕화의 태도를 항상 고맙게 생각했다.

 

한번은 주원장이 탕화와 술을 마셨다. 주원장은 취한 탕화를 자신의 침상에서 재웠다.

아침에 일어난 탕화는 왕의 침대 같은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황급히 자리에서 내려와 주원장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처분을 기다렸다.

평소 ‘탕화의 충성심’을 시험해보고자 했던 주원장은 그 겸손한 태도에 크게 만족하며 더욱 신임하게 되었다.

이후 주원장은 어릴 때부터 같은 골목에서 자란 서달, 탕화, 주덕흥 외에 이선장과 학자 유기를 영입해 막강한 세력을 형성했다.

 

주원장은 곽자흥의 세력을 흡수하고 진우량, 장사성과 패권을 놓고 일대 격전을 벌였다.

전투는 수 년간 계속되었다. 탕화는 주원장 군대의 돌격대장으로 활약했다.

특히 진야선과의 전투에서는 다리에 화살을 맞았지만 이내 화살을 뽑아내고 공격해 진야선을 오히려 사로잡았다.

이 공로로 탕화는 통군원수가 되었다.

또한 장사성 군대의 습격을 막아내는 전투에서는 날아온 석포에 팔을 다쳤을 정도로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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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청의 서막, 공신의 공로보다 더 큰 것은 황권과 백성의 안위

 

명나라를 건국했지만 주원장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북으로는 여진과 몽고, 서쪽으로는 티벳, 남쪽으로는 안남, 바다 건너 왜국이 호시탐탐 명나라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중원은 홍건적의 잔당과 각 군벌의 세력이 남아 있었다.

 

탕화는 일 년에 열 달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부장군 요영충과 같이 진우정 정벌에 나섰고 서달, 풍승과 함께 하중을 함락시켰으며 여진족을 공격해 국경 밖으로 멀리 쫓아냈다.

이러한 공로로 탕화는 영록대부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서달, 이문충, 풍승 등과 함께 몽고와 여진의 마지막 세력을 토벌해 명나라의 우환을 덜었다.

 

1368년, 주원장은 비로소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

남경을 도읍지로 정한 주원장은 명나라를 유방의 한漢나라 정통성을 잇는 국가라 선언하고 백성들을 이민족과 구분지어 ‘한족 漢族’이라 부르며 유학을 숭상했다.

그리고 그는 성군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지독하게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에서 황제가 된 주원장은 본능적으로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혐오했다.

관리들의 횡포로 인해 백성들이 얼마나 모진 고초를 겪는지 몸소 체험했기에 주원장은 관리에게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했다.

주원장은 명나라 건국에 공이 많은 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실시했다.

 

1370년, 주원장은 6명을 공작에 임명했다.

이선장, 서달, 상무, 이문충, 풍승, 등우였다. 그리고 28명에게는 한 단계 아래인 후작을 내렸다.

탕화, 주덕흥, 부우덕 등이었다. 탕화는 누가 봐도 억울한 케이스였다.

 

주원장의 고향 친구로 어릴 때부터 고초를 같이 겪었고 곽자흥 부대에 주원장을 입대하게 한 것도 탕화였다.

또한 모든 장군들이 주원장에게 심복하지 않을 때 항상 겸손한 태도로 주원장을 섬겼고 개국 전쟁의 선봉에는 항상 탕화가 있었다.

하지만 탕화는 단 한마디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주원장은 일부러 탕화의 공을 알면서도 등급을 내린 것이다.

탕화에 대한 주원장의 ‘두 번째 충성심 테스트’인 것이다.

탕화의 한결같은 마음을 확인한 주원장은 얼마 후 탕화를 신국공으로 승급시켰다.

 

태조 주원장은 이선장을 좌승상, 서달은 우승상 그리고 이문충을 대도독으로 임명해 행정과 군사를 지휘케 했다.

권력은 좌승상 이선장이 장악했다. 그는 진한시대부터 내려오는 승상제의 권한을 행사했다.

승상은 모든 행정, 사법 그리고 군사에 관한 지휘에 있어 황제를 대신하는 막강한 자리였다.

제갈공명이 그랬고 한나라 유방 시기의 장량과 소하가 그 역할을 담당할 정도로 승상은 항상 황제의 최측근이 임명되었다.

그만큼 황제와 버금가는 중요한 자리였다.

 

당시 군대는 이문충이 총사령관, 즉 지금의 합참의장직을 맡고 있었지만 실제 병력은 부우덕의 여진 공격 부대, 남옥의 몽골 주둔군, 목영의 티벳, 안남 정벌군, 주원장의 아들인 연왕 주체의 북경 주둔군과 탕화의 정예 별동부대가 명나라의 주력군이었다.

 

주원장에게는 모두 26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는 장남인 태자 주표에게 안정된 황권을 물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수도 남경에는 태자를 제외하고는 다른 왕자들은 거주조차 못하게 했다. 모두 외지로 일정 병력을 주어 내보냈다.

권력에 있어서는 혈육도 믿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태자는 유약했다.

잦은 병치레를 하는 태자를 보며 주원장은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측근들의 존재 자체가 부담스러워지지 시작했다.

 

서달, 이선장, 탕화, 이문충, 주덕흥, 풍승, 목영, 남옥 등등 하나 같이 자신과 같이 살벌한 전쟁터를 누빈 백전의 용사들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명나라의 개국 공신이라는 지분과 정예병을 거느린 무서운 존재였다.

만약 이들 중 누구 한 사람이라도 불충한 마음을 먹고 반란을 도모한다면 주원장도 감당하기 쉽지 않을 존재들이었다.

이 맹수같은 장군들에게 둘러싸인 태자의 모습을 상상하며 주원장은 결심을 굳혀갔다. 즉 공신들을 제거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그리고 옛날 한고조 유방의 ‘토사구팽’에서 명분과 연유를 찾았다. ‘팽도 烹道’를 ‘치도 治道(길을 고쳐 닦다)’로 연결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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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동안 무려 10만 명의 학자, 군인, 관료를 숙청하다

 

첫 번째 타깃은 호유용이었다. 그는 명나라 3대 개국 공신 즉 서달, 이선장, 유기의 뒤를 잇는 행정가였다.

또한 이선장의 추천으로 주원장에게 와 홍건적 시절부터 충성을 다한 측근이었다. 호유용은 이선장의 후임으로 승상이 되었다.

호유용은 능란하고 노회한 행정가였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파벌을 형성하고 각종 이권에 개입했다.

관리의 인사를 빌미로 금품을 수수했고 상인들의 경제활동에도 관여해 많은 재산을 축적했다.

게다가 승상이란 지위를 이용해 황제인 주원장에게 올라가는 상소문을 먼저 검열하기도 했다.

 

주원장은 호유용의 이 같은 전횡을 모두 알고 있었다. 황제는 때를 기다렸다.

주원장은 ‘이이제이 以夷制夷’ 수법을 이용했다. 즉 서달과 유기의 질투심을 자극해 호유용을 공격하게 했다.

서달, 유기는 호유용은 물론이고 호유용의 후견인 이선장과는 대척점에서 권력투쟁을 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주원장의 속마음을 읽고 호유용을 탄핵했다. 이 무렵 호유용의 아들이 마차 사고로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들을 잃은 호유용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마부를 죽여버렸다. 이 사건을 보고 받은 주원장은 진노했다.

그는 호유용을 불러 질책했다.

 

“승상은 어찌해 아들의 죽음과 아무런 상관없는 마부를 죽였는가?”

 

“폐하, 제가 돈으로 마부의 죽음을 변상하겠습니다.”

 

“닥쳐라, 목숨을 빼앗았으면 목숨으로 갚아야지, 어찌 돈으로 사람 목숨을 대신할 수 있는가?”

 

호유용은 겁이 났다. 그는 의심 많은 주원장의 성품을 미루어 자신의 위험을 감지했다.

호유용은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차라리 먼저 주원장을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자신의 최측근인 어사대부 진령, 어사중승 도절 등과 모반을 계획했다.

주원장이 파 놓은 함정에 스스로 빠진 것이다.

주원장은 기다렸다는 듯 호유용과 일당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그리고 호유용과 연관되는 모든 사람들을 연좌제로 몰아 몰살시켰다.

이때 죽은 자가 무려 1만5000명에 달했다. 은퇴한 개국공신 이선장의 이름도 호유용의 문서에서 발견됐다.

서달 등은 이선장도 처벌할 것을 주장했지만 주원장은 “이선장이 공이 많고 연로하니 없던 일로 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주원장의 공포 정치는 계속되었다. 다음 희생자는 요영충이었다.

그는 파양호 전투의 영웅으로 명나라 개국의 절대 공신이었다.

그의 죽음의 이유는 오직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용과 봉황 무늬의 옷을 입었다는 것이었다.

주원장은 호유용 사건의 재조사를 지시했다. 이번에는 이선장도 피해갈 수 없었다. 그의 조카가 연루된 것이 드러났다.

주원장은 다시 한 번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무려 1만3000명이 죽었다. 이선장은 자결했고 일가족 70여 명도 모두 죽고 말았다.

 

주원장의 광기는 더욱 폭발했다. 그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부하들을 죽였다.

상소문에 중을 뜻하는 ‘승 僧’, 대머리를 빗대는 ‘광 光’, ‘도둑 盜 도둑 賊’이 들어있다는 이유로 학자, 사간, 대신들이 죽어나갔다.

이는 모두 주원장의 콤플렉스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의 외모나 황각사 시절 탁발승으로 연명했던 것, 도적 무리인 홍건적에 가입했던 일을 떠올리게 하는 그 어떤 문장과 글자도 용납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혈육인 친조카 주문정은 우물에 빠뜨려 죽였다.

교만에 빠져 부녀자를 추행하고 역시 용과 봉황 무늬 옷을 입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고 주문정의 부하들은 팔이나 다리를 잘라 모두 불구로 만들었다.

그리고 주원장이 아끼던 부하인 이문충 역시 독살됐다.

이문충은 주원장이 병권을 맡겼던 최측근이었지만 학자그룹을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다.

 

주원장의 숙청은 멈추지 않았다. 최고의 측근이자 고향 친구인 서달마저 가만 두지 않았다.

서달은 주원장이 소개한 사재홍의 딸과 결혼했다.

그런데 사재홍은 주원장이 서달하고만 혼사를 논하고 자신의 뜻은 묻지도 않은채 결혼을 성사시킨 것에 불만을 품었고 끝내 서달과 자신의 딸이 결혼하자 지방으로 내려가 버렸다.

 

주원장은 이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어느 날, 연회장에서 주원장은 서달의 처가 마황후에게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서달의 처는 “이렇게 좋은 황궁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집도 이렇게 만들면 좋겠는데.”

며칠 후 주원장은 서달을 불러 연회를 베풀었다. 그리고 연회 중간에 무사를 보내 서달의 처를 죽였다.

그리고 이를 서달에게 알렸다. 서달은 참담함을 금치 못했지만 당장 불만을 토로할 수 없었다. 주원장은 서달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너의 처는 믿을 수 없다. 지 애비랑 똑같은 성품이다.”

 

사단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서달은 전쟁터에서 입은 종기로 고생하고 있었다. 술과 오리 고기는 금물이었다.

어느 날, 부인을 잃고 집에서 칩거 중인 서달에게 주원장은 술과 오리 고기를 하사했다. 이를 앞에 놓고 서달은 목놓아 울었다.

“황제께서는 내가 죽기를 바라는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서달은 술과 오리 고기를 먹고 그 독으로 죽고 말았다.

 

1392년, 주원장이 아끼던 태자 주표가 40세의 나이에 죽었다.

주원장은 태자의 아들을 황세손으로 임명하고 자신의 뒤를 잇게 했다.

어린 황세손을 보면서 주원장의 두려움과 광기는 더욱 커졌다. 고향 친구인 주덕흥이 죽었다.

그리고 부우덕 역시 비참하게 죽었다. 주원장은 부우덕에게 아들 두 명의 목을 베라고 명령했고 부우덕은 집으로 가 아들 두 명의 목을 들고 왔다.

그리곤 깜짝 놀란 주원장에게 욕과 저주를 퍼붓고는 단검을 빼 자신의 목을 찔렀다.

화가 난 주원장은 부우덕 일가를 모조리 죽였다. 33년간 주원장에게 충성을 다한 장수의 최후는 비극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명장 풍승 그리고 주원장이 자랑하던 장군 남옥도 피의 숙청을 당했다.

그가 죽을 때도 역시 연좌제로 인해 무려 2만 명이 몰살당했다.

역사는 호유용과 남옥의 옥사를 함께 ‘호람의 옥’으로 부른다.

이 사건으로 명나라는 조정의 관료조직이 마비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주원장은 대규모 숙청이 마무리되자 관료 제도를 개편했다.

무려 1600년 전통의 승상제를 폐지하고 육부를 직접 지휘했다.

또한 군사권 역시 대도독을 폐지하고 군대를 5부로 나누어 서로 견제를 시키면서 5부의 수장을 자신이 직접 지휘했다.

이 같은 주원장의 피의 숙청으로 명나라에는 쓸 만한 대신, 장군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탕화, 목영, 유기 정도였다.

그러나 목영은 안남 등 지방에 근무하는 통에 주원장의 숙청에서 벗어나 있었고 유기는 은퇴해 고향에 있었지만 실상은 유배당한 처지였다.

 

주원장 곁에는 탕화 혼자만이 남아 있었다. 탕화는 불안했다.

그는 자신과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 묘수를 생각해냈다. 그것은 바로 ‘버리고, 내려놓고, 떠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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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세학 1 | ‘버리고, 내려놓고, 떠나라’

 

주원장의 피의 숙청 이후 주원장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이는 탕화만이 남았다. 탕화는 결심을 굳혔다.

 

“폐하, 신이 그동안 폐하를 모시고 전쟁터를 누빈지 수십 년, 이제 태평성대를 맞이했습니다. 신도 이제는 나이가 들어 더 이상 군대를 지휘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시골로 내려가 묘 자리나 찾아보면서 죽을 때를 기다리게 윤허해 주십시오.”

 

주원장은 탕화의 진심어린 청에 마음이 움직였다. 바로 허락하고 집터는 물론 집을 지을 수 있는 돈도 하사했다.

그러면서 1년에 한 번은 남경으로 올라와 문안인사를 올리라 명령했다.

주원장은 다른 측근에 비해 유독 탕화에 대해서는 호감을 갖고 있었다.

홍건적 시절부터 다른 장수들은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선장마저 세를 쫓아 곽자흥에게 몸을 의탁했다 돌아왔지만 탕화는 한결같이 곁을 지킨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모든 공신들이 죽고 난 후 탕화만이 군대를 이끄는 유일한 원로였다.

사실 주원장은 탕화의 처리를 놓고 고민중이었다. 결국 죽이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는 순간, 탕화가 먼저 은퇴를 청한 것이다.

주원장 입장에서는 하나 밖에 남지 않은 공신의 피를 손에 묻히지 않아도 되는 것과, 또한 먼저 탕화가 은퇴를 청함으로써 조정에 남은 원로들이 탕화를 따라 은퇴할 명분을 준 것이 마음에 들었다.

 

탕화는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항상 조심했다. 주원장이 파견한 감시병들이 지켜보기 때문이었다.

개국공신이라 자랑하지도 않았고 자손과 심지어 노비들도 단속해 거만하고 불손한 행동을 삼가했다.

특히 정사에 관여하는 행동이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방관의 초청에도 응하지 않았고 어쩌다 자리를 같이해도 정치나 황제에 대해서는 일절 모르쇠로 일관했다.

첩들에게는 돈을 주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저 하루 종일 술을 마시거나 바둑을 두면서 산책을 하는 것이 탕화의 하루 일과 전부였다.

주원장은 감시병을 통해 탕화의 이 같은 행동을 모두 보고 받고 있었다.

 

이 무렵 왜구의 잦은 침범으로 명나라 해안이 시끄러웠다.

주원장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장군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탕화에게 이를 방비할 계책을 세우라 지시했다.

탕화는 방명겸과 함께 방안을 마련했다.

그는 면밀히 검토한 후에 3만5000명의 장병을 선발해 모두 59개에 이르는 성과 방어소를 해안가에 설치했다.

성을 쌓는 과정에서 무리가 생기자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했다.

 

“백성들의 원망이 많습니다.”

 

주변의 이런 간언에 대한 탕화의 입장은 단호했다.

 

“국가의 대사를 이루는 자는 원망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또한 세세한 수고로움은 돌아보지 않는 법이다. 이후 다시 국가의 대사와 나를 원망하는 자가 있으면, 내 칼 앞에 와서 얘기해보라.”

 

이후 모든 불만은 잠잠해졌고 성은 완성되어 왜구의 침범에 대비할 수 있었다.

주원장은 탕화를 불러 치하하고 황금과 비단을 주고 탕화의 부인 호 씨에게도 같은 상을 내렸다.

탕화는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 이후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성을 쌓고 병력을 지휘한 공적은 한마디도 내비치지 않았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주원장은 탕화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1390년 탕화는 병에 걸렸다. 후유증으로 그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주원장은 탕화를 불러 위로하고 돌려보냈다. 1394년 탕화가 새해 인사차 주원장을 찾았다.

주원장은 병들고 말도 하지 못하는 탕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어릴 때부터 같이 어울리던 고향 친구를 보고 주원장도 문득 많은 추억이 떠오른 것이다.

탕화는 그저 머리만 조아렸다. 주원장은 유일하게 한 명 남은 측근의 노쇠한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주원장은 집으로 돌아간 탕화에게 ‘동구왕’이라는 왕위를 내리고 탕화의 치적을 치하했다.

1395년 탕화는 70세에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탕화는 침묵, 버림, 무관심의 처세로 그는 물론 가문도 보존할 수 있었다.

주원장 등극 후 주원장이 죽을 때까지 약 30년 동안 무려 10만 명에 달하는 대신, 학자, 장군 등이 숙청을 당해 죽었지만 탕화만은 그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처세학 2. | 공을 다투거나 내세우지 말라

 

탕화는 주원장의 가신이었지만 빛나는 존재는 아니었다.

무공에서는 서달, 남옥, 이문충에 비해 떨어졌고 행정에서는 이선장, 유기, 호유용을 따라갈 수 없었다.

하지만 탕화는 홍건적에 가담했을 때도, 몇 년에 걸친 격렬한 전투 끝에 중원의 패권을 차지했을 때도, 항상 주원장의 옆에 있었다.

이는 주원장이 빛나는 순간도 같이 했지만 주원장이 감추고 싶은 비루하고 참담했던 시절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주원장 같이 질투심 많고, 이기적이며, 의심 많은 1인자의 뒷면을 알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입이 무겁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것이 생존의 필요 조건이다. 그런 면에서 탕화는 완벽한 처신을 했다.

 

주원장이 논공행상을 할 때 탕화는 당연히 1등 작위인 공작에 봉해질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탕화는 한 등급 아래인 후에 봉해졌다.

그러면서 주원장은 탕화가 반란군 진우정의 아들 두 명을 놓아주는 바람에 8개 군이 동요했고, 그 소요를 진압하느라 군대가 동원된 이유로 들어 탕화의 작위를 낮추었다며 공개 비판했다.

이때 탕화는 머리를 숙이고 주원장에게 용서를 빌었다.

 

이는 주원장이 일부러 탕화를 야단친 것으로 개국공신들에게 ‘일종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공신들에게는 엄청난 재물과 권한이 주어졌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많은 혜택과 권리에는 지켜야 할 책무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공을 내세우지 않고, 오만하고 거만하게 백성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더 이상의 많은 재물과 권리를 탐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본능은 그렇지 않다. 내가 더 공을 세웠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내가 더 많이 누리고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마음 속에서 고개를 드는 순간 인간은 방심하게 된다. 방심은 과신을 낳고, 과신은 판단을 흐리게 한다.

축첩을 하고, 파벌을 형성하고, 토지에 욕심내고, 관직을 끝까지 부여잡고 내려놓지 못하게 만든다.

심지어 용과 봉황 무늬가 있는 옷을 입는 과욕을 부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1등 공신인데’, ‘내 휘하에 20만 대군이 있는데’, ‘나는 황제의 고향 친구인데’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투덜거리고 불평을 늘어놓게 된다.

그 순간 목에 칼이 들어오는 것이다.

 

탕화는 영리했다.

그는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았고, 관리들과 파벌을 형성하거나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고, 겸손했으며, 자손들에게도 항상 검소한 생활을 요구했다.

무엇보다 주원장의 속내를 읽고 먼저 관직을 내놓으면서 주원장의 손을 가볍게 해주었다.

또한 왜구 침범에 대비한 59개의 성을 쌓는 공을 세우고도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는’ 처세의 기본을 보여주었다.

 

물론 탕화도 결점은 있었다. 술이 과했고 그로 인해 주원장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탕화가 상주 지역을 관장할 때 매일 술을 먹고 황제에게 조그만 선물을 달라고 투정을 부린 것은 탕화의 고도의 처세술이었다.

‘술이나 즐기고, 작은 것에 욕심을 부리는 배짱이 작은 인간’이라는 인식을 황제에게 심어줌으로써 주원장의 ‘데스노트’에서 제일 마지막 순위로 밀리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자신의 차례가 오자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초강수를 둠으로써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주원장의 기라성 같은 명장, 명신들 중 그야말로 이부자리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은 자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중에서 제후에서 공으로 승급하고 이후 왕위를 받은 이는 탕화가 유일하다.

그 비결은 의외로 간단하다. 흔히 쓰는 말로 ‘나대지 말고 작은 권력과 부귀를 던져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더 큰 보상인 왕위를 받고 진짜 소중한 목숨을 보존한 방법인 것이다.

사실 이런 처세는 명나라의 주원장뿐이 아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1인자 앞에서 취해야 할 ‘1인자가 아닌 자’들의 행동강령 제1조일 것이다.

 

▷직장은 보이지 않는 칸막이 투성이다

 

B과장은 한때 구름 위를 걷고 있었다.

하는 일마다 목표 달성 200%요, 제안하는 기획안마다 임원들의 관심과 칭찬 일색이다.

회사 일에 항상 의욕적이고 적극성으로 임해 상무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1년 전만 해도 일어나기도 싫던 출근길이 마치 주단을 깔아놓은 길 같다.

부서원들의 부러운 눈총을 받는 일도 이제는 흔한 일이 되어 버렸고 직속상관인 부장이 슬금슬금 자신의 눈치와 컨디션을 살피는 행동도 회사 생활의 또 다른 즐거움이 되었다.

하지만 B과장은 자신도 모르게 회사의 룰과 상하관계의 묵계를 어기는 일이 잦아졌다.

모든 직장동료들의 시선이 부러움에서 점차 감시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혼자만 모르고 있었다.

 

B과장은 하루에도 몇 번씩 상무의 호출을 받았다.

상무에게 기획안을 설명하고 진행을 보고하면서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결재서류를 자연스럽게 내밀게 되었다.

상무도 별 이견 없이 결재를 했고 칭찬과 격려의 말도 잊지 않았다.

B과장은 결재 서류를 부장에게 제출했다. 부장은 몹시 불쾌했다. 자신의 결재란은 비어있고 바로 위에 상무의 결재가 되어 있었다.

부장은 “아니, 나를 건너뛰고 직접 위를 상대하겠다고. 좋다. 두고 보자” 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물론 부장은 노련하게 이런 내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처음에는 B과장도 부장이 마음에 걸렸지만 몇 번 반복되면서 당연하게 상무에게 직접 보고하고, 결재 받는 시스템으로 일을 진행했다.

 

B과장은 부원들을 소집해 회의를 진행했다. 물론 부장 공석 시 차석인 차장이 진행할 일이었다.

하지만 B과장은 많은 일을 추진하면서 효율성을 위해 부장과 차장에게 허락을 받는 절차를 생략했다.

그렇게 1년 여가 지났다. B과장의 승진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승진 누락이었다.

충격을 받은 B과장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번에도 부장을 제치고 상무에게 뛰어올라가 불만을 털어놓았다.

상무는 의례적인 말만 되풀이 했다.

 

“글쎄, 나도 신경을 썼는데… 담당 부장이 승진 대상자에서 아예 누락을 시키니, 나도 어쩔 수가 없었네. 실적도 좋지만 잘 좀 지내지 그랬어.”

 

B과장은 즉시 부장에게 달려갔다.

 

“내가 무슨 힘이 있나. 자네가 어디 내 부서 사람인가. 상무님 직속인데, 거기 가서 말하게. 나는 모르겠네.”

 

회사는 보수적인 집단이다.

진취적이고 트렌디한 가치를 추구하며 이익을 최고의 선과 목적으로 여기는 집단이지만 운용에 있어서는 보수적이라는 뜻이다.

상무는 위계질서를 어기는 B과장의 결재방식을 용납한 것이 아니었다.

상무 입장에서는 빠르게 추진하는 일에 있어 예외적인 몇 번의 결재만 했을 뿐이었다.

상무는 노련한 직장인이다.

B과장과 상무가 결재한 서류에 만약에 담당 부장과 차장의 결재가 빠져있다면?

혹시 이 결재로 인해 사고가 터지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B과장과 상무의 몫인 것이다. B과장은 너무 순진했던 것이다.

회의도 마찬가지다. 부장과 차장의 허락이 없는 회의에서 B과장의 전결로 이루어진 프로젝트의 책임 역시 모두 B과장의 몫이 된 것이다.

 

회사의 일은 성공과 실패의 확률 게임이다.

경천동지할 대단한 성공도 없고, 회사를 들어먹을 만한 실패도 사실 과장 선에서 이뤄지는 게임은 아닌 것이다.

B과장은 약간의 성취, 약간의 실적, 약간의 칭찬에 흥분해 당연히 지켜야 할 룰을 위반 한 것이다.

직장은 아무리 개방적인 회사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칸막이가 있는 것이다.

 

최첨단 오피스 빌딩을 가보라.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 회사의 보이지 않는 그 칸막이를 실감하게 된다.

2층에서 3층으로 즉 다른 층, 다른 사무실로의 이동이 허락되지 않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

좀 과장되게 이야기하면 ‘다른 곳, 다른 사람, 다른 업무에 신경쓰지 말고 네 할 일만 열심히 하라’는 뜻이다.

이 칸막이는 단순히 공간의 제약이 아닌 직급, 부서, 업무 등 모든 것에 인위적으로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 칸막이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것, 어쩌면 사회적 문제인 유리천장을 깨뜨리는 것보다 더 힘든 일임을 알아야 한다.

직장은 아무에게도 ‘나대고 다니는’ 권한을 주지 않는다.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 사진 pixabay.com자료제공 Citylife
발행일 2016.06.30기사입력 201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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