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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가는 붉은 꽃이 없고 10년 가는 권세가 없다’고 했다. 장거정이 딱 그랬다.

명나라 말엽 황제의 스승이자 내각 수상으로 최고의 권력을 누렸지만 그가 건설한 ‘새로운 명나라’는 그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났다.

안일하고 무능한 군주와 기득권 세력은 그의 ‘명나라 재건 프로젝트’를 폐기처분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중국 역사상 4대 명재상으로 손꼽히는 장거정의 개혁은 너무나 곧은 성품과 후계 양성 실패 때문에 좌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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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개혁으로 수십 년을 더 존속하다

 

허물고 썩어서 쓰러져가는 집은 기둥 몇 개로 잠시 지탱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시간 연장책일 뿐이다.

하지만 유능한 건축가라면 기둥으로 집의 중심을 보강하고 서까래도 새로 얹고 내벽도 쌓아 사람이 살만한 튼튼한 집으로 바꿀 수 있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창업의 기세가 꺾이고 태평성대가 거듭되면 모든 것이 풀어진다. 기

강도, 의지도, 목표도 흐려진다. 그때부터 국가의 운명은 내리막길을 타기 시작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개혁 그리고 그 개혁을 진두지휘할 유능한 재상의 존재이다.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을 패자로 만든 관중, 삼국시대 유비를 보좌해 촉나라의 명운을 이끌어간 제갈량, 송나라 신종 치세 개혁신법으로 송나라를 반짝 중흥 시킨 왕안석 그리고 마지막이 명나라 만력제 시대의 장거정은 역사가들이 손꼽는 중국의 4대 명재상이다.

 

이 중에서 장거정은 확실히 유능한 건축가였다. 후대 역사는 장거정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장거정이 10년간 재상으로서 이룩한 정치경제 개혁과 군사적 안정 그리고 흑자재정으로 인해 명나라는 최소 70년을 더 지탱할 수 있었다”라고.

 

명나라는 1368년 주원장이 창업했다. 그리고 17대를 이어가다 숭정제때인 1644년 청나라에게 멸망했다. 딱 276년을 존속했다.

장거정은 1572년부터 1582년까지 10년 동안 명나라의 재상이었다. 불행하게도 그가 병사한지 60년 만에 명나라는 그 운명을 다했다.

만약 장거정의 개혁정책을 후대 황제나 조정에서 그대로 이어나갔다면 명나라의 명운은 좀 더 연장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개혁은 그가 죽는 순간 실효를 다했다.

 

물론 기회는 있었지만 황제 만력제는 장거정이 심혈을 다해 구축한 국가의 기둥과 서까래를 스스로 걷어차 버린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장거정이 발굴해낸 인재들을 모두 축출했고 심지어 살아 생전 스승으로 섬기고 대접했던 장거정을 만력제는 죽은 지 4일 만에 탄핵을 시작해 그의 모든 공적과 작위 기록을 삭제했다.

한마디로 부관참시만 안했다 뿐이지 장거정과 그의 가문은 철저하게 파멸됐다.

그리고 1640년 복권될 때까지 장거정의 이름은 명나라 황실과 조정에서 금기어였다.

 

개혁의 명재상에서 하루아침에 역적의 신분으로 떨어진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장거정의 개혁정책이 기득권층의 불만을 샀다.

또한 느슨한 관료 제도를 엄격한 구조조정과 공정한 업무평가를 통해 팽팽하게 당기는 과정에서 많은 정적을 만들었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황제인 만력제의 무능과 콤플렉스였다. 10살 때 즉위한 만력제는 장거정의 제자이며 꼭두각시였다.

그에게 장거정은 신하가 아니라 냉혹한 선생이면서 두려운 존재였다.

20세 성년이 된 만력제는 장거정이 죽자 자신이 황제라는 것을 과시하고 실험해보고 싶었다.

이런 그의 욕망에 그동안 장거정에게 눌려있었던 동림당 관료들이 불을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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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원인은 장거정의 권력에 대한 무한한 욕심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상중에도 관직을 지켰고 말년에 병석에 누워 죽는 날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다.

아마도 장거정은 자신이 57세의 나이에 병으로 죽을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향후 10년은 더 권력을 쥐고 개혁을 지속할 계획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장거정은 후학을 양성하고 인물이 아닌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개혁 지속의 장치를 마련할 수 없었다.

또한 급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그가 10년 동안 이룩한 정책, 인맥은 물론 그 자신까지도 사후 숙청을 당한 것이다.

 

물론 역사는 가정이 없다. 다만 장거정의 존재로 인해 명나라 역대 황제 중에서 가장 무능하면서도 황제의 자리를 오래 지켰던 만력제 당대에 명나라가 멸망하지 않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일 것이다.

 

 

▶뛰어난 계략으로 정적을 제거하다

 

장거정은 1525년 후베이성 장리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 밑에서 천호 벼슬을 지내기도 했지만 이후 대대로 관직에는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축적한 재산이 꽤 있어서 장거정이 공부하는데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다.

 

장거정은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드디어 우리 집안에서도 과거 급제자가 나올 수 있겠구나’라는 온 집안의 기대가 어린 장거정에게 모아졌다.

장거정은 5세 때 학교에 가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15세에 향시에 합격했는데 당시 시험관들이 장거정의 실력에 탄복하고 ‘너무 일찍 관직에 나가는 것보다 더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생각에 일부러 불합격을 시키자는 의견도 있었다고 한다.

 

1547년 장거정은 22세 나이에 진사에 합격하고 엘리트들의 집합소인 한림원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장거정은 그의 정치적 스승이자 후견인을 만나게 된다. 바로 서계이다.

서계는 강직한 학자이며 관리였다. 당시 조정의 실권자는 요숭이었다. 요숭은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고 권력을 향유했다.

그런 요숭도 서계에게만은 함부로 하지 못했다. 장거정은 타고난 능력과 정무감각 그리고 서계의 후원으로 승진가도를 달린다.

서계가 재상이 되자 장거정은 예부우시랑, 이부좌시랑을 거친다. 그리고 1567년 42세에 드디어 대신이 된다.

 

서계는 공정하고 신뢰받는 정치를 펼쳤다. 하지만 정적들은 서계를 침몰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다.

서계의 최대 정적인 고공이 서계 아들의 범죄를 빌미로 서계를 탄핵했지만 오히려 고공이 파면되고 만다.

그러나 고공은 멈추지 않았다. 당시 내각과 함께 권력을 양분하던 기관은 황제의 직속 환관들이었다.

고공은 환관 수장인 태감 이방과 연계해 끊임없이 서계를 공격했다.

 

장거정은 이러한 권력투쟁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장거정의 유연한 처세 덕분이었다.

장거정은 분명 서계의 사람이었지만 서계와 요숭, 서계와 고공의 싸움에서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이고 공정한 자세를 취했다.

즉 ‘오피셜한 처세’로 누구의 공격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이다.

 

1568년 서계는 관직을 내놓고 은퇴한다. 그리고 후임으로 조정길을 추천해 그가 재상이 된다. 이에 장거정은 실망한다.

장거정은 서계가 후임 재상으로 자신을 추천할거라 믿고 있었다. 이 틈을 고공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는 태감 이방을 통해 장거정과 손을 잡고 복권에 성공한다.

명나라의 권력은 고공, 장거정 그리고 이방을 대신해 태감의 자리에 오른 풍보가 장악한다.

 

그 무렵 융경제가 죽었다. 융경제는 고공, 장거정, 풍보에게 10살의 어린 황제 만력제를 부탁한다.

즉 이들이 황제를 떠받드는 고명대신이 된 것이다. 하지만 내각 수반인 고공과 황제와 황태후를 장악하고 있는 풍보의 권력 다툼은 여전했다.

두 사람은 장거정의 야심을 간과했다. 장거정은 일시에 두 사람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을 계책을 마련한다.

 

장거정은 뇌물을 밝히는 풍보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그의 신임을 얻는다.

풍보는 수렴청정 중인 황태후에게 고공을 헐뜯고 대신 장거정은 칭찬한다.

장거정은 2단계 계획을 실행한다.

그는 자신의 심복에게 환관 옷을 입혀 만력제 암살을 시도하면서 일부러 잡히라고 지시한다. 범인은 잡혔다.

하지만 아무리 심문과 고문을 해도 배후를 밝히지 않았다. 풍보는 장거정과 상의한다.

 

장거정은 풍보에게 “범인이 환관 옷을 입었으니 분명히 태감의 라이벌 중에서 누군가가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 바로 태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입니다.”

 

풍보는 번뜩 고공을 떠올렸다. 풍보는 자객을 설득했다.

 

“너를 고공이 보낸 것임을 내가 알고 있다. 네가 사실대로 진술하면 너의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자객은 고공이 보낸 것임을 시인했다. 이를 보고 받은 태후와 만력제는 격노했다.

바로 고공을 축출하고 후임에 장거정을 임명했다. 드디어 장거정은 오랜 숙원인 내각 수상이 되었다.

 

장거정은 3단계 계획을 실행한다. 장거정은 자객에게 진술을 번복케 한다. 태감 풍보가 가르쳐 준대로 자백을 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를 알게 된 만력제와 황태후는 풍보를 멀리하고 그는 권력의 중심에서 이탈한다.

장거정은 교묘한 술책으로 고공과 풍보라는 당대의 실력자이자 정적을 일거에 물리친 것이다.

모든 권력은 장거정에게 집중되었다. 그

는 내각의 수상이자 황제의 스승이며 또한 황제의 친모인 이 태후의 강력한 신임을 받고 있었다.

이때가 1572년으로 장거정의 나이 47세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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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으로 10년 치 양곡과 풍부한 재정을 확보하다

 

장거정은 개혁을 시작했다. 먼저 방만하고 책임감 없이 일하는 관료조직을 쇄신했다.

장거정은 ‘고성법 考成法’을 마련해 관리들의 인사고과를 철저하게 매기기 시작했다.

매월, 매년 단위로 성적을 매겨 승진과 좌천인사를 실시했다.

 

그동안 당파나 인맥으로 관리가 되고 승진했던 관행들이 일거에 없어졌다.

그리고 구조조정을 통해 많은 관리들이 옷을 벗었다.

그 과정에서 몇몇 관리들이 장거정에게 ‘여유 있는 시간과 인정어린 유화책’을 건의했다.

하지만 장거정은 오히려 그런 건의를 한 관리들을 모두 파직하거나 죄를 물어 옥에 가두었다. 조정은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관료집단을 일하는 조직으로 개편한 장거정은 곧 토지와 조세개혁을 시작했다.

지방 호족 세력이 보유한 토지를 모두 조사해 세금을 물렸고 조세의 방법으로 은전 납입을 법제화했다.

지금까지 돈, 공물, 쌀 등 다양한 방법으로 세금을 걷고 그 과정에서 지방관들의 재량권이 남용되면서 사적으로 유용된 세금들이 은전으로 통일되며 제대로 걷히기 시작했다.

 

물론 반발도 거셌다.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은 관리를 비롯해 지방 호족과 귀족계급은 장거정에게 원망을 품기 시작했다.

하지만 황제와 황태후의 강력한 후원을 받은 장거정은 거침없이 개혁을 지속했다.

효과는 분명히 있었다. 명나라의 국가 재정은 단박에 호전되었다.

가뭄과 기근이 들어도 10년을 버틸 수 있는 양곡이 비축되었고 무려 400만냥의 재화도 모았다.

 

장거정은 내정에만 능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국가의 안위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국경 밖 적국과의 관계에서 유연한 강온 정책을 병행했다.

 

장군 이성량은 요동을 지키게 하고, 장거정의 심복이자 명장 척계광에게는 20만 대군을 주어 만리장성부터 북경까지의 수도방위를 전담케 했다.

또한 민란이 잦은 절강에는 장가윤을 파견해 소요를 진압하고 선정을 펼치게 했다.

백성들과 조정은 물론 그의 정적들까지도 장거정의 빈틈없는 국방정책과 대비책에는 박수를 보낼 정도였다. 힘

을 갖춘 장거정은 각 변방국가와 화해조약을 맺었고, 그 결과 장거정이 집권했던 시기에 명나라는 왜구의 해안 침범 외에는 국가적인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

장거정의 개혁정책의 방향은 그가 황제에게 올린 ‘진육사소 陳六事疏’에 잘 드러난다.

 

‘현실성 없는 공론을 줄이고 실리를 추구한다’

 

‘공직 기강을 바로잡고 모든 정책과 인사에는 공정하고 사적인 계파를 탈피한다’

 

‘황제와 조정의 명령이 하부조직까지 잘 전달되고 시행되는 지 수시로 점검한다’

 

‘당파에 상관없이 인재를 등용한다’

 

‘사치를 멀리하고 모든 백성이 잘 살 수 있는 조세 제도를 실시한다’

 

‘평화 시에 군비를 갖추고 군의 훈련과 기강을 확립한다’

 

한마디로 국가의 근본을 바로 세우려는 것이 목적이었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개혁 모토인 것이다.

 

장거정은 이 같은 개혁정치를 10년 간 지속했다. 장거정은 이 10년 간 하루도 쉬지 않았다.

 

어느날 장거정 아버지가 죽었다. 보통은 3년 간 상을 치르지 위해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유교의 예였다.

하지만 장거정은 내려오지 않았다.

부시랑 이유자라는 자가 장거정의 뜻을 알아채고 황제에게 “재상 장거정이 막중한 국사를 맡고 있으니 비록 부친상을 당했지만 삼년상을 면제해주는 ‘탈정 奪情’의 예를 주어야 합니다”라고 건의했다.

황제는 수락했다. 장거정은 개혁의 지속을 위해서 삼년상을 치르지 않으려는 것도 목적이었지만 숨은 뜻은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어날 반대 권력의 반격과 탄핵을 더 두려워했다.

 

1582년, 장거정의 섭정 정치가 딱 10년이 되었고 10살에 즉위한 황제 만력제는 이제 20살의 청년이 되었다.

그해 3월 장거정이 병에 걸렸다. 중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관직을 내려놓지 않고 병상 정치를 하던 장거정은 그해 6월에 죽고 말았다.

황제는 장거정의 공적을 높이 사 그를 상주국으로 봉하고 문충이란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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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황제, 장거정은 사후숙청, 개혁은 폐기처분

 

장거정이 죽자 불과 4일 만에 탄핵이 시작됐다.

그의 죄목은 ‘언로를 탄압했으며 황제의 총명을 막고 정권을 장악해 독재를 펼쳤고 불충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

런 죄를 만든 자들은 장거정의 정적이었던 장성, 구순 등이었다.

 

이들은 장거정이 부모의 상을 당했는데도 상을 치루지 않는 불효를 저질렀다는 죄목도 추가했다.

뜻밖에도 황제는 장거정의 탄핵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그동안 장거정의 세에 눌려 몸을 움츠리고 있던 세력이 일제히 장거정을 공격했다.

관료, 환관, 토호세력, 귀족 등 거의 모든 조정의 관리들이었다.

 

1583년 만력제는 장거정에게 내렸던 상주국 봉호를 박탈했다. 그리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고 가족들에게도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장거정은 6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자살하고 둘째는 거의 미치광이가 되는 등 집안은 그야말로 풍지박살이 났다.

 

이 같은 장거정의 사후 평가는 그의 10년 권력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는 업무에 빈틈없고 철저했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에 대해 가혹한 평가를 주저하지 않았다.

많은 적을 만든 것이다.

 

물론 개혁은 새로운 판을 짜는 것이다.

당연히 기존의 판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세력에게는 불필요하고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로 인해 적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장거정의 사후 탄핵과 처벌의 강도는 개혁 후유증의 결과라 보기에는 과도했다.

 

탄핵의 핵심은 만력제의 변심이었다. 10세에 즉위한 만력제는 장거정에게 모든 정치와 정무를 배웠다.

그는 황제의 엄격한 스승이었고 때로는 이런 교육의 과정에서 만력제는 “장거정이 황제인 나를 무시한다”는 생각을 품기도 했다. 만

력제와 만력제의 어머니인 태후 이 씨는 장거정을 수보나 재상이 아닌 ‘선생’으로 불렀다.

그만큼 존경하고 따른 것이다.

 

특히 이 태후의 장거정에 대한 의존은 상당했다.

어린 만력제가 실수를 저지르거나 학문에 게으름을 피우면 장거정과 상의를 했고 또한 어린 황제를 “네가 이렇게 공부를 소홀히 하고 게으르면 장 선생 얼굴을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라며 야단쳤다고 한다.

이런 교육으로 인해 만력제는 어려서부터 장거정에 대해서 존경과 경외를 넘어 무섭고 버거운 존재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장거정은 만력제의 황제로서의 재정 지출도 막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궁궐 증축이나 각종 종교 및 궁중 행사의 비용도 장거정의 승인이 있어야 나갔고 이 과정에서 어린 황제는 무력감과 치욕을 함께 느끼기도 했다.

 

또한 성년이 된 황제의 의견을 무시하고 장거정은 자신의 마음대로 인사권을 전횡하기도 했다.

이 부분은 장거정에 대한 후대의 평가 중에서도 가장 박한 부분이다.

장거정이 인사에 있어 개인적인 선호도를 우선했다는 기록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던 장거정이 죽자 만력제는 철저하게 장거정의 모든 것을 지웠다.

그의 정책을, 그의 사람을 조정에서 축출한 것이다. 오

히려 장거정에게 정치적으로 배척당하고 고문을 받아 불구가 된 우신행, 나유, 추원표 등의 관리들이 ‘조정 관리들이 한마음이 되어 장거정을 공격하는 현실을 비판’할 정도였다.

이들은 “장거정이 있을 때 그의 공을 찬양하느라 정신없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그의 죄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 두 가지 다 올바른 것이 아니다”라고 한탄했다.

무능한 황제에 의해 사후에 철저하게 배척당한 장거정은 이후 1640년, 명나라가 멸망하기 불과 4년 전에 복권되었다.

명나라 실록에 정거정은 ‘위기를 극복하고 사직을 구했으며 황제의 권위를 세운 공이 있다’라고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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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세학. 현자의 처세집대성

 

<권력이 묻거든 모략으로 답하라>

 

장거정은 리더십과 처세학에서도 거의 완벽했다.

능란한 처세술로 정적인 고공과 태감 풍보를 일거에 무너뜨리고 권력을 쟁취했고 또한 이 권력을 10년 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각 수장으로서의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거운 사람이었다. 입도 무겁고, 생각도, 행동도 무거운 사람이었다.

대신 그 무거움의 뒤에는 수많은 생각과 고민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장거정은 임기웅변에도 능하고 유연성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준비와 대비에 철저했던 사람이다.

장거정은 ‘비가 오기 전에 우산을 준비하라’는 말을 그대로 실현한 재상이었다. 그

는 중국을 둘러싼 사방의 국경을 정비했고, 당시로서는 많은 양인 10년 치의 양곡을 준비해 기근과 가뭄에 대비했으며 황제의 씀씀이를 줄여가면서까지 400만냥이라는 돈을 비축했다.

즉 일이 닥치고 난 뒤에 손을 쓰는 것은 아무리 빨라도 늦은 것으로 먼저 위기와 상황을 대비하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또한 그는 제도를 마련하고 이 제도를 법으로 다스리는 것에 비중을 두었지만 무엇보다 제도를 움직이는 사람을 중시했다.

‘무엇을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누가 할 수 있는가?’에 개혁 정책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판단했다.

자연히 자신이 검증하고 믿을 수 있는 관리들을 중용했다.

 

이 과정에서 과도하게 정적을 만들기도 했지만 장거정은 준비된 관리, 일을 할 수 있는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물론 장거정의 사후 탄핵과 배척은 기득권을 상실했던 보수 세력의 반격과 ‘장거정에게서 독립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황제의 의식이 결합된 결과이다.

장거정은 처세학에서 절반의 성공만 거둔 셈이다.

그는 서원철폐처럼 언로를 막거나 인사에 있어 개인의 선호도를 우선하고 또한 황제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장거정이 이 점에서 좀 더 유연한 정책을 펼쳤다면 사후 그런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거정은 재상으로서 명나라의 마지막 평화시대를 열었고, 재정이나 국방에서도 큰 걱정거리를 덜어준 명신이었다.

역사는 그의 처세에서 아쉬움을 표현하지만 어차피 개혁은 절반의 지지를 기반으로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의 비극은 예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장거정의 리더십과 처세학을 엿볼 수 있는 책이 있다.

바로 ‘아템포’에서 펴낸 <권력이 묻거든 모략으로 답하다>이다.

장거정이 원전이고 스반산이 역주한 후 김락준 중국전문가가 옮긴 책이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모실 때 성실해야 한다. 성실함은 불화를 만들지 않는다. 따라서 윗사람에게 실례하는 일은 있어도 결코 속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작은 과실 때문에 그르치지 않는 것이 충성이고 지혜이다.’

 

‘가슴에 천하를 구하려는 뜻을 품었다면 마땅히 숨겨야 한다. 치아는 튼튼하지만 제일 먼저 빠지고, 혀는 부드럽지만 끝가지 남아 있다. 부드러움은 단단함을 이길 수 없고 약함은 강함을 이길 수 있다.’

 

‘남을 탓하기에 앞서 내 자신을 먼저 살펴 볼 것에 대하여 권한다.’

 

‘잘 관찰하는 사람은 분명하게 알고 신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계획이 있고 말이 없는 사람은 지혜롭다.’

 

‘상대의 속임수를 알아차렸을 땐 일부러 모르는 척하고, 알아도 티 내지 않으며 상대를 황당한 지경으로 유도해야 한다. 상대의 방패를 공격할 땐 반드시 상대의 창을 써야 한다.’

 

‘윗사람에게 간언할 때는 어떤 말을 하느냐보다 언제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세상에서 헐뜯는 것보다 더 악독한 것은 없다. 중상모략은 날카로운 무기와 같아서 교묘한 말 한마디로 천군만마를 이긴다.’

 

- <권력이 묻거든 모략으로 답하라> 원전 장거정 / 역주 스반산 / 옮김 김락준 / 아템포 간 참조 -

 

 

▶‘준비된 사원’에게 필요한 것은 단 5분

 

직장의 근무시간은 대개 9시간이다.

물론 아침에 눈비비고 일어나 바로 출근하고 야근에, 주말 특근까지 해야 하는 직장도 부지기수이다.

가끔 구글이나, 페이스북의 꿈같은 사옥이나 식당 메뉴를 보면서 한숨을 쉬기도 하지만 보통의 직장인들은 묵묵히 일과, 시간과, 업무와 싸우는 중이다.

 

왜 이렇게 일에 쫓기는 것일까. 일단은 절대량이 많다. 회사는 빈자리를 금방 채우지 않는다.

1/n 개념으로 남은 사람에게 조금씩 업무량이 늘어나고 그것이 익숙해지면 그 부서의 인원은 한 명이 빠진 상태에서 굳어지는 것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시간의 효율성과 준비성이다. 아침 7시에 출근하라는 말이 아니다.

단 5분을 먼저 출근하더라도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워밍업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것은 전날 퇴근 전 5분의 시간 투자에 달려있다.

 

어서 퇴근해야 한다는 급한 마음에 컴퓨터 전원 스위치만 끄고 일어나지 말고 책상을 정리한 뒤에 일어서는 게 맞다.

내일 처리해야할 서류들을 순서대로 정리하고, 오전에 마쳐야 할 것, 오후에 시작해야 할 업무를 구분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내일 오전’은 ‘충분한 시간’으로 다가온다.

 

또 하나, 일주일 단위와 최소한 석 달 정도의 업무 플랜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회사에서의 일은 사실 습관적이다. 이를 전문화라고 좋게 표현할 뿐이다.

눈치가 빠르면 절간에서도 젓갈을 얻어먹을 수 있다고 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을 다음 주로, 다음 달로 미뤄봤자 누구도 당신의 일을 덜어주지 않는다.

벼락치기는 학창시절 암기과목에서나 통할 수 있는 것이지 모든 업무 성적이 계량화되고, 그 과정에서의 상하의 평가가 면접시험처럼 따라붙는 직장에서는 버려야 할 습관이다.

 

면접 시험 때 제일 많이 듣고, 하는 말이 ‘준비된 사원’이다.

무엇을 준비했을까. 학점, 토익성적, 자격증, 인턴십 확인서… 뭐 이런 것들은 회사에 입사하면 바로 인사팀 창고로 들어가는 것들이다.

회사라는 조직에서 ‘준비된 사원’은 상사의 예상에 허를 찌르는 사원이다.

상사는 업무를 분담하면서 오랜 경험으로 이 업무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짐작한다. ‘

이 일은 최소 3일이 걸리겠군’이란 예상에 3일 만에 결과물을 내면 그것은 평균점이다.

물론 3일 이상 끙끙 해매고 있다면 당연히 불합격으로 승진 인사 때 A4용지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으려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바로 이틀 만에 처리하는 사원이 상사의 입장에서는 ‘준비된 사원’인 것이다.

직장에서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바로 준비와 계획이다.


이것은 사실 굉장한 능력이 아니다.

5분 먼저, 일주일 먼저의 마음으로 일을 바라보면 해결 방법이 보이는 것이다.

 

층층시하는 물론이고 밑에서 치고 올라오고 갈수록 입지가 좁아지는 직장인. 그

직장생활에서 우선 필요한 것은 부장님 스크린골프장 한 번 더 모시는 것보다 당신의 업무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게 정리하는 것이다.

그것이 당신을 ‘준비된 사원’에서 ‘준비된 과장’으로 만들 수 있다.

 

 

 

박기종(커리어코칭칼럼니스트) 사진 pixabay.com자료제공 Citylife
발행일 2016.07.27기사입력 201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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