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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시작과 함께 즉위한 순조(純祖·1790~1834년, 재위 1800~1834년)는 외척이 주도하는 세도정치의 흐름 속에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은 순조를 더욱 곤경에 빠지게 했다.

1815년 이후 20대 중반이 된 순조는 국정을 직접 챙기고 전국에 암행어사를 파견하는 등 국정 주도권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한 외척 세력은 여전히 강했다.

중앙 핵심 요직부터 지방 수령에 이르기까지 자파 인물을 권력에 포진시켰고, 왕권은 점차 허약해져 갔다.

정치적 위기 속에서 순조는 개혁 성향을 지녔던 효명세자(1809~1830년, 후에 익종으로 추존됨)로 하여금 정치의 실무를 맡게 하는 대리청정을 단행했다.

효명세자에게 실권을 부여해 세도정치를 극복하는 한편 왕실 권위의 회복을 꾀했다.

 

효명세자는 1809년 8월 9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 사이에 장자로 태어났다.

“효명이 태어나기 전 순원왕후의 꿈에 용이 나타났다. 그가 태어날 즈음에는 오색의 무지개가 궁정에 드리우고 소나기와 우레가 쳤다. 그가 태어나자마자 하늘이 개이고 궁전의 기와에 오색의 기운이 머물렀다가 권초일(捲草日·왕비의 산실에 깔았던 자리를 걷어치우는 날)에 이르러서야 흩어졌다”고 전해진다.

 

1812년 4세에 왕세자로 책봉되고 1819년 11세의 나이로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았다. 신정왕후다.

세자가 장성하자 순조는 각종 행사에 세자를 동행시켰으며, 1827년(순조 27년) 19세가 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지시했다.

건강상 문제가 있긴 했지만 순조는 여전히 38세의 젊은 군주였다. 신하들 반대가 거셌으나 순조의 의지는 단호했다.

 

순조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것은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세도정치의 벽을 뚫기에 본인은 역부족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개혁 성향이 있는 젊은 왕세자에게 정치를 맡겨 정국 흐름을 바꿔 보려 한 것이다.

1827년 2월 9일 대리청정의 명을 받은 효명세자는 2월 18일 인정전에서 하례식(賀禮式)을 마친 후 정무를 시작했다.

이후 1830년 5월 급서하기 전까지 약 3년 3개월 동안 대리청정을 했다.

순조의 대리청정이 결정되자 영민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세자의 혁신 정치에 대한 기대가 컸다.

 

“왕세자께서는 뛰어난 덕망이 날로 성취되고 아름다운 소문이 더욱 드러나게 되니, 목을 길게 늘이고 사랑하여 추대하려는 정성은 팔도가 동일합니다. 지금 내린 성상의 명을 삼가 받들되…… 신 등은 기뻐서 발을 구르며 춤출 뿐입니다.” (순조실록, 순조 27년 2월 9일)

 

외척 세도정치에 둘러싸여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어했던 왕 순조는 세자에게 큰 희망을 걸었다.

세자의 정치적 감각은 탁월했다.

대리청정 시절, 효명세자는 안동 김씨 세력의 핵심 인사를 정계에서 축출하거나 그 권한을 약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 소론 등 반외척 세력을 정계로 복귀시켰다.

대리청정 초반 자신을 길들이려는 조정 대간들과 삼사에 맞서 강인한 군주의 위엄을 보여줬다.

 

또 효명세자는 정조와 마찬가지로 경기 일원에 위치한 역대 왕의 능을 자주 참배했으며 이를 민심 파악과 군사 훈련의 기회로 삼았다.

효명세자는 왕의 능을 참배하러 갈 땐 주로 군복을 입고 행차했으며 야간 훈련도 실시하며 군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백성들이 국왕에게 청원하는 방식이던 상언(上言)과 격쟁(擊錚) 등 소원 제도도 적극 활용했다.

대리청정 기간 473건이나 되는 상언을 접수했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대리청정 첫해에 이뤄졌다.

그만큼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에 거는 백성들의 기대가 컸음을 보여준다.

 

또한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기간 동안 크고 작은 연회를 총 11회에 걸쳐 열었는데, 대부분 부왕 순조와 어머니 순원왕후를 위한 잔치였다.

잔치 후에는 당시의 상황을 의궤(儀軌)의 기록으로 정리해 왕실 권위를 대내외에 과시하고자 했다.

 

하지만 효명세자의 생은 너무 짧았다. 1830년 윤 4월 22일에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약원(藥院)에서 왕세자의 진찰을 청했는데, 예후(睿候)가 각혈이 있고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부터 각혈하기 시작해 병이 계속 악화됐다.

5월 6일 효명세자는 22세의 나이로 창덕궁 희정당에서 생을 마감했다.

5월 5일, 의학에 일가견이 있던 정약용을 불러들였지만, 도착하기도 전에 세자는 사망했다.

1834년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즉위한 후에 익종(翼宗)으로 추존됐으며, 고종대인 1899년에는 문조(文祖)로 추존됐다.

 

현재 창덕궁 안에 있는 궁궐 전각 중에는 효명세자와 관련된 유적지가 많다.

창덕궁 후원 규장각 인근에 사대부 집의 형태를 띠고 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 건물이 바로 효명세자가 부친 순조를 위해 지었다는 연경당(演慶堂)이다.

헌종 때 편찬한 ‘창덕궁지’에는 연경당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개금재(開錦齋)의 서쪽에 있고, 남쪽이 장락문(長樂門)인데 바로 진장각(珍藏閣)의 옛터이다. 순조 28년(1828년) 익종이 춘처(春邸·세자)로 있을 때에 개건(改建)하여 지금은 익종의 영진(影眞·초상)을 모시고 있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청나라 군대에 쫓긴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 개화파 수뇌부가 고종을 모시고 잠시 연경당으로 피신한 일이 있었다.

연경당은 또 고종과 순종 대에 연회 공간으로 자주 활용됐다.

1895년(고종 32년) 5월 고종은 연경당의 넓은 앞뜰에서 내외 귀빈들에게 원유회(園遊會)를 베풀었으며, 1908년 순종은 연경당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 일본 측 주요 인사를 접견했다.

1917년 창덕궁의 내전인 대조전이 화재를 당했을 때 순종 황제와 순정황후는 잠시 연경당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연경당 외에도 창덕궁에는 효명세자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 많이 있다.

세자가 주로 활동했던 곳은 성정각(誠正閣) 일원이었다.

이곳은 궁궐의 동쪽에 위치해 동궁으로 불렸다.

성정각 일원의 중심 공간은 중희당(重熙堂).

원래 정조가 세자인 문효세자를 위해 1782년에 세운 건물이었으나, 실질적으로 활용한 인물은 세자 시절 순조와 효명세자였다.

 

후원의 중심 규장각 주합루의 북쪽 언덕 아래 애련지(愛蓮池) 옆에는 의두합(倚斗閤) 일대가 자리하는데 이곳은 효명세자의 독서 공간이었다.

 

‘창덕궁지’에는 “의두합은 영화당의 북쪽에 있는데 옛날 글을 읽던 자리다.

1827년 정해에 익종이 춘궁에 있을 때 고쳐 지었다”고 기록돼 있다.

의두합의 바로 옆에 있는 운경거(韻磬居)는 1칸 반짜리 건물로 궁궐 안에서 가장 규모가 적다.

의두합과 운경거는 규장각 언덕 아래에 북향을 하고 있는데, 정조를 닮으려는 효명세자의 자취가 남아 있다.

북향의 차가운 건물에서 정국 구상을 하면서 세자는 세도정치의 벽을 뚫고자 했을 것이다.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공간’이라는 의미가 담긴 폄우사도 효명세자가 자주 머물던 곳이었다.

폄우사는 존덕정 서쪽에 있는 ‘ㄱ’ 자형의 정자다.

 

세도정치의 벽을 뚫고 정치와 문화면에서 왕권의 강화를 꾀하던 효명세자.

하지만 그가 22세 나이로 요절하면서 조선 왕실에는 다시 불운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순조의 슬픔은 세자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2년 뒤 5월에는 복온공주가 죽고, 6월에는 다시 명온공주가 죽었다.

 

거듭된 자식의 죽음에 순조는 더욱 쇠약해졌고, 1834년 11월 경희궁 회상전에서 4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순조 사후 왕위는 효명세자의 아들인 8세의 헌종(1834~1849년)에게 이어졌다.

최연소 왕의 즉위는 잠시 주춤했던 세도정치에 날개를 달아줬고, 왕실의 권위는 더없이 추락했다.

 

창덕궁 후원에 아름답게 자리 잡은 연경당과 의두합, 그리고 폄우사.

이 세 곳은 22세라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세도정치를 극복하고 조선 왕실의 부흥을 위해 분투한 효명세자의 의지가 담긴 공간이다.

이곳을 찾아 아버지 순조를 대신해 세도정치의 모순을 극복하려 했던 효명세자를 기억해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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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정윤정자료제공 매경이코노미
발행일 2016.08.01기사입력 201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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