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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6월 초부터 악성 종기 때문에 앓기 시작한 정조는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의원들이 온갖 처방을 써봤지만 모두 허사. 6월 28일 삼복더위 속에 거의 한 달간 투병하던 정조는 결국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했다.

49세 개혁군주 정조(1752~1800년)의 승하로 그의 개혁정치는 미완성 작품으로 남겨진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후 조선은 개혁정치가 후퇴하고 세도정치가 막을 올렸다.

 

정조는 1798년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자처하면서 자신을 밝은 달과 같은 존재에 비유했다.

자신의 교화가 모든 신하와 백성에게 미치게 하겠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정조는 만천명월주인옹 서문을 스스로 짓고, 이 글을 신하들로 하여금 각기 베껴 써 궁중 곳곳에 내붙이도록 했다.

현재 창덕궁 후원 존덕정(尊德亭)에는 당시 내걸었던 현판이 아직도 걸려 있다.

그만큼 국왕의 초월적인 권위를 강조했다.

정조는 자신이 쓰는 인장(印章)에까지 만천명월주인옹을 새길 만큼 이 용어에 대한 애착이 컸다.

 

정조는 누구보다 활동이 왕성한 왕이었다.

100책의 개인 문집 ‘홍재전서’를 포함해 재위 기간 동안 총 151종, 3960권에 달하는 책을 편찬한 것은 정조의 활동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정조실록’과 2009년에 발견된 정조의 편지 모음집 ‘정조어찰첩’에는 정조가 거의 매일 일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격무에 매달렸음이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일이 바빠 잠깐의 틈도 내기 어렵다.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오시(午時)가 지나서야 비로소 밥을 먹으니, 피로하고 노둔해진 정력이 날이 갈수록 소모될 뿐이다.” (1798년 10월 7일)

 

이 편지를 보면 정조는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새벽까지 공무 처리에 집착했음이 나타난다.

시간을 쪼개 자신이 관리하는 인사에게 편지를 보냈으며, 왕가 친척에게도 편지를 보내 자신의 입장을 전했다.

 

화성(華城) 건설이나 행차에서도 나타났듯 정조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개혁정치를 완성코자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정조는 왕세자인 순조의 배필로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고, 1804년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화성에서 노후를 보낼 계획을 갖고 있었다.

 

1800년 5월 사도세자 추숭 작업을 진행하면서 이시수 등 소론 위주 인사를 요직에 등용했지만 노론뿐 아니라 측근 관료의 강한 반발을 샀다.

자신이 구상한 탕평정치가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한 정조의 말년은 안 그래도 건강이 좋지 않은 정조를 더욱 힘들게 했다.

1800년 윤 4월 19일에는 “황인기와 김이수가 과연 어떤 놈들이기에 감히 주둥아리를 놀리는가?”라며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관리를 비판했다.

 

급기야 1800년 5월 그믐날 정조는 조정 신하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인사 방침을 천명하면서 추종을 강하게 요구했다.

이를 “오회연교(五晦筵敎·오월 그믐날 경연에서의 교시)”라고 한다.

이 자리에서 정조는 신하들 태도를 ‘습속(習俗·전통적인 사회적 관습)’이라 비판하면서 이를 즉각 바로잡아 시정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정조의 강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은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정조의 정치적, 심리적 부담은 더욱 커져 갔다.

 

무엇보다 말년의 정조를 가장 괴롭힌 것은 건강이었다.

세종이 여러 질환으로 고생했던 상황과 유사하다.

정조는 편지 등에서 고백했듯 다혈질의 소유자였고, 정조 후반 정국 상황이 얽힐 때마다 이런 기질이 더욱 건강을 악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사망 7년 전부터 머리에 난 부스럼 때문에 속이 답답하고, 때로는 밤잠을 설치며 두통을 앓는 등 갖은 고생을 했다.

치료를 위해 부스럼에 약을 붙이거나 자신의 요구에 따라 침을 놔 병종을 다스렸다.

그럼에도 건강에 대한 적신호는 계속됐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는 정조의 건강 문제가 끊임없이 기록돼 있다.

 

정조의 병은 복합적이었고, 사망하기 수년 전부터 그의 병세는 호전과 악화가 반복됐다.

이런 기록을 종합해보면 정조의 사망은 갑작스럽게 온 것이 아니라, 병적일 정도로 일에 집착을 보이는 성격, 격무와 과로, 다혈질의 성격, 잦은 병치레의 축적 등이 종합된 결과로 보인다.

 

1800년 6월 28일 정조의 병세가 점차 악화돼 오전 중 혼수상태에 빠졌다.

어머니인 혜경궁과 세자, 대비 정순왕후가 다녀갔지만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온 대소 신료와 백성의 애도 속에 오후 6시경 승하했다.

 

최근 정조의 독살설에 근거한 소설과 영화 등이 등장한 적이 있지만, 정조의 죽음 직후에도 독살 의혹은 없지 않았다.

독살설은 주로 남인 사이에서 유포됐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남인 정약용(1762~1836년)은 ‘기고금도장씨여자사(紀古今島張氏女子事)’와 같은 글에서 정조의 사인과 관련해 독살설을 언급했다.

독살설이 유포된 결정적인 이유는 정조의 사망 이후 전개된 정치적 파란과 세도정치의 전개로 개혁정치의 성과가 훼손됐다는 점이다.

정조 사후 전개된 파행적인 정국 운영에 대한 아쉬움이 독살설로 이어진 것이다.

독살설이 남인 세력으로부터 주로 유포된 것도 정조 승하 이후 노론벽파 세력이 권력을 잡으면서 남인이 천주교 박해 사건 등에 연루돼 엄청난 정치적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공식 기록, 정조가 직접 쓴 편지를 통해 나타나 있듯 정조는 오랫동안 지병을 앓았다.

역의(逆醫)로 몰렸던 심인이라는 인물이 연훈방(烟熏方)을 써서 수은 중독에 이르게 했다는 처방 역시 정조가 직접 요구한 처방이었음을 고려하면 독살설 근거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더욱이 정조는 스스로 조제와 처방을 지시할 정도로 의학 지식이 풍부했던 왕이었다.

 

잠시라도 쉬지 않는 부지런함과 100책의 저술을 낼 만큼 학문 연구를 좋아했던 왕, 여기에 기존 보수 세력을 대신해 남인이나 서얼까지 파격적으로 등용한 개혁군주.

여러 측면에서 정조는 조선 전기 세종처럼 군주가 지녀야 할 덕목을 대부분 갖추고 있었다.

기대대로 정조 재임 기간 동안 조선은 정치, 경제, 문화 사업을 부흥시켰다.

초기에는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 위협까지 받았지만 점차 지원 세력을 늘리고 백성과 소통하는 정치력을 발휘하면서 난국을 헤쳐 나갔다.

그럼에도 그를 위협하는 병마가 찾아오면서 정조의 개혁 정책은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정조가 사망하던 해인 1800년, 정조는 자신이 후원했던 측근 신하의 지원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이런 상황에서 정조는 왕세자인 순조의 세자빈 간택에 들어갔다.

정조가 선택한 인물은 시파의 중심이었던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 말년에 정조는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자 왕권 강화를 위한 타계책을 외척과의 연결에서 찾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조의 급서로 세자빈 간택은 무기한 연기됐고, 세자빈도 교체될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순조 즉위 후 정조의 유지를 계승해야 한다는 여론이 득세하면서 김조순의 딸은 세자빈이 아닌 왕비(순원왕후)의 자리에 올랐다.

순원왕후의 왕비 간택이 이후 안동 김씨 세도정치 60년의 시작을 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세도정치의 전개에 정조의 책임도 일정 부분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49세 개혁군주 정조의 죽음으로 그가 추구했던 개혁정치는 미완성에 그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의 사후 개혁정치는 후퇴하고 세도정치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개혁의 싹이 움트기도 전에 뿌리 뽑히는 세도정치가 다가옴을 알았더라면 정조는 지하에서도 차마 눈을 감지 못하지 않았을까.

 

정조 승하 이후 시작된 19세기 조선은 비정상적인 정치가 자리 잡는 불운의 시기였다.

권력이 특정 가문과 소수 세력에 집중되면서 18세기 영·정조 시대에 마련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성과는 계승되지 못했다.

정조에 대한 아쉬움이 더욱 큰 것은 후대의 역사가 정조 시대 개혁정치의 성과를 이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조의 죽음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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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정윤정자료제공 매경이코노미
발행일 2016.07.04기사입력 201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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