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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시대가 만든다. 간신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 역사에서 최고의 간신으로 손꼽히는 진회는 어쩌면 시대의 희생양이다.

그는 기개 넘치는 젊은 엘리트에서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로 역사의 지탄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진회에 대한 변명도 분명 존재한다.

즉 그가 간신이 된 것은 ‘때로는 굴욕의 평화가, 명분뿐인 죽음보다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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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박한 채 무릎 꿇고 있는 진회의 동상

 

역사는 충신과 영웅을 기록해 후대에 교훈과 감동을 남긴다.

또한 간신도 기록으로 남겨 이 역시 사람들의 경계로 삼는다.

 

중국 역사에서 간신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멀리 춘추시대 제나라의 역아는 감히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간신이었다.

자신의 세 살짜리 자식을 삶아 군주에게 올리고 아부를 해 벼슬을 했으니 말 다했다.

 

진시황제의 일개 환관이었지만 문고리 실세였던 조고 또한 간신의 대명사이다.

시황제의 유언을 위조해 멍청한 군주 호해를 2세 황제로 올려 한마디로 나라를 들어먹었다.

당나라의 이임보, 명나라의 엄숭도 ‘간신 리스트’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명 간신’들이다.

 

하지만 이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간신이 있다.

그는 무려 800여 년간 간신의 대명사로 불리며 지금도 중국인들이 손가락질 하는 인물이다.

바로 송나라의 재상 진회이다. 한마디로 ‘킹 오브 간신’이다.

 

항주의 서호. 이곳엔 중국인이 삼국시대 촉나라 관우와 함께 가장 존경하는 충의의 상징 송나라 장군 악비의 묘가 있다.

후에 악비가 왕으로 추존되어 악왕묘라 불리는 이곳은 항주를 대표하는 관광지이다.

이 악왕묘에는 진회와 그의 부인 왕 씨, 그리고 당시 악비를 모함한 간신들의 동상이 뒤로 손이 묶인 채 무릎 꿇고 있다.

죽어서도 악비에게 죄를 갚으라는 후대 사람들의 살아있는 경고인 것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악비 상에게는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진회의 동상에는 하도 침을 뱉어 ‘침을 뱉지 마시오’라는 푯말이 붙어 있다.

충신의 대명사와 간신의 대명사 격인 인물을 나란히 보고 나오면 그 앞 상점에서는 ‘유조’라 불리는 일종의 밀가루 꽈배기 튀김을 판다.

중국인들은 유조를 악비를 죽인 진회 부부의 몸을 비틀어 튀긴 음식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야말로 만고의 역적이자, 간신으로 불리는 진회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가 간신으로 불린 결정적인 이유는 송나라 중기 금나라의 침공에 화의를 앞세우는 주화론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이고 신하의 나라를 자처했고 또한 화의를 위해 당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던 악비를 모함해 처형했다.

이로 인해 960년 조광윤이 세운 송나라는 수도 개봉 시대를 마감했고 송 고종이 임안, 즉 지금의 항주에 수도를 정하고 남쪽으로 피난을 가 제2의 건국을 했다.

 

역사는 이를 북송과 남송으로 구분한다.

즉 이렇게 국토의 반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빼앗기고 남쪽으로 쪼그라든 원인이 모두 재상이었던 진회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중국은 악비를 ‘민족의 영웅’에서 ‘충성스런 장군’으로 격하하고 대신 진회의 매국을 당시로서는 융통성 있는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재평가 작업을 하고 있다.

이는 다민족 국가인 중국의 역사공정 작업의 일환으로 한족인 송나라와 여진인 금나라의 투쟁도 다 같은 중국의 역사로 보는 시각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대중들은 악왕묘에서 진회의 포박을 풀어줄 생각이 없다.

그것 또한 시각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엄연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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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이 진회 (C)helennawindylee 위키미디어

 


▶국가의 정통성과 기개를 주장한 젊은 엘리트

 

진회는 1090년 강소성에서 태어났다.

진회의 아버지는 시골마을의 현령을 지냈지만 그의 집안은 보잘 것 없었다.

하지만 진회는 똑똑하고 능력이 있었다. 한마디로 흙수저 출신에서 금수저로 출세한 것은 그의 노력과 집념 때문인 것이다.

 

진회는 1115년 25세에 과거에 합격하고 순조로운 출세길에 들어섰다.

당시 황제는 휘종, 그는 예술적 감각에서 탁월했지만 국가 운영 능력에서는 무능에 가까웠다.

 

송나라는 태조 조광윤 시대부터 국가의 통치이념이 된 문치주의로 국력에 비해 군사력이 약했다.

북쪽으로는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골칫거리였고 서쪽은 서하가 호시탐탐 송나라를 넘봤고 남쪽국경 역시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요나라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송나라는 요나라 옆에 있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동맹을 맺고 요나라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이로서 요나라라는 고민거리가 사라졌지만 송나라는 금나라와 바로 국경을 맞닿게 되었다.

사실 요나라가 늑대라면 금나라는 호랑이였는데 이를 송나라만 모르고 있었다.

송나라는 동맹의 대가로 금나라에게 막대한 보상금을 지급하고 또한 3진의 영토를 금나라에게 주는 대신 지금의 북경지역을 확보하기로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송나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금나라를 그저 야만적인 무력집단 정도로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이다.

무시당한 금나라는 군대를 휘몰아 송나라에게 주기로 한 북경을 점령하고 남진을 시작했다.

당시 금나라 군대는 6만 명이었다. 송나라 군대는 금나라에 비해 대군이었지만 실제 전투에서 금나라 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송나라 장군인 여경은 “금나라는 대장군이 전투가 벌어지면 직접 선두에 섰고 화살이 날아다녀도 갑옷도 입지 않은 채 태연하게 지휘했다. 그에 비해 송나라의 장군들은 전장터에서 수 백리 떨어진 곳에서 전투를 지휘했다”고 기록했다.

 

파죽지세의 금나라군에 송 휘종은 아들인 태자에게 양위하고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흠종이 뒤를 이었다.

 

1126년 금나라는 송나라 수도 개봉 인근까지 진격했다.

그리고 송 흠종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했다. 당시 원외랑 벼슬에 있던 진회는 상소를 올렸다.

 

‘금나라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 3진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선 1진만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벌어 우리의 힘을 기르고 방비를 해야 합니다. 또한 백관을 소집해 상세히 토론을 해 금나라와의 관계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 전에는 폐하께서 금나라 사신을 직접 대면하지 마시고 전각 밖에서 접견하셔야 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기개 넘치는 젊은 관리의 목소리였다.

 

금나라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곧바로 송나라를 공격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송 흠종은 70여 명의 관리를 소집해 토론을 하고 찬반 투표에 붙였다.

금나라의 요구를 들어주자는 표가 36명이었고 진회는 반대표를 던졌다.

조정의 여론이 주전파, 주화파로 양분 된 것이다.

 

우유부단한 송 흠종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금나라는 개봉을 공격했다.

그들은 약속한 배상금 미지급, 3진 할양 미조치와 함께 금나라가 지배하던 거란족을 송나라가 뒤에서 부추겨 반란을 지원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금나라군이 송나라의 수도인 개봉까지 점령했다.

그리고 이들은 흠종을 폐위하고 당시 재상이던 장방창을 괴뢰 황제로 내세우려했다.

 

진회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장방창은 그저 놀고먹고 하는 무능한 재상이고 권력에 아부해 송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인물이다”라고 비판하면 송나라 왕통은 조 씨가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신 왕시옹이 금나라 군을 뒤에 업고 백관을 위협하며 장방창을 황제로 추대하는 위임장 서명을 강요했지만 진회는 끝까지 서명을 거부하며 조 씨의 송나라를 고집했다.

 

금나라는 개봉을 점령하고 바로 철군했다.

그러면서 송 휘종, 흠좀, 태후는 물론 진회를 포함한 무려 3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특히 진회를 금나라를 반대하는 주동 인물로 보았다.

이때가 1127년으로 이를 송나라에서는 ‘정강의 변’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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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 있는 죽음보다 굴욕의 평화가 그래도 낫다’

 

흠종의 동생 강왕 조구는 허베이에 있어 다행히 금나라로 잡혀가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송나라 조정은 남경 응천부에서 조구를 고종으로 추대하고 나라의 틀을 재정비했다.

남송 시대가 열린 것이다.

 

조정은 금나라와의 주전파가 장악했다.

금나라는 1130년 유예를 내세워 북송의 수도였던 개봉을 중심으로 제나라를 세웠다.

즉 남송과의 직접적인 대면에서 벗어나 위성국가인 제를 통해 남송의 대항을 방어하는 완충지역으로 만든 것이다.

남송은 금나라의 잦은 침공으로 수도를 이곳저곳으로 옮기다 1132년 오늘의 항저우에 틀을 마련했다.

각처에서 의용군이 일어났다. 한세충, 악비, 장준 등이 일종의 사병 의용군을 모아 금나라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한편 금나라로 끌려간 진회는 금나라의 황제의 동생 완안창의 눈에 띄었다.

완안창은 진회를 포로가 아닌 식객 수준으로 대접하며 그에게 많은 부분에서 조언을 얻었다.

1130년, 진회가 금나라를 탈출해 남송의 항저우에 당도했다.

진회는 완안창의 금나라군 원정대를 따라다니다 초주를 공격할 시기에 기회를 보아 탈출했다.

 

송나라 고종은 진회를 반갑게 맞이하며 그날로 예부상서에 임명했다.

하지만 조정과 민심의 여론은 진회에게 싸늘했다.

진회가 금나라에 포로로 있으면서 금나라와 밀약을 맺고 남송 조정을 장악한 주전론을 잠재우고 대신 화의를 주선하는, 일종의 금나라 간첩 역할을 하는 조건으로 풀려났다고 의심했다.

 

송나라 조정은 완전히 양분되었다.

진회를 중심으로 한 주화파와 악비와 한세충을 중심으로 한 주전파가 각기 세를 모으고 있었다.

악비는 자신의 정예부대인 악가군을 앞세워 승전보를 전해왔다.

백성들은 악가군의 활약에 희망과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진회는 악비의 승전은 일회성이고 장기적으로 보면 금나라와의 화의가 맞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송나라 고종으로서는 금나라에 끌려간 아버지 휘종, 형 흠종 그리고 어머니 태후를 비롯한 수많은 포로들을 귀환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금나라는 이를 철저히 이용했고 송 고종은 진회를 재상으로 임명하며 이 협상 업무의 전권을 일임했다.

그 무렵 송 휘종이 금나라 땅에서 죽었다.

송 고종은 더욱 아버지의 시신을 되찾아야 할 의무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악비를 비롯한 주전파는 “금나라를 믿을 수 없다. 화의는 실제적인 효력이 없는 약속이다. 우리는 지금 재상 진회가 나라 일을 맡아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고 있다. 후세의 조롱이 두려울 정도이다”라고 진회를 비롯한 주화파를 비난했다.

 

진회는 힘도 갖추지 못하고 명분만 내세우는 주전파의 득세가 오히려 국가의 안위를 해치는 요소라고 주장했다.

진회 자신이 금나라의 포로로 있으면서 금나라의 군사력과 지휘관들의 능력을 직접 대면했기에 이 같은 생각이 강하게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진회는 명분을 따르다 망하는 길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굴욕을 참고 후일에 도모해 힘을 비축할 것이냐는 선택에서 좀 더 현실적인 후자를 선택한 것이다.

즉 ‘명분 있는 죽음보다 굴욕의 평화가 그래도 낫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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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의를 위해 악비를 죽이고, 만고의 간신이 되다

 

남송과 금나라의 협상은 빠르게 진전되었다. 당시 정세는 금나라도 편치 않은 상태였다.

여진족을 기반으로 한 금나라는 군사력은 강했지만 중국 전체를 지배할 힘을 갖추지는 못했다.

 

첫째 사람이 부족했고, 통치 시스템을 만들어 낼만큼 문화나 관료 조직이 준비되지 못했다.

또한 금나라 북방의 몽고가 부족을 통합하며 강력한 힘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요나라 잔존 세력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송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명분과 기치를 높이 들고 화북을 되찾자고 말은 했지만 현실적인 능력에서는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1139년 이른바 소흥화의가 이루어졌다.

화의 내용은 남송은 금나라와 신하관계를 맺고 현재 제나라 유예가 통치하는 하남 섬서 일부 지역을 돌려준다.

그리고 금나라는 송 휘종의 시신과 송 흠종 및 태후를 비롯한 왕족과 포로를 돌려준다는 조건이었다.

 

진회의 주화파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극적인 화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진회는 협상을 통해 그래도 남송의 황제인 고종을 대신해 금나라 황제에게 자신이 대신 무릎을 꿇겠다는 조건도 받아냈다.

그야말로 송 고종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 것이다.

 

악비를 비롯한 의용군들도 병장기를 놓고 대신 농기구를 잡을 것이며 안정을 찾아 기쁘다는 상소를 고종에게 올린 정도로 이번 화의는 남송으로서도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을 벌어다 준 것이다.

 

하지만 금나라에 내분이 일어났다.

금나라 강경파인 완안올술이 정권을 잡으면서 송 흠종을 풀어주지 않았다.

대신 완안올술은 현재 남송의 고종을 폐위하고 송 흠종이 남송의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남송의 내부 분열을 노린 획책이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완안올술은 군대를 몰고 남하했다. 그러다 악비를 만나 주선진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완안올술은 다른 방법을 동원했다. 금나라와 남송의 진정한 화의를 위해서는 악비를 제거하라는 요구를 하였다.

 

당시 악비는 금나라 군대에 승전한 후 기세를 높여 ‘직도황룡 영회이성 直搗黃龍 迎回二聖’ 즉 바로 ‘금나라 수도 황룡부를 공격해 휘종 흠종 황제를 모셔오자’고 주장했다.

고종은 평소 악비를 신임하고 있었고 또한 악비의 말이 틀린 게 아니지만 확전을 주장하고, 흠종을 모셔오자는 소리에 심기가 불편해졌다.

진회는 고종의 속마음을 읽었다. 그는 평화를 위해 희대의 간신이 되기로 작정했다.

 

진회는 일단 악비를 비롯한 군벌들의 병권을 약화시키는 작전을 썼다.

그들의 군대를 중앙군에 편입시키고 악비는 추밀부사로 승진시키며 한직으로 몰아냈다.

이 과정에서 악비는 무려 12번이나 고종의 회군 명령을 듣지 않았다.

진회는 감찰어사 만사설을 부추겨 악비를 모함하게 했다.

악비가 장헌 등과 결탁해 병변을 도모했다는 것이었다.

 

고종은 악비를 비롯한 연루자를 모조리 잡아들였다. 그 심문을 진회가 맡았다.

진회는 악비, 장헌 그리고 악비의 양아들 악운까지 모진 고문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죄를 인정치 않았다.

진회는 고종에게 심문보고서를 올렸다.

 

악비는 사형, 장헌은 교살, 악운은 귀양에 처하자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송 고종은 이들 모두에게 사형을 명령했다.

진회는 악비는 몰라도 악운만은 살려주자 청했지만 고종은 듣지 않았다.

 

악가군을 이끌고 송나라 백성들의 희망이었던 악비는 이렇게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악비의 처형이후 한세충이 진회에게 물었다.

 

“도대체 악비의 죄가 무엇이오?”

 

“글쎄, 이유는 뚜렷하지 않지만 뭔가 그럴만한 일이 있을 것이오.”

 

이 같은 진회의 석연치 않은 답변이 이후 800여 년간 악비를 모함한 간신 진회로 낙인찍히게 된 결정적 이유 중 하나이다.

 

1142년 남송은 금나라와 화친을 맺었다.

남송 황제는 금나라 황제에게 신하의 예를 올리고, 황하 북쪽의 땅은 금이 지배하며 매년 25만 냥의 은과 25만 필의 비단을 조공으로 바치기로 결정한 것이다.

화친의 주역 진회는 금나라의 후원을 받으며 남송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1138년부터 1155년까지 무려 17년간을 재상으로서 권력을 행사했다.

그의 권력이 얼마나 강했으면 송나라 고종도 신발에 단검을 숨기고 다녔으며 자신의 측근들인 환관들도 믿지 못했다고 한다.

후에 진회가 죽고 나자 그제서 신발 속에 숨겨둔 단검을 꺼냈다고 한다.

1155년, 65세를 일기로 진회는 죽었다. 고종은 그를 ‘신왕 申王’으로 추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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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세학 | ‘능굴능신 能屈能伸’ 때로는 굽히고, 때로는 허리를 편다

 

진회는 살아서 재상으로 권세를 누렸고 죽어서 왕호를 하사받는 영예를 누렸다.

하지만 그의 명예는 오래가지 못했다. 1206년 남송 영종은 진회에게 내린 왕호를 박탈했다.

이를 계기로 진회에 대한 비판이 물밀 듯이 쏟아졌다.

 

매국노, 간신, 간첩 등 헤아릴 수 없는 죄목이 붙였고 반면 진회에게 죽임을 당한 악비는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기 시작했다.

이후 800여 년간 진회에 대해 역사적 단죄는 실로 무겁고 가혹했다.

그의 모든 행동, 결정, 처신은 간신이란 큰 글씨 아래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에 비해 악비는 영웅이 되었다.

 

물론 이런 이분법적 분류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이 결여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즉 고종이 악비를 비롯해 그의 아들 악운까지 처형한 것은 진회의 뜻이 아닌 고종의 의중이 개입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악비는 악가군을 이끌며 많은 전투에서 금나라를 물리치기도 했지만 그이 행적이 부풀려 졌다는 기록도 있다.

 

즉 언성 전투에서 악비의 승리는 악비군 2만 명과 완안올술의 1만5000명과의 싸움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비가 주선진 대첩에서 불과 800명으로 금나라 군대 10만 대군을 물리쳤다는 기록에 대해 후대 사가들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또한 당시 기록을 보면 악비를 비롯해 한세충, 오개 등의 의용군에게 군량미도 무한정 공급했고 이들은 전공도 마음대로 보고 했으며 조정과 중앙군의 지휘를 받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또한 악비는 개인적인 성품에서 대인관계가 부족했다고 한다.

의용군을 모집해 금나라에 대항할 강건한 기개였으니 절충과 타협 그리고 유연함은 당연히 부족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고종의 12번에 걸친 회군 명령을 거부했으며 고종에게 황태자를 빨리 세워야 한다고 진언하는 등 군권을 가진 자로서의 위협적인 자세를 고종에게 드러내기도 했다.

 

고종은 악비의 진언에 대해 ‘금나라에 가 있던 흠종도 돌아오고, 지금의 황제인 자신도 있는데 다음 권력인 태자까지 결정하라는 것은 하늘에 해가 3개나 떠있는 형상이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고종의 의심을 샀고 악비의 사형에 대해 당시 아무도 반대 의견을 내지 않았던 것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진회에 대한 격하는 남송의 국가정책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 크다.

남송은 비옥한 강남땅을 근거지로 해 국력을 비축했다.

비록 굴욕적이지만 금나라와의 화의로 인해 전쟁 걱정을 덜은 것은 남송에게는 큰 혜택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남송은 당시 기세를 올리던 몽고와 연합해 금나라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기 위해 금나라와의 굴욕적인 화의를 되돌리고 몽고와 연합하기 위한 명분과 ‘금나라와의 굴욕적 화의의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화의의 주체였던 황제를 직접 비판할 수는 없었다.

당연히 당시 재상이었던 ‘진회가 금나라와 모의해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비판의 주대상이 된 것이다.

또한 금나라 타도를 위한 애국심 고취를 위해 영웅이 필요했고 그것은 바로 악비가 된 것이다.

1221년 악왕묘를 짓고 그곳에 진회를 포박해 악비 앞에 무릎 꿇린 것은 이런 배경의 결과물이다.

 

금나라는 1234년 몽고와 남송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남송은 금나라보다 약 50여년을 존속하다 1279년에 몽고에게 점령당했다.

어쨌든 남송은 북송시대를 마감하고도 약 150여년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는 평화를 위해 간신이 된 진회의 유연한 사고와 감각도 한 몫을 한 것임에 틀림없다.

 

진회는 “대장부는 상황에 따라 상대에게 때로는 굽히고 또 때로는 펼 줄 알아야 한다”는 ‘능굴능신 能屈能伸’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만약 송나라가 금나라와 전쟁을 선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는 가정이 불필요하지만 아마도 송나라의 존망은 더 빨랐을 것이다.

 

150년 간의 굴욕적이지만 평화를 선택한 진회의 정치적 판단은 현재 중국이 국가 처세의 축으로 삼았던 ‘도광양회 韜光養晦’ 즉, ‘날카로움을 감추고 은밀히 힘을 길러 후일을 도모한다’는 것과 많이 닮았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진회는 간교한 인물이었다.

그는 시문에도 능해 이른바 ‘송체 宋體’라는 서체를 만들어 낼 정도로 명필이었다.

 

한 선비가 그의 필적을 모방했다. 진회의 명의로 된 서신을 들고 양주태수에게 가 자신에게 벼슬을 달라 한 것이다.

다행히 진회의 글씨를 본 적 있는 양주태수가 그를 붙잡아 진회에게 압송했다.

진회는 그를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벼슬을 주었다.

 

“이 놈은 보통 담력이 아니다. 누가 내 편지를 위조하겠는가. 이런 자는 차라리 내 옆에 두는 것이 적에게 가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만큼 진회는 전략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다.

또 한 번은 재상직 사퇴를 청하며 고종에게 “폐하, 제가 물러나면 다음 재상은 누구를 생각하시는지요?”라고 질문했다.

고종은 “그것은 그대가 물을 일이 아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진회의 치밀하고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성격을 알 수 있는 일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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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은 대리까지만 ‘의무교육’이다

 

직장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직장 혹은 인생 대차대조표를 그려본다.

결론은 뽀족한 수가 없다.

그저 참고 또 참으며 직장을 다니는 수밖에 없다.

 

심심해서, 경력관리 하려고 직장 다니는 1만 명 중 한 명의 타고난 금수저가 아닌 이상 대차대조표 조차 작성하지 말자.

결론은, 유연함이 정답이다. 옛말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키고, 군대에서는 중간만 하는 것이 좋고, 직장에서도 1, 2등이 끝까지 남아 있을 확률이 의외로 적다.

이것은 모두 유연함을 강조하는 말들이다.

 

모든 오디오에 볼륨 조절기가 있고, 자동차도 1단부터 8단까지 속도조절기가 있고 선풍기 바람도 강중약이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내 능력 자체가 페라리 같은 수퍼카가 아닌데 출발부터 10m를 4초 내에 달리겠다는 목표는 그야말로 ‘나를 모르는 무모함’이다.

 

직장에서 자신이 낼 수 있는 볼륨의 강도를 체크해야 한다.

그것은 직급, 능력, 팀분위기 혹은 리더의 성향에 따라 다르다.

자신의 부원들을 ‘어벤저스급’이라 여기는 상사는 거의 없다.

잘해야 프로야구단 타순 정도이다.

 

잘 달리는 1번 타자, 잘 치는 3번 타자, 해결사 4번 타자, 그저 인원 채우는 의미의 8번 타자를 상사는 머릿속으로 그린다.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역할과 능력을 잘못 판단하면 동료는 물론이고 상사와 부딪칠 확률이 100%로 높아진다.

실수와 업무 미숙으로 야단을 맞을 때조차 억울한 것이 직장생활인데 감정적이고 인격적인 모욕을 당하는 순간도 왕왕 있는 것이다.

 

판단해야 한다.

일상적인 야단을 치는 것인지, 아니면 부원들에게 경각심을 주지 위해 시범케이스가 된 것인지 혹은 나를 몰아내려고 생트집을 잡는 것인지, 말이다.

대개의 경우 허리를 굽힐 필요가 있다. 유연함은 의외로 강함을 이긴다.

즉 상대의 전의를 쉽게 수그러뜨리는 것은 강한 반발보다 부드러운 굽힘과 인정이다.

 

하지만 ‘나를 부서에서 쫓아내려는 경우’라면 그것은 허리를 펴야 하는 것이다.

당당하게 맞서되 예의와 절차를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강온의 전략을 다 펴야 한다.

때로는 사적인 자리를 마련해 정확하게 상사가 자신의 어떤 점을 ‘최악’으로 생각하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의외로 나도 모르는 행동, 말투, 일의 스타일 등 사소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직장을 ‘직업 선택의 자유’에 의한 하나의 장소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속 편한 소리다.

직장은 한마디로 ‘다녀야 하는 일종의 의무교육’ 같은 것이다.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우리는 의무교육을 받았듯이 직장생활의 의무교육을 연장하려면 학교 때와 비교해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시험 잘보고, 지각결석하지 말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것이다.

 

어렵지 않다. 주어진 업무 열심히 하고, 지각결근 하지 말고, 상사 말 잘 듣고, 직장 선후배, 동료들과 잘 어울리면 되는 것이다.

또한 의무교육 마치면 고등학교, 대학교로 자신이 선택한 진로로 갈라진다.

그러면서 서열이 매겨지고, 차별이 존재하는 것처럼 직장도 마찬가지다. 대리까지가 바로 의무교육이다.

 

과장을 다는 순간, 고등학생이 되는 것이고, 차장부장은 대학교와 마찬가지다.

그 과장을 달기 위한 순간부터 의무교육에 추가되는 하나 있는 것이다.

바로 처세라는 인간과의 관계이다. 그

때부터가 직장생활의 진짜 시작인 셈이다.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pixabay자료제공 Citylife
발행일 2016.08.18기사입력 2016.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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