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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제독임에도 평생 배멀미에 시달리고 오른쪽 눈과 오른팔을 전투 중에 잃은 호레이쇼 넬슨 제독.

비록 유부녀와의 뜨거운 염문설 등 사생활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영국 국민은 넬슨을 사랑한다.

그것은 그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위기와 좌절을 이겨내고 부하들에게 용기와 임무의 중요성을 불어넣은 그의 리더십이 지금의 영국에 더욱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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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전, 나폴레옹을 패망으로 몰고 간 역사적 전투의 주인공

 

역사는 반복된다. 2016년 6월23일, 영국은 스스로 유럽 대륙에서 이탈했다.

EU(유럽공동체)에서 탈퇴하는 이른바 ‘브렉시트’를 감행한 것이다.

그 결정의 다양한 후유증을 예상하는 불확실성이 지금 영국과 유럽 대륙을 혼란으로 몰아가고 있다.

 

영국의 결정은 한 해에 수십만 명 씩 증가하는 이민자들에게 일자리와 먹을거리를 빼앗긴다는, 그러니 문을 닫아걸고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자’는 자발적 신고립주의이다.

이에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대륙국은 영국에게 ‘이왕 헤어질 거면 빨리 이혼하자’며 영국을 향한 새로운 ‘대륙봉쇄령’도 불사할 태도이다.

영국 정치의 거인이자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 처칠.

그의 ‘하나 된 유럽, 더 이상 서로 전쟁을 하지 않는 유럽’이라는 꿈은 70년 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210년 전인 1806년, 프랑스는 영국과의 모든 통상과 영국함선의 유럽 내 항구 기항을 금지하는 ‘대륙봉쇄령’을 내렸다.

당시 전 유럽을 지배하던 황제 나폴레옹의 영국에 대한 보복이었다.

하지만 이 대륙봉쇄령은 나폴레옹의 패망을 부추기는 기폭제가 되었다.

 

당시 영국은 풍부한 자원보고인 식민지 지배와 산업혁명의 효과로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오히려 피해는 유럽 국가들이 입었다. 대륙봉쇄령의 맨 처음 이탈자는 러시아였다.

나폴레옹은 배신자 러시아를 혼내주기 위해 대군을 휘몰아 러시아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그곳은 ‘동토의 늪’이었다. 나폴레옹 군대는 러시아 군대의 초토화 작전과 강추위라는 두 가지 적에게 무릎을 꿇었고 결국 나폴레옹의 원대한 전 유럽 지배의 꿈은 그가 코르시카 섬으로 유배되면서 종말을 고했다.

 

나폴레옹은 왜 대륙봉쇄령이라는 무리한 전략적 선택을 강행했을까?

그것은 대륙봉쇄령을 내리기 한 해 전인 1805년 10월21일 스페인 연안 트라팔가에서의 해전이 원인이다.

전 유럽을 석권하고 마지막 남은 영국을 정복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출동시켰다.

33척의 거대 함대는 영국 함대 27척과 마주했다. 결과는 연합 함대의 대참패. 무려 20척이 침몰, 나포되었다.

상대적으로 영국 함대는 단 한 척의 손상도 없었다.

 

역사가들은 이 해전을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살라미스 해전, 칼레 해전과 더불어 세계 4대 해전으로 평가했다.

이 해전으로 제해권을 상실한 나폴레옹이 결국 영국을 고립시키려는 무리한 대륙봉쇄령을 발동했고 이것이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연결된 것이다.

 

 

▶영국인의 기상과 의지의 상징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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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초상화 ©Lemuel Francis Abbott 캔버스에 유화 63.5×76.2 by wikimedia


영국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단 한 척의 배도 잃지 않았지만 대신 위대한 영웅을 잃었다.

바로 이 해전을 지휘한 해군 제독 허레이쇼 넬슨이다.

전투의 승전보와 넬슨의 전사 보고를 함께 받은 영국 국왕 조지 3세는 “우리는 대승을 거뒀지만 얻은 것보다 잃은 게 훨씬 크다”며 넬슨의 죽음을 비통해했다.

 

넬슨 제독, 그는 영국이 낳은 위대한 해군 전사이며 위기의 순간을 승리로 이끌어내는 탁월한 리더였다.

영국민은 영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설문 조사에서 넬슨을 9위로 선정했다.

 

그의 동상은 지금도 런던 한복판에 서있다.

트라팔가 광장에 들어서면 55m 높이의 돌기둥 위에 넬슨이 청동사자 4마리를 거느리고 늠름하게 서서 영국인의 기상과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넬슨은 서양사에서 해군 제독의 상징으로 되어 있다.

더구나 이 트라팔가 해전 이후 영국은 약 100년간 전 대양을 지배하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되었다.

 

넬슨에 대해서는 많은 평가가 따른다. 해군 제독으로서 그의 위대함에는 이견이 없으나 개인적인 사생활에서 그는 결점이 많았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넬슨의 영웅적 행동과 대담한 전략이 높게 평가받고 있는 것은 그가 단점보다 장점이 많았던 리더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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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팔을 잃고도 좌절하지 않는 강한 정신력

 

넬슨은 1758년 9월29일, 영국 노포크 버넘에서 11남매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귀족 출신이었지만 가난했다. 아버지는 목사였고 어머니는 항상 많은 식구들의 끼니 걱정을 해야 했다.

넬슨은 병으로 많은 형제를 잃었고 결국 9세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 같은 환경으로 넬슨은 감정적으로 격해지는 성격이었고 또한 강인한 여성을 선호하게 되었다.

 

성장기 넬슨은 가난 때문에 학교를 중도에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함장인 외삼촌 모리스 서클링의 권유로 해군에 입대한다.

이때가 1770년으로, 그가 불과 12세 때이다.

넬슨은 외삼촌이 지휘하는 배에서 키잡이로 선원생활을 시작했고 얼마 후 정식으로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불과 21세의 나이에 프랑스에서 나포한 프리깃함 힌친브로크호를 지휘하는 최연소 함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넬슨은 주로 서인도제도와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했다.

 

1780년 중남미에서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넬슨은 평소의 성실함과 열정을 인정받아 징계를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 넬슨은 말라리아에 걸린다. 사경을 헤맨 끝에 겨우 안정을 찾았지만 영국으로 돌아와 1년 간 요양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복귀한 넬슨은 상관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곤경에 처한 자신을 도와준 존 허버트의 조카 프렌시스 나즈벳을 만난다.

나즈벳은 넬슨보다 2살 연상의 미망인이었다. 하지만 넬슨은 개의치 않고 나즈벳과 2년의 연애 끝에 카리브해 인근에서 결혼한다.

 

넬슨의 군 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명문가 출신이라는 이른바 ‘뒷배’가 없던 넬슨은 공적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았다.

급여가 깎이기도 했고, 지휘권을 잃기도 했지만 넬슨은 꾸준히 해군 장교로서의 경력을 쌓아 나갔다.

그리고 1794년 넬슨에게는 잊을 수 없는 전투가 벌어진다.

코르시카섬 인근의 칼비 전투를 지휘하던 넬슨은 승전했지만 오른쪽 눈을 잃었다. 이후 넬슨에게는 ‘애꾸눈’이라는 별명이 붙는다.

 

넬슨의 불행은 이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1797년 넬슨은 성 빈센트 해전에서 적의 함선에 직접 오르는 육박전을 감행해 승전을 이끌어 기사 서훈을 받았다.

하지만 테세우스호를 지휘하던 넬슨은 산타 크루즈에서 오른팔에 적탄을 맞는다. 팔이 썩어 들어가자 의사는 ‘살기 위해’ 오른팔 절단을 권했다.

넬슨은 오른팔을 잘라냈다. 이제 그는 오른쪽 눈과 오른팔이 없는 불구의 선장이 되었다.

넬슨의 좌절은 컸다. 그는 “나는 이제 끝났다”라고 자신의 일기에 당시 심경을 피력했다.

 

신체의 불구가 넬슨을 일시적으로 좌절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의 불같은 의지를 무릎 꿇릴 수는 없었다.

그는 다시 복귀했다. 당시 프랑스를 지배하던 나폴레옹은 원대한 전략을 수립했다.

우선 영국을 정복하기 위해 영국의 자원보고인 인도를 점령하기로 한다.

그러기 위해 징검다리격인 이집트 정벌에 나선다. 넬슨은 지중해에서 함대를 지휘했다.

 

넬슨은 툴롱에서 출항을 준비 중인 프랑스 함대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이 프랑스 함대가 이탈리아를 목표로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툴롱 항구 공격 직전 태풍이 불어 넬슨은 프랑스 함대를 놓치고 만다.

넬슨의 부관들은 함대를 항구에 정박하고 새로운 정보,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자고 권유하지만 넬슨은 듣지 않는다.

 

그는 지중해를 그야말로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니는 탐색작전을 펼친다. 함대는 몇 달째 바다에 머물렀다.

이런 끈기로 넬슨은 프랑스 함대가 나일강 유역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정박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기습전을 펼쳐 프랑스 함대를 전멸시킨다. 넬슨의 끈기가 나폴레옹의 야심찬 전략을 수포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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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넬슨은 운명적인 사랑과 조우한다. 프랑스의 나폴리 공략에 대응하기 위해 나폴리를 찾은 넬슨은 나폴리 주재 영국 대사 윌리엄 해밀턴 경의 아내 엠마 해밀턴과 만난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불같이 서로에게 빠져든다. 의외로 해밀턴 경은 개의치 않았다.

워낙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고 생각해서인지 해밀턴 경은 엠마의 새로운 사랑에 관대했다.

세 사람은 같이 만나는 자리조차 어려워하지 않았다.

 

넬슨은 엠마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다. 그리고 그 딸의 이름을 자신을 연상케 하는 허레이시아로 지었다. 넬슨은 나즈벳과 이혼했다.

넬슨의 영국 생활 시절, 이 세 사람은 같은 집에서 기거하는 등 이상한 동거를 하기도 했다.

 

일반 대중은 물론 귀족들도 넬슨의 이런 사적인 일탈을 비난했다.

아내와 자식과 헤어져 오랜 시간 배를 타야 하는 뱃사람 넬슨의 심경을 이해하면서도 조강지처와 이혼하고 유부녀인 정부와 함께하는 행태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는 거셌다.

 

그러나 넬슨은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 윌리엄 해밀턴의 임종을 엠마와 같이 지켜보기도 했다.

훗날 트라팔가 해전 때 넬슨은 유언을 남겼다. 엠마와 자신의 딸을 국가가 보호하고 돌봐주기를 원하다고.

하지만 엠마는 넬슨이 남긴 재산을 천성적인 사치병으로 다 써버리고 평생을 가난과 함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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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의 유해가 담긴 술을 기꺼이 나눠 마신 부하들

 

나일강 해전에서 참패하고 분노한 나폴레옹은 영국을 직접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함대를 구성했다.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총 33척의 전함이 차출됐다. 프랑스의 리에르 사률 빌뇌브 제독이 연합함대를 지휘했다.

영국은 당연히 넬슨을 함대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프랑스의 침략을 막는 중책을 맡겼다.

넬슨은 27척의 함대를 몰고 스페인 연안에 도착했다. 기함은 빅토리호였다.

1805년 9월29일 넬슨은 자신의 47번째 생일을 맞아 15명의 함장과 식사를 했다. 그는 군인의 의무와 필승을 다짐했다.

 

10월21일 트라팔가. 넬슨의 함대는 출격했다.

넬슨은 모든 함선에 ‘영국은 모든 해군 장병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를 믿는다’는 글귀가 적힌 깃발을 걸었다.

그리고 넬슨은 선두에서 함대를 지휘했다.

 

넬슨의 함대는 두 부대로 나누어 프랑스 스페인 연합함대의 중심을 공격해 그들의 수적 우위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치열한 전투는 점차 넬슨 함대의 승리로 기울어졌다.

프랑스 스페인 함대의 20여 척의 함선은 침몰하고, 영국군에게 나포되었다.

그 순간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프랑스 르두타블호에 있던 저격수의 탄환이 넬슨의 몸에 적중한 것이다.

 

총탄은 넬슨의 몸을 뚫고 들어가 등뼈에 박혔다. 넬슨은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지휘를 멈추지 않았다.

무려 4시간 동안 함대를 지휘한 넬슨에게 마지막이 다가왔다.

장교들은 넬슨을 업고 사관실로 들어갔다. 치료를 위해 의사가 다가오자 넬슨은 “나보다 다른 병사를 돌봐주라”고 돌려보냈다.

그리고 부관에게 ‘파도가 거세지니 새로운 밧줄을 연결하라고 하디 선장에게 전하라’ 말하고 얼굴에 손수건을 씌우라 명령했다.

자신의 죽음을 병사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는 넬슨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 넬슨은 “제독으로서 내 임무를 완수할 수 있게 도와주신 신께 감사드린다”는 말과 함께 숨을 거두었다.

 

병사들은 넬슨의 유해를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해군들은 사망하면 바다에 수장하는 것이 관례였다.

병사들은 넬슨의 유해가 부패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유해를 브랜디가 가득 담긴 술통에 넣었다. 알코올에 보존한 것이다.

 

함대는 긴 항해 끝에 영국에 도착했다. 영국은 불굴의 전쟁 영웅을 깎듯하게 맞았으며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영국 역사에서 왕족이 아닌 사람이 국장의 예우를 받은 것은 넬슨 제독, 워털루 전투의 영웅 웰링턴 공작 그리고 윈스턴 처칠, 단 세 명뿐이었다.

넬슨의 유해는 성 바울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또한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넬슨의 동상이 세워지고 넬슨이 지휘했던 기함 빅토리 호는 포츠머스 해군기지에 영구 보존되었다.

또한 그를 죽음으로 내몬 총탄은 원저성에, 그가 입었던 제독 제복은 그리치니 국립해양박물관에 전시되었다.

넬슨의 정신이 영국 곳곳에 살아 있는 것이다.

 

넬슨의 유해가 영국에 도착할 때 일화가 있다. 넬슨의 유해를 꺼내기 위해 술통을 여니 술이 가득 들어있어야 할 술통이 텅 빈 것이다.

병사들이 넬슨의 혼이 담긴 술을 마시고 싶어서 항해 중에 한 잔씩 먹어서 술통이 빈 것이다.

그 뒤 영국 해군에는 럼주를 마시는 전통이 생겼는데 이 술을 ‘넬슨의 피 Nelson’s Blood’라고 불렀다.

이 전통은 1970년 7월까지 약 300년 간 지속되었다.

또한 정사에는 넬슨의 유해를 담은 술통을 프랑스군에게서 노획한 브랜디 술통이라고 불렀으며 야사에는 럼주가 담겨있던 통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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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더십

 

위험 앞에서 몸을 숨기지 않는다.

그래야 부하가 따른다!

 

넬슨은 천성적으로 약골이었다. 키도 165cm에 불과했고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더구나 우울증도 있었고 사지 마비 증상에도 시달렸다.

또한 전투에서 오른쪽 눈과 오른팔을 잃었고 심장발작, 각혈까지 하는 등 군인으로서는 당연히 부적격이었고 일반인으로서도 신체적으로는 거의 최악의 수준이었다.

 

믿기지 않지만 넬슨은 해군임에도 불구하고 평생 배멀미로 고생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정신력은 강인했다.

그는 불굴의 의지로 신체적 약점을 이겨내면서 부하들의 잠재된 능력을 끌어내는 리더십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넬슨의 리더십은 한마디로 정확한 목표를 제시하고, 솔선수범하며, 부하들과 동고동락하는 즉 ‘함께’의 리더십이다.

생각해보라. 몇 개월을 좁은 배에서 긴장과 스트레스에 지친 수백명의 청년들이 몸을 부대끼며 망망대해에 떠 있다는 것을.

당연히 그곳은 거친 숨소리와 건드리면 터지는 화약이 가득 찬 폭발위험 100%의 공간이다.

그래서 해군은 다른 군 조직보다 엄격한 군기와 규율을 요구하는 것이다.

 

넬슨은 무엇보다 부하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들의 사소한 고민, 이를테면 ‘담요와 물이 부족하다’, ‘읽을 책을 구해 달라’ 등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요구조차 소홀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과 다른 특별한 대우를 스스로 사양했다.

부하들에게 마른 콩을 먹이고 자신은 육즙 풍성한 고기를 먹는 일을 삼가 했다.

 

함선에는 장교 식당이 따로 있었지만 넬슨은 부하들과 거의 같은 수준의 식사를 했고 어떠한 일에도 함장으로서 손가락만 까닥거리며 지시를 하는 등의 거만을 떨지 않았다.

 

이렇게 누구의 이야기도 잘 들어주는 꼼꼼한 넬슨의 또 다른 리더십은 칭찬이다. 그는 우선 칭찬했다.

이것은 같은 사안이라도 지적과 꾸중을 하고 칭찬을 하는 것과는 사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상관이 자신의 존재가치와 능력을 인정하고 있다고 믿는 부하들은 투지와 열정에서 이미 승리한 병사들이었다.

 

또한 넬슨은 정확한 목표를 제시했다.

장황한 말보다 실제적이고 실현가능한 목표를 제시했고 그 목표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찾는데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툴롱 항에서 사라진 프랑스 함대를 찾기 위해 지중해를 샅샅이 뒤져야 한다는 넬슨의 의견에 모든 장교와 사병들은 반대했었다.

하지만 넬슨은 “필사적인 일에는 필사적인 수단이 필요하다”며 부하들의 투지를 일깨웠고 또한 군인으로서 국가와 국민이 부여한 임무를 강조했다.

그리고 지중해를 분할해 하나하나 뒤지기 시작했다.

결국 넬슨의 지휘 하에 영국 함대는 몇 개월 만에 나일강 유역에서 프랑스 함대를 발견해 전멸 시킬 수 있었다.

 

넬슨은 전투에서는 강한 지휘관이었지만 평상시에는 인자하고 베풀 줄 아는 상사였다.

그는 12살 때부터 배를 탔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노련하고 전문화된 선장이었다.

그의 특화되고 전문적인 항해기술과 전투력은 부하들에게 하나의 믿음으로 작용했다.

 

또한 그의 세심함은 전투에서만 발휘되지 않았다. 그는 전투에 있어 가장 큰 승리는 “적을 꺾고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의 부하들이 죽거나 다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전투에 임하면 치밀한 계획과 유연한 대처능력으로 승리와 부하들의 안전을 동시에 이끌어냈다. 부하들은 이런 넬슨을 믿고 따랐다.

 

 

▶‘넬슨 터치 The Nelson Touch’

 

코펜하겐 해전에서의 일화이다. 덴마크, 스웨덴, 러시아 연합 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넬슨이 나섰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넬슨의 상관인 하이드 파커는 넬슨에게 후퇴 신호기를 올렸다.

하지만 넬슨은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전술대로 공격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넬슨은 망원경을 볼 수 없는 오른쪽 눈에 대고 부하인 토마스 폴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눈이 하나라 가끔은 장님이 될 수 있다네. 지금 신호 깃발이 올랐지만 내 왼쪽 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네. 계속 공격을 하자. 승리할 수 있다.”

 

넬슨의 이 같은 임기웅변으로 영국 해군은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또 하나 넬슨의 리더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점은 그가 총탄이 빗발치는 전투에서 결코 뒤로 숨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해전은 함선이 서로 마주보고 포 사격을 하고, 이어 배를 서로 붙여놓고 육박전을 치르는 고전적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보통의 함장이나 장교들은 겹겹이 방패를 둘러놓고 지휘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넬슨은 항상 선두에 있었다. 심지어 적선에 오르는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부하들은 이런 넬슨에게 위험을 강조했다. 빈센트 해전에서 전투가 치열해지자 부하들이 넬슨에게 말했다.

 

“제독, 제독이 입고 있는 옷이 적의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 제독 옷을 벗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세요.”

 

“나는 이 옷을 계속 입겠다. 이 제독 옷은 적에게 표적이 되겠지만 우리 장병들에게도 잘 보이지 않는가. 병사들에게 제독이 지휘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나의 임무이다.”

 

그는 자신이 부상을 당해도 의사에게 부하들의 치료를 먼저 하라고 권할 정도로 부하들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아꼈다.

이러한 넬슨의 섬세하고 따뜻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넬슨의 신화적인 승전보가 가능한 것이다.

이후 병사들은 넬슨의 ‘흡사 몸을 어루만져주는 것 같은 리더십’을 일컬어 ‘넬슨 터치 The Nelson Touch’라 불렀다.

 

 

▶‘존경의 열매’는 부하 직원이 키우는 것이 아닌 리더의 몫이다

 

‘책임지는 상사’.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이 당연함이 직장에서는 왕왕 당연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책임에는 분명히 권한이 주어진다.

그런데 권리와 혜택만 쏙 빼먹고 책임을 지는 순간이 오면 번개처럼 사라져버리거나 부하 직원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는 상사가 의외로 많다.

얄미운 것을 넘어 인간적인 배신감도 느껴지지만 어쩔 수 없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나름의 영리한 처세라고 오늘도 굳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변양호 신드롬’을 아는가?

2003년 외환은행의 론스타 매각을 진행했던 당시 변양호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이 후에 헐값 매각 논란으로 약 4년간의 법정공방이 벌어졌다.

결국 변양호 국장은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그는 이미 많은 것을 잃은 뒤였다.

그 뒤부터 공직사회에 ‘후에 논란이 예상되는 정책이나 사안에는 책임질 만한 결정을 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변양호 신드롬’이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정책적인 결정에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결정과 선택의 기준이 사적인 이익과 개인적인 판단이 아닌 공익과 조직에게 득이 되는 결정을 해야 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결정의 순간까지도 많은 고민과 판단,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책임이 무서워 결정을 미루는 것은 후에 그 책임을 부하 직원에게 떠맡기는 행위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리더는 결정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능력이 못 미치는 것이라면 당연히 전체의 의견과 타부서와의 협의를 거쳐야 하겠지만 ‘내가 내린 결정의 후유증’이 두려워 책상 위에 결재 서류를 쌓아둔다.

그 리더는 더 이상 책임을 지는 자리에 대한 욕심은 접어야 한다.

 

우리는 종종 거대 기업에서 등기 이사에게 엄청난 연봉과 스톡옵션의 권한을 지급한다는 기사를 접하게 된다.

부러워하기도 하고, ‘씹어도’ 보지만 그들의 어깨에 얹혀진 ‘등기’의 무게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등기 이사와 비등기 이사를 구분하는 기준은 이사회에 참여할 권한 여부이다. 등기 이사는 이사회 구성원에 올라 있다는 의미이고, 비등기 이사는 그 반대이다. 이사회 구성원(등기 이사)은 기업 경영에서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하고 그에 대한 법적인 지위와 책임을 갖게 된다.’ (- 네이버 시사상식사전)

 

즉 법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 현재는 물론이고 과거의 결정에 대해 책임을 지기 때문에 그 ‘부담의 무게값’이 고액 연봉으로 보상되는 것이다.

 

진정한 리더와 상사는 성대한 시상식과 화려한 파티에만 참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시상식과 파티를 만들어내는 고단한 톱과 망치질의 현장을 리더는 지켜야 하고 화려한 무대 위로 한 명의 부하 직원이라도 더 올려 보내려는 관용과 베푸는 리더십이 필요한 것이다.

진정으로 부하직원이 따르는 상사와 리더의 조건은 의외로 거창한 것이 아니다.

대단한 학벌, 능력, 인맥, 미래 보장, 하다 못해 술값, 밥값 잘 내는 것도 조건의 작은 부분이겠지만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는 상사, 위기와 위험의 순간 선두에서 조직을 이끄는 상사, 부하 직원의 작은 고충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상사, 부하 직원의 시체를 밟고 전진하지 않는 상사 등일 것이다.

 

이들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부하직원을 인격체로 대하는 따뜻한 자세다.

명심하자! 부하 직원의 마음속에 있는 존경의 열매는 스스로 크는 열매가 아니다.

그것은 리더의 태도를 먹고 자라는 것이다.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 사진 pixabay.com자료제공 Citylife
발행일 2016.07.15기사입력 201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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