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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서는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왕이 될 수 없는 자를 무려 두 명이나 왕위에 앉혔다. 그것도 연이어.

오나라의 합려와 부차가 그들이다. 그 공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는 국가 경영이나 전쟁 지휘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 바로 자신이 왕으로 올린 부차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변화하는 리더십에 순응하지 못한 고지식한 그의 처세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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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와 야망의 결합, 그리고 비극적 최후

 

약 2500년 전 중국 춘추시대는 영웅과 신화가 공존했다.

국가들의 흥망성쇠, 영웅의 삶과 죽음, 시대를 관통한 사상의 탄생, 충신과 간신의 엇갈린 희비 그리고 수많은 전란과 민초들의 삶은 사마천의 <사기>와 <한서 漢書> 등의 기록으로 지금의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감동을 전해준다.

그 춘추시대 수많은 영웅 중에서 오자서가 있다.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한 격정의 인간이었다.

초나라에서 대대로 공경의 자리까지 오른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하루아침에 가문이 멸족 당했다.

겨우 혼자 살아남은 오자서는 복수를 다짐했다.

그의 나머지 인생은 오로지 초나라 평왕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다.

 

오자서는 정나라, 송나라를 거치는 망명 생활 동안 살기 위해 구걸까지 해야 했다.

그리고 오나라에 정착한 이후엔 역시 왕위에 오르지 못한 불운한 공자 광을 만난다.

그는 사촌 형의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고 호시탐탐 쿠데타를 노리고 있었다.

 

모사와 계책으로 광을 왕으로 만든 오자서는 오나라의 실력자가 된다.

오자서에게 큰 신세를 진 왕 합려는 오자서의 복수를 도와준다.

초나라, 진나라, 월나라를 차례로 제압하고 춘추패자를 꿈꾸던 야망이 오자서의 개인적인 욕망과 맞아 떨어진 것이다.

오자서는 수 년 동안 칼과 창을 다듬었다.

그리고 오나라 대군을 휘몰고 초나라를 쳐들어갔다.

 

수도인 영까지 점령한 그는 자신의 가문을 멸족시킨 초나라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300번의 채찍질을 퍼붓는 복수를 한다.

세상은 그의 복수심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오자서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초를 제압한 오왕 합려는 오자서를 앞세워 월나라와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월왕 구천의 역공에 합려는 부상을 입고 그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고 만다.

 

오왕 합려는 아들 부차에게 유언을 남긴다.

 

“월왕 구천을 잡아 내 죽음을 복수하라.”

 

부차는 그 유언대로 국력을 키우고 마침내 월왕 구천을 포로로 잡는데 성공한다.

오자서는 부차에게 월왕 구천을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구천의 뇌물에 눈이 먼 간신 백비의 농간으로 구천은 월나라로 돌아간다.

 

오자서는 수없이 부차에게 월나라를 경계하라 간언했지만 부차의 욕망은 북쪽 제나라를 점령하고 뒤이어 중원을 자신의 발아래에 꿇리는 패자의 자리에 가 있었다.

게다가 부차는 월왕 구천이 보낸 절세미인 서시에게 푹 빠져버리고 간신 백비의 모함을 그대로 믿어 오자서에게 칼을 내려 자살을 명령한다.

오자서는 자결했다.

 

오자서는 오나라 왕 합려와 부차를 2대에 걸쳐 왕위에 올린 절대 공신이다.

또한 그의 정치와 군사 지휘로 오나라는 춘추패자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

그 이유는 굽히지 않은 강직함과 다른 사람의 의견을 고려치 않는 편협함, 그리고 관용을 모르는 잔혹한 성품 탓이다.

 

군주로서 배포와 그릇이 큰 합려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부차는 오자서의 이러한 성품과 처세학을 ‘올드하게’ 여겼다.

사사건건 자신의 의견에 반대를 일삼는 신하가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것이다.

오자서의 죽음은 오나라와 부차의 멸망으로 연결되었다.

결국 부차는 오자서의 예언대로 그가 죽은 뒤 9년 만에 월나라 구천에게 잡혀 자결하고 오나라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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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의 모함에 빠져 멸문지화를 당하다

 

오자서는 기원전 6세기 경 초나라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원이고 자서가 그의 자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초나라에서 공경 벼슬을 한 명문가였다. 오

자서의 증조부는 초 장왕의 총신으로 한때 세도를 누렸고 아버지 오사 역시 초나라 태자의 스승이다.

 

오사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첫째가 오상이고 둘째가 바로 오자서이다.

장남 오상은 온순하고 조용한 성격이었고 이에 반해 오자서는 어려서부터 고집이 세고 한번 뜻을 세우면 굽히지 않는 성격이었다.

물론 학문과 군사, 지리 등에 능통해 아버지 오사는 장남보다 오자서에게 더 큰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역사는, 세상은 누군가 한 사람에게만 햇빛을 주진 않는다.

오자서의 가문에 명운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한 인간의 질투와 권력욕이었다.

초나라 태자의 태부는 오사, 소부는 비무기였다.

소부 비무기는 오사를 선배이자 존경의 대상이 아닌 자신의 출세를 위해 넘어야 할 산으로 생각했다.

혼기가 찬 태자는 진나라 공주와 결혼을 결정했다.

 

진나라 공주가 오나라에 오는 날, 비무기는 진나라 공주를 보고 깜짝 놀랐다.

천하제일의 미녀였던 것이다. 비무기는 잔꾀를 부렸다. 곧바로 평왕에게 달려갔다.

 

“군주, 태자비가 될 진나라 공주가 천하절색입니다. 차라리 왕께서 비로 맞으시고 태자에게는 다른 혼처를 마련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평왕은 호색가이자 줏대없는 왕이었다.

비무기의 이야기를 듣고 진나라 공주를 직접 대면한 그는 욕심이 생겼다.

 

끝내 그는 며느리로 맞아야 할 여인을 자신의 부인으로 챙겼다.

그리고 태자에게는 다른 가문과 혼사를 연결했다.

비무기는 평왕의 총신이 되었다. 그야말로 채홍사 역할 한 번으로 권력을 거머쥔 것이다.

하지만 비무기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언젠가 평왕이 죽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면 자신의 간신 짓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은 불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비무기는 태자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작은 허물부터 시작한 비무기의 태자와 평왕 사이 이간질은 어느덧 ‘태자가 반역을 도모한다’는 역린까지 건드렸다.

평왕은 아들인 태자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때 비무기는 태자와 오사를 같이 엮었다.

평왕은 오사를 불러 문초를 시작했다. 오사는 이미 자신이 죽음에 덫에 빠진 것을 알았다.

비무기는 오사의 두 아들도 같이 제거해야 후환이 없다고 평왕에게 귀뜸했다.

 

평왕은 오사에게 “외지에 가 있는 너의 두 아들을 불러라. 그들이 온다면 너의 목숨을 살려주겠다.”

 

오사는 말했다.

 

“장남 오상은 온순하고 아비의 말을 잘 듣는 아이라 분명 올 것이다. 하지만 둘째 오자서는 고집과 주관이 뚜렷한 아이라 오지 않을 것이다.”

 

오사의 말대로 오상만이 초 평왕 앞에 당도했다.

평왕은 오사와 오상을 사형시켰다.

 

오자서는 “나는 당장의 비굴을 견디겠다. 그리고 기필코 아버지와 형의 복수를 할 것이다”고 맹세하고 태자와 함께 오나라를 떠났다.

정나라로 간 오자서와 태자는 정나라의 도움으로 군사를 일으키려 했지만 오히려 정나라 왕은 태자를 죽이고 말았다.

여기서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오자서는 태자의 아들 승을 데리고 송나라 등을 떠돌다 오나라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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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과 음모, 잔혹한 암살로 권력을 잡다

 

오나라에 정세를 살피던 오자서는 공자 광을 주목했다. 그는 야심가였다.

오나라 19대 왕 수몽은 아들 중 막내인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계찰은 왕위를 사양했고 이후 왕위는 장남, 차남으로 내려가다 결국 셋째 여말의 아들 요가 차지했다.

 

공자 광은 장남 제번의 아들로 당연히 왕위가 자신의 것이라 생각했다가 이복 사촌에게 빼앗겼다고 불만이 가득했다.

오자서는 광의 야망을 간파했다. 오자서는 그에게 전제라는 당대 최고의 자객을 소개했다. 그들은 계획을 세웠다.

전제는 검객이었지만 요리사 수업을 받았다. 그의 요리 솜씨가 세상에 퍼졌다.

공자 광은 요왕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평소 공자 광을 믿지 않았던 요왕은 수많은 경호병을 거느리고 왔다.

창검으로 둘러싸인 식탁에서 요리를 먹던 광이 “전제라는 요리사가 만든 생선요리가 별미입니다”라고 권했다.

평소 생선요리를 좋아하던 요왕은 전제를 부른다.

 

전제는 큰 생선 요리를 들고 요왕의 앞에 서서 요리를 권하는 척하며 순식간에 생선의 배에서 단검을 꺼내 요왕을 암살했다.

요왕의 경호병들은 일제히 전제에게 달려들어 그를 죽였고 그동안 매복해 있던 공자 광의 군사들이 요왕의 경호병들을 모두 제거했다.

공자 광은 군사를 이끌고 궁으로 가 요왕의 변사와 자신의 왕위 승계를 발표했다.

이가 바로 오나라 합려이다.

 

왕위에 오른 합려는 오자서를 특별 고문으로 임명하고 특히 요왕을 암살한 전제는 후히 제사를 지낸 후 그 가족에게 보상했다.

역사는 이를 ‘어복장검 漁腹長劍’이라 한다. 즉 ‘생산 뱃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칼’이란 뜻이다.

 

합려는 왕위에 올랐지만 편치 않았다. 요왕의 아들 경기가 탈출해 복수를 계획하고 있었다.

경기는 위나라에 몸을 위탁하고 각처에서 의용군을 모집했다.

경기는 그의 아버지 요왕과는 달리 영웅의 풍모와 기질을 갖고 있어 합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번에도 합려는 오자서를 불러 이를 상의했다.

 

오자서는 요왕 때와 마찬가지로 경기 역시 암살을 제안했다. 그리고 요리라는 자객을 불러 들였다.

합려와 오자서는 요리를 설득했고 요리는 암살에 동의했다.

하지만 천하의 요리라 해도 삼엄한 경호에 둘러싸인 경기에게 접근하기란 쉽지 않았다.

오자서는 잔인한 방법을 생각했다. 바로 반간계였다.

요리가 억울하게 죽은 요왕의 위해 합려를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도망한 것으로 꾸민 것이다. 그

리고 이 같은 사실을 경기가 믿을 수 있게 요리의 처와 자식을 실제 사형에 처하고 요리에게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다.

요리는 위나라의 경기를 찾았다. 경기는 요리에 관한 소문이 사실임을 알고 그를 받아들였다.

 

경기는 의용군 수천을 이끌고 오나라로 진군했다.

강을 건너기 위해 경기가 배 위에 올라서는 순간 요리가 창으로 경기를 찔렀다.

경기는 치명상을 입고 경호병들은 요리를 죽이려 달려들었다.

그 순간 경기는 “요리를 보내주어라. 자신의 처자식을 죽이면서까지 충성을 다하려 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두 명의 영웅이 죽을 수는 없다”라고 명령했다.

곧 경기는 죽었다. 오나라에 도착한 요리는 합려와 오자서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그에게 상을 내리려 하자 요리는 “나는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 아무 잘못도 없는 내 처와 자식을 죽였고 또한 새 군주를 위해 옛 군주의 아들을 죽였으니 이 또한 천하에 대한 의리가 아니다. 내가 상을 받고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면 세상에 대한 면목이 없다”라 말하고 스스로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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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의 병법가 손무를 영입하다

 

오자서는 잔혹했다. 두 명의 왕과 왕자를 암살로 죽이고 오나라의 2인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최종 목적인 초나라 평정을 위해 합려를 독촉했다.

하지만 합려는 서두르지 않았다. 오나라의 국력과 군대가 초나라를 압도한다는 자신감이 부족했다.

이때 오자서는 한 명의 인재를 천거했다. 그가 바로 손무이다.

 

손무의 집안은 대대로 제나라에서 벼슬을 지냈지만 변란에 휩싸여 가문이 쑥대밭이 되자 오나라로 망명한 상태였다.

당시 손무는 병법연구의 대가였다. 이 소문을 듣고 오자서가 손무를 영입한 것이다.

 

손무를 만난 합려는 처음에는 신통치 않게 그를 여겼다. 그리고 곧바로 시험을 했다.

궁녀 180명을 두 패로 나누어 군대를 만들어 보라는 지시였다.

손무는 곧장 궁녀들을 90명씩 무리 짓고 두 부대의 대장으로 합려의 후궁을 각각 임명했다.

그리고 장수의 명령을 전달하는 신호병을 두었다. 손무는 두 여군 부대를 지휘했다.

하지만 이들은 깔깔거리며 장난치기에 바빴다. 몇 번의 지휘를 무시하자 손무는 곧장 명령을 내렸다.

 

“전장에서 장수가 부대에 명령을 내리면 신호병은 이를 부대에 전달해야 한다. 내가 처음 내린 명령을 신호병이 전달했다. 나는 두 번째 명령도 내렸고 이를 신호병이 부대의 대장들에게 분명히 전달했다. 그런데 대장들이 이 신호를 따르지 않은 것은 군법으로 다스릴 중죄이다. 두 명의 대장을 당장 참수하라.”

 

이 소식을 들은 합려는 훈련장에 측근 백비를 보내 ‘후궁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손무는 듣지 않았다.

 

“장수는 전장에 나오면 비록 군주의 명령이라도 거부해야 한다. 즉각 참수하라.”

 

두 명의 후궁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후 궁녀들은 손무의 지휘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합려는 손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의 청을 거부하고 후궁을 죽인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다.

그러자 오자서가 나섰다.

 

“군주, 어찌 손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장차 그는 오나라의 보물이 될 존재입니다. 겨를 취하고 알곡을 버리려 하십니까?”라는 오자서의 간언에 합려는 드디어 손무를 오나라군대의 총참모장으로 받아들였다.

이 손무가 후일 세계 3대 병법서 중에서 으뜸으로 손꼽히는 <손자병법 孫子兵法>의 저자이다.

 

이후 오나라는 일취월장했다. 오자서는 손무와 힘을 합쳐 오나라의 군대를 강력한 집단으로 만들었다.

기원전 506년 합려는 초나라를 향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손무의 지휘를 받는 오나라의 군은 무적이었다.

단숨에 국경을 돌파해 초나라 수도인 영까지 점령했다.

 

오자서는 초나라 소왕을 찾았지만 그는 이미 도망간 뒤였다. 오자서는 평왕에 대한 복수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평왕은 이미 죽어 무덤에 있었다. 오자서는 무덤을 파헤치고 평왕의 시신을 꺼내 300번의 채찍질을 가했다.

그야말로 처절한 복수를 한 것이다.

 

이를 안 초나라의 대신이자 오자서의 친구인 신포서가 오자서에게 “한때 모셨던 주군의 시신을 꺼내 이렇게 욕보이는 것은 군자가 할 도리가 아니다”라고 나무랐다.

세상의 인심도 오자서의 복수심은 이해하지만 죽은 평왕에게 채찍질을 한 것은 심했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오자서는 세상에 대고 이렇게 외쳤다.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 이 같은 나의 행동이 도리에 어긋나는 것을 나도 알지만 어쩔 수 없다”라고 자신의 행동을 설명했다.

훗날 사람들은 오자서의 말에서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라는 뜻의 ‘일모도원 日暮途遠’이란 고사성어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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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 백비의 모함으로 자살하다

 

오자서는 ‘상국 相國’의 자리에 올랐다. 상국은 재상으로 외지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 관직이다.

오자서는 초나라에 대한 철저한 복수를 행한 후 오왕 합려를 춘추패자로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나라 남쪽의 월나라를 제압해야 했다.

 

오자서는 군대를 정비하고 훈련의 기간을 갖자고 했지만 합려는 서둘렀다. 군대를 몰아 월나라를 침공했다.

하지만 월나라는 만만한 국가가 아니었다. 월왕 구천은 똑똑했고 그보다 그를 보좌하는 명재상 범려가 있었다.

합려는 서둘러 월나라를 공격하다 범려의 계략에 휘말려 전투에 패하고 큰 부상을 입었다.

 

합려는 아들 부차를 불러 “네가 왕위에 오르면 월왕 구천에게 죽임을 당한 나의 복수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부차는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할 일이 호시탐탐 왕위 자리를 노리는 형제들과의 싸움이었다.

여기서도 오자서의 계략과 지모는 빛을 발해 부차는 형제들을 제압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장작더미에서 잠을 잤다(‘와신 臥薪’). 그리고 자신이 출입할 때마다 “월왕 구천을 잊지 마라”는 구호를 병사들에게 외치게 했다.

오나라는 부차의 솔선수범과 오자서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다시 강한 국가가 되었다.

 

기원전 494년 부차는 회계산에서 월왕 구천을 그야말로 쥐구멍으로 몰았다.

항복하고 속국으로 지내겠다는 구천의 항복 사자가 당도했다.

오자서는 “월왕 구천을 죽여서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라고 수없이 간언을 했지만 부차는 듣지 않았다.

이미 구천이 범려를 통해 부차의 측근인 백비에게 손을 쓴 것이다.

백비는 엄청난 뇌물을 받고 ‘구천을 죽이는 것보다 속국으로 삼고 굴욕을 주는 것이 낫다’는 논리로 부차를 설득했다.

 

구천은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그는 오왕 부차에게 절세미녀 서시를 헌납하고, 부차의 측근이자 간신인 백비에게는 수없이 많은 뇌물을 주면서 부차의 주관심사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부차는 백비의 말만 듣고 남쪽의 월나라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북쪽의 제나라, 진나라를 정벌하는데 신경을 썼다.

오자서는 간언을 올렸다.

 

“주군, 월왕 구천은 반찬 하나로 밥을 먹고 백성과 동고동락하며 국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지금 북쪽을 경계할 시기가 아닙니다. 제나라가 피부에 생긴 병이라면 월나라는 심장에 생긴 우환입니다. 월나라를 쳐야 합니다. 어떤 의사도 병을 치료하면서 그 뿌리를 남겨놓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월왕 구천은 오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전을 할 때마다 부차에게 푸짐한 음식과 재물을 올려 환심을 샀다.

오자서는 이 같은 구천의 행동이 오나라를 길들이는 것이라고 걱정했지만 부차는 듣지 않았다.

오자서도 더 이상은 부차가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부차는 오자서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오자서는 제나라에서 돌아올 무렵 아들을 불러 당부했다.

 

“내가 보기에 오나라의 번성은 끝난 것 같다. 나는 오나라로 가고 너는 여기 제나라에 남아 가문을 잇도록 하라.”

 

이 소식을 들은 간신 백비가 부차에게 ‘오자서가 제나라의 첩자였으며 그래서 제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이간질을 했다.

부차는 주저 없이 사신을 오자서에게 보냈다. 사신의 품에는 단검이 있었다.

오자서는 “내가 주는 단검으로 자결하라”는 부차의 명을 받고 분노에 치를 떨었다.

 

“일찍이 내가 합려를 왕으로 만들고 수없이 많은 왕자들이 있었지만 그 아들 부차도 왕위에 올렸다. 그리고 나라를 경영하고 군사를 부리며 충성을 다했는데 간신 백비의 말만 듣고 나에게 죽음을 내리다니. 내가 죽거든 내 두 눈을 성문위에 걸어라. 내가 죽어서도 월나라 군대가 오나라에 진군해 오는 모습을 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결했다.

 

부차는 오자서의 유언을 듣고 분노했다. 그의 시신을 가죽 자루에 담아 강물에 버리라 했다.

강물에 떠다니던 오자서의 시신을 백성이 거두어 묻어주고 사당을 지었다. 참으로 허무한 죽음이었다.

이때가 기원전 485년이다. 오자서는 1000년 후 당나라 때 복권되어 영렬왕으로 추존되었다.

 

오자서를 죽인 오왕 부차는 그 뒤로도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며 국력을 낭비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

그러고 기원전 473년 끝내 월왕 구천에게 패해 포로로 잡힌 뒤 자살했고 오나라도 멸망했다.

월왕 구천은 그동안 이용했던 간신 백비도 죽였다. 죄목은 ‘충성스러운 신하가 아니다’라는 이유였다.

 

 

▶# 처세학 | 리더가 바뀌면 처세도 달라져야 한다

 

역사가 사마천은 <사기> 열전에서 오자서에 대해 ‘오자서는 성품이 굳세고 사나워 너그럽지 못하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원망하고 시기하고 적을 대하듯 했다. 또한 그가 제나라에 사자로 가 제나라 포 씨에게 아들을 부탁했다. 이는 오나라 안에서 뜻을 얻지 못하고 밖에서 다른 제후에게 몸을 의탁한 것과 다를 바가 아니다. 선왕 합려를 모신 공을 내세워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를 한탄하고 원망했다’고 평가했다.

 

오자서가 합려와 부차를 왕위로 올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또한 전장에서도 공이 작지 않은데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은 분명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간신 백비의 존재를 등한시한 것이다.

백비도 본래 오자서와 마찬가지로 초나라 사람이었다.

그 역시 정치 싸움에 가문이 무너지자 오나라로 망명한 처지였다.

 

하지만 당시 오자서의 측근들은 백비를 들이지 말자고 했다.

백비의 성품이 간특하고 그의 관상이 배신의 상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오자서는 이를 개의치 않았다. “백비도 나와 같은 고통을 겪었는데 내가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처지가 비슷하니 서로 도와줘야 할 것이다”라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백비는 오자서의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두 번째는, 손무의 간곡한 충고를 거절한 것이다.

손무는 오자서의 추천으로 오나라군을 지휘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초나라를 정벌하고 특히 회계산에서 월나라 구천을 재기불능 상태에 빠지게 한 전투의 지휘관이었다.

하지만 손무는 딱 거기까지였다. 손무는 은퇴를 결심했다. 그리고 오자서에게도 같이 물러나자고 권했다.

 

“오공, 자네나 나나 모두 오나라 사람이 아니네. 그럼에도 이렇게 공도 세우고 벼슬도 했으니 이제는 물러나 조용히 살아야 할 것이네. 더운 여름이 오면 반드시 추운 겨울이 오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에 접어드는 것이 인생의 이치이네. 또한 신하는 공을 이루면 몸은 물러나야 하는 것이네. 같이 물러나세.”

 

하지만 오자서는 손무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그는 초나라를 쳐 개인적인 원한을 갚았지만 월나라 구천에게 목숨을 잃은 합려의 복수를 이루고 싶었다.

또한 자신의 능력과 병법으로 대를 이어 오나라를 춘추의 패자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컸다.

 

세 번째는, 리더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오자서는 합려의 사람이었다.

그의 처세학은 합려의 리더십에 맞춰져 있던 것이다.

합려는 아들 부차보다 군주로서 배포와 그릇이 훨씬 큰 영웅이었다.

그는 때로는 귀에 거슬리는 오자서의 간언과 고집도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부차는 새로운 리더였고 그에게 오자서의 고집과 간언은 반대만 하는 늙은 노신의 옹고집처럼 보인 것이다.

 

또 하나는 오자서의 성품이다.

그가 요왕과 그의 아들 경기를 암살한 경우나, 시신을 파내어 300번의 매질을 가한 점 등을 보면 타협과 유연성이 부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로지 강한 힘과 의지로 전진하는 스타일인 것이다.

이로 인해 오자서는 그 명성과 능력에 비해 백성들의 인심과 관료들의 심복을 얻지 못했다.

비록 간신 백비의 농간이 있었다 하더라도 부차가 자살을 명령하는데 어느 누구도 나서서 이에 반대치 않았던 것이 그 증거이다.

 

어쩌면 오자서는 불운한 영웅이었다.

초나라에서는 가문을 잃었고, 그가 받아들인 백비에게 모함을 받았으며 그가 왕위에 올린 부차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한 인간의 여정으로는 가혹한 운명인 셈이다.

하지만 그의 굳고 강한 의지와 불굴의 투지 그리고 손무를 영입해 오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든 공적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처세의 기준은 내가 아닌 바로 ‘그’이다

 

여름에도 냉수보다는 온수를 마시는 것이 건강에 좋은 것은 사실이다.

특히 장이 좋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하지만 건강을 생각해서 온수를 마시던 사람도 때로는 시원한 냉수나 맥주가 먹고 싶을 때가 있다.

생각해보라. 만약에 상사가 그러한 경우라면 당신은 어떤 처세를 해야 하는가?

 

1. 그래도 장이 안 좋으시니 건강을 생각해서 온수를 드셔야 합니다.

 

2. 시원하게 맥주 한 잔 정도는 오히려 건강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정답은 없다.

그만큼 상사를 모시는 처세가 어렵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에 빈틈이 있는 것이다.

1번을 고집스럽게 권해도 이를 자신에 대한 충성으로 받아들이는 상사가 있을 것이고, 2번을 권해도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상사를 모신다고 판단하는 상사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사의 마음의 그릇을 먼저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지금 냉수 한 대접을 마시고 싶지만 그래도 끝까지 온수를 권하는 부하직원의 마음을 헤아리는 상사인지, 고집스럽고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군, 하고 내치는 상사인지를 먼저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처세는 나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있고 그 상대는 나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는 ‘갑’인 것이다.

갑의 성품, 취향, 기호를 파악하는 처세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갑은 변화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가 항상 중국집에서 짬뽕보다 짜장을 선택한다고 미리 고정된 정보를 입력치 말아야 한다.

어느 날, 그가 짬뽕이 먹고 싶을 때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놔야 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갑 자체가 바뀌는 것이다. 지금까지 같이 일했던 상사인 부장이 바뀌고 새로운 부장이 오는 경우이다.

이 경우 모든 데이터를 새롭게 작성해야 한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부장 앞에서 전임 부장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비교는 부등호가 자신의 쪽으로 열려져 있어도 비교 자체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처세,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자. 단 하나만 기억하면 되는 것이다.

바로 기준점이 내가 아닌 ‘그’라는 점이다.

 

 

 

박기종(커리어코칭칼럼니스트) / 사진 pixabay.com 오자서 석상 사진 위키미디어자료제공 Citylife
발행일 2016.08.03기사입력 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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