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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는 거지, 탁발승, 홍건적 부대장이었던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는데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천재들의 공통점이자 단점인 자만과 자존감이 강해 정적이 많았다.
그의 선택은 정적과의 정면승부가 아닌, 다 버리고 떠나는 것.
그래서 유기는 명예와 가문을 보존할 수 있었던 중국 최고의 책사 중 한 명이다. 

 

 


▶‘장량, 제갈량, 유기’ 중국의 3대 책사 

수백 개의 나라가 불꽃처럼 타오르다 사라진 장구한 중국의 역사.
그 역사에는 제국을 창업한 황제도, 불세출의 영웅도 그리고 위대한 책사도 몸을 담고 있다.
역사가들은 이 수많은 영웅호걸 중에서 3명의 위대한 군사전략가이자 책사를 이견 없이 뽑았다.
첫 번째가 한나라 고조 유방이 “나의 꾀주머니 장자방”이라고 입버릇처럼 자랑하던 장량이다.
그는 항우와의 지난하고 불리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유방의 비밀 무기였다.
 
두 번째 인물은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 없는 인물, 유비의 명 참모이자 승상인 제갈공명이다.
촉나라가 삼국시대의 한 축으로 그 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제갈공명의 신출귀몰한 전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마지막 한 사람, 그가 바로 주원장을 도와 이민족 원나라를 멸하고, 별 볼일 없는 거지, 탁발승, 홍건적 부대장이었던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는데 막대한 공헌을 한 유기이다. 

이 중 장량과 유기는 통일제국을 완성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똑같은 운명의 길을 걸었다.
그것은 바로 피비린내 나는 토사구팽이라는 지옥불을 무사하게 건넌 것이다. 한나라 고조 유방과 명나라 홍무제 주원장은 절대 공신과 장군들을 숙청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고향마을에서부터 같이 자라고 수많은 전장터를 함께 누빈 형제 같은 장군들도, 명 참모로 나라를 세우는데 기둥 역할을 한 책사들도 모두 죽어나갔다. 하지만 장량과 유기, 두 사람은 황제가 깔아놓은 죽음의 덫에서 벗어났다.
당대 최고의 책사답게 자신의 운명까지 ‘생 生’의 계책을 마련한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 즉 공과 권력, 명예를 내려놓고 떠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본인들의 역할을 너무나 명확히 알고 있었다. 창
업까지는 같이 하지만 그 뒤에 따라오는 명예, 부, 권력은 황제와 함께 할 수 없다는 동서고금의 사례를 통해서이다. 그
래서 정량과 유기는 목숨과 명예 그리고 가문을 보존할 수 있었다.
제갈공명은 삼국을 정립하고 유명을 달리했기에 이들과는 운명이 달랐다. 

이 중에서 유기는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원나라의 관리로 몇십 년을 봉사하다 벼슬을 내려놓고 홍건적 도적 무리에 불과했던 주원장의 삼고초려를 받고 그의 책사로 종군했다.
 당시 주원장은 무수한 군벌 중에서 ‘넘버 4’ 정도에 해당하는 군소군벌이었다.
물론 원나라는 이름만 남은 껍데기 제국이었다. 유기는 주원장에게 군벌 중 최강자인 진우량과의 정면 대결을 주장했다.
그리고 치밀한 전략과 불같은 투지로 막강한 진우량의 대군과 함대를 파양호에 수장시키면서 중원 장악의 주도권을 잡는데 성공했다.
주원장은 1368년 명나라를 건국했다. 그러나 공신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유기는 공로에 비해 낮은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유기는 단 한마디 불평의 말도 꺼내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명나라 건국 불과 몇 년 만에 아내의 죽음을 이유로 시골로 낙향했다. 고
향에서 유기는 일체 정치와 담을 쌓고 바둑과 술 그리고 시문과 함께 했다. 

유기는 적이 많았다. 그는 원칙적이고 냉정한 인물이었다. 즉 천재들의 공통점이자 단점인 자만과 자존감이 강했다.
남경의 궁궐에서 주원장과 함께 권력을 행사하던 이른바 회서파의 중심 인물들은 항상 유기를 경계했다.
회서파 공신세력은 주원장과 동향출신들로 파벌을 형성하고 또한 성골의식이 강했다.
이들에게 유기는 그저 시골에 있는 은퇴한 노인이 아니었다. 언제든지 자신들의 현재 권력을 대신할 수 있는 강력한 대체재였다.
회서파는 아예 유기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회서파의 모함은 집요했고, 끈질기게 유기를 파고들었다.
처음엔 믿지 않던 주원장도 계속되는 모함에 그만 유기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에 유기는 병을 치료하겠다는 이유로 남경으로 올라와 황제의 옆에 거주했다.
적들의 눈에 뛰어야 덜 경계하고, 덜 두려워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야사에서는 회서파의 우두머리인 이선장과 호유용이 작당하고 독살했다고 하고 또 주원장이 유기의 죽음을 유도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유기는 주원장의 절대공신 37인 중 31인이 중도에 토사구팽 당한 것에 비하면 비교적 편안한 노후를 보냈고 만년의 주원장이 가장 안타까워하고 그리워했던 신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그가 다 놓아버리고, 떠났기 때문에 가능했다. 

 
 

▶천하의 기재, 거지출신 주원장의 책사 

유기는 1311년 저장성 온주 문성현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지주 집단의 핵심이었다. 어
릴 때부터 신동소리를 들을 정도로 똑똑했던 유기의 호는 ‘백온 伯溫’으로 사람들은 그를 유백온이라 불렀다.
그는 천문, 지리, 군사, 유학, 고전, 명리학 등 모든 학문을 섭렵했다.
유기는 원나라 말기 1333년, 22세에 과거 시험에 합격해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관직은 능력에 비해 한참 뒤떨어지는 자리였다. 그것은 원나라의 독특한 계급 구조 때문이었다.
원나라는 제1계급이 몽고인, 2계급이 색목인, 3계급이 북쪽 중국인이었고 마지막 4계급이 남송출신의 사대부였다.
이는 원나라 건국과 통치에 도움을 준 순서였고 남송 출신들은 끝까지 원에 저항했던 사실 때문에 모든 면에서 푸대접을 받았다.
유기는 4계급이었다. 자연히 유기는 지방의 작은 지역을 떠돌았다.
유기는 26세인 1336년 고안현 현승 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 더욱 정진했다. 

그 무렵 푸젠성 해안가에 소금 밀매업을 하는 방국진이라는 해적이 한창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유기는 관의 부름을 받고 토벌군에 참여하여 방국진의 세를 꺾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전멸 직전의 방국진은 뇌물을 써 극적으로 살아남고 오히려 관직까지 받았다.
유기는 이런 부정과 불의에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오히려 좌천당하고 말았다. 유기는 단박에 사표를 던졌다.
더 이상 관리로 일할 수 있는 명분도 의욕도 상실한 것이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유기는 공부하며 한편으로는 일종의 사병 조직을 양성했다.
당시 정세는 곽자흥의 홍건적이 큰 세를 떨치고 있었다. 곽자흥이 죽자 탁발승 노릇을 하다가 홍건적에 가담해 곽자흥의 사위가 된 주원장이 세력을 이어받았다.
주원장은 명목상 홍건적의 우두머리인 한림아를 모시며 2인자의 위치에 있었다.
또한 소금 밀매업자 출신 장사성과, 어부 출신으로 물질에 능숙하면서도 무예가 출중한 진우량이 최대 군벌로 이름을 떨치며 원나라를 무력화 시켰다. 주원장은 이 무렵 이들보다 한 단계 낮은 오국공의 지위에 있었다. 

주원장은 도적 무리에서 나라를 세우고 경영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만 해도 주원장의 주변에는 서달, 탕화, 요영충, 남옥 등 무신들뿐이다. 주원장은 이선장, 호유용을 영입해 관료조직의 틀을 마련했다.
이들은 학문과 능력을 겸비한 유능한 관리들이었다. 하지만 한 자리가 비어있었다.
그것은 정세를 분석해 종합적인 계획을 세워 주원장의 야망을 실현시킬 최고의 전략가였다.
즉 장량과 제갈량과 같은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주원장은 재야에 은둔한 유기의 소문을 들었다.
주원장은 그야말로 삼고초려와 스승의 예로 유기를 자신의 군사로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이때가 1860년이고 주원장의 나이 33세, 유기는 50세 때이다.
주원장은 유기와 함께 명사인 송렴도 영입해 이들을 위해 예현관을 짓는 등 극진한 대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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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 주원장 천하를 위한 판도를 만들다 

유기는 주원장에게 작은 것부터 조언했다.
 
“인재를 아끼고 영입에 주저하지 않으며 전쟁을 하는 중에도 농사의 중요성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다스리는 지역의 형벌은 가급적 가볍게 하고 세금도 융통성 있게 매겨 백성들이 수긍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라의 통치 이념은 유교에 두어야 합니다.”
 
주원장은 당시 남경을 함락하고 세를 확장하고 있었기에 유기의 합류는 그야말로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었다.
유기는 드디어 주원장에게 이른바 국가경영과 통일전략인 ‘시무십팔책’을 올렸다. 

유기는 주원장에게 과감하게 홍건적 때부터 명목상의 왕으로 모시고 있던 한림아와의 결별을 주장한다.
 
“언제까지 저런 목동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을 왕으로 모시고 있어야 합니까. 이제는 주군이 직접 전면에 나서 사람을 모으고, 민심을 수습해야 합니다”라고 제안했다.
주원장은 유기의 조언을 받아들여 한림아와 결별했다.
그리고 주원장의 최대 고민인 진우량, 장사성 두 명의 강력한 군벌과의 전쟁에 있어 유기는 진우량과의 정면 대결을 주장했다.
 
“장사성은 탐욕이 많아 눈앞의 이익에 움직이고 가진 것을 지키려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진우량은 나름 야망과 세를 읽을 줄 알아 그냥 놔두면 장차 큰 화근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우량을 먼저 공략해 그를 무너뜨리면 장사성은 자연히 세를 잃고 천하는 주군의 것이 됩니다”는 논리로 주원장과 그 주변을 설득했다. 

당시 진우량은 양자강 상류에 강력한 함대와 대군을 보유한 중원의 실질적인 최강자였다.
그와의 대결을 주장하는 유기의 논리에 주원장과 장수들은 수긍하면서도 내심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유기는 ‘빠른 결정을 해야 한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상류의 진우량, 동쪽의 장사성에게 협공을 당해 우리는 전선을 한 곳으로 집중하지 못하면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열
심히 훈련하고 빈틈없이 계략을 짠다면 숫자만 우세한 진우량을 충분히 꺾을 수 있다’고 다시 설득했다.
주원장은 결심했다. 전군에 진우량과의 일전을 명령했다.
1363년 주원장의 20만 대군과 진우량의 65만 대군이 파양호에서 부딪쳤다.
전투 초반, 진우량 군대의 인해전술에 질려버린 주원장의 장수와 병사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때 유기가 나섰다. 그는 큰소리로 전군을 지휘했다. 

“물러서지 마라. 투항하거나 도망가는 자는 모조리 참수할 것이다. 적군이 더 깊숙이 우리 진영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라. 그런 다음 매복한 군대로 공격하면 승리할 수 있다.” 

전투는 유기의 작전대로 진행되었다. 초반 기세를 올리던 진우량 군대는 깊숙이 도망가는 주원장 군대를 뒤쫓아 들어오다 그만 외통수에 걸려 무너진 것이다.
 주원장은 대승을 거두었다. 유기는 이 전투에서 승리뿐 아니라 주원장을 목숨을 구하는 공을 세웠다.
갑자기 유기가 주원장을 지휘선에서 내려 다른 함선으로 옮기게 했는데 배를 옮겨 타자마자 곧바로 빈 지휘선에 진우량의 불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졌다는 것.
이처럼 유기는 군사, 천문, 명리를 모두 통달한 주원장 군대의 최고 군사였다.
파양호 전투에서 승리한 주원장은 유기의 계획대로 이미 전의를 상실한 장사성 군대를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주원장이 중원의 실질적인 ‘넘버 1’이 된 것이다. 

▶손잡이 있는 주전자가 다루기 편하다 

1367년, 유기는 이선장 등과 함께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법전을 비롯해 각종 세법과 민생 안정책을 만들어 주원장에게 건의했다.
 나라의 건국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마련한 것이다.
이때 제정된 법률이 조선왕조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 <대명률>이다. 이듬해 주원장은 명나라를 건국했다.
유기는 초대 황제 주원장에게 평소에는 농사를 짓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병사로 징집하는 군위법을 건의했다.
이것은 평소 군사비 지출을 줄이면서 나라의 양곡을 관리하는데 유용한 법이었다. 또 민심을 사로잡기 위해 대사면령을 건의했다. 

주원장은 유기와 만난 지 8년만에 황제가 됐다. 그리고 주원장은 논공행상을 실시했다.
 엄청난 진통이 있었다. 모든 장수들과 문관들은 자신들이 명나라를 건국한 1등 공신이라고 자부했다. 

모두 다 1등 공신인 공작에는 장군으로는 탕화, 서달, 남옥, 요영충 그리고 문신으로는 유기와 이선장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주원장은 자신보다 세 살이나 많지만 자신을 형님으로 모시며 일생을 종군한 공신 탕화를 2등인 후작으로 봉했다.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이것은 주원장의 암시였다.
즉 누가 봐도 1등 공신인 탕화조차 2등 공신이 되는데 ‘어느 누구도 불만을 갖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선장은 1등 공신 공작으로, 유기는 그보다 한참 아래인 백작이 되었다.
봉록에서도 이선장은 4000석, 유기는 겨우 240석뿐이었다. 주원장이 유기를 푸대접하는 것에 모두 의문을 품었다.
하루는 주원장의 동지 같은 아내이자, 현명한 마황후가 직접 주원장에게 물었다. 

“폐하, 이선장은 폐하가 전쟁터를 누빌 때 내정을 잘 이끈 공이 있습니다. 하지만 유기는 천하의 대세를 폐하께 이끈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번 논공행상에서 유기를 이선장 뒤에 두는지 궁금합니다.” 

“나도 압니다. 이선장은 재물과 명예를 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니 능히 재물과 명예로 그를 조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기는 재물과 명예를 탐하지 않아 내 마음대로 그를 부릴 수는 없습니다. 즉 흠이 있는 사람이 부리기도 좋고 내치기도 편한 것입니다.” 

“예, 폐하. 손잡이 없는 항아리보다는 손잡이가 있는 주전자가 다루기 편하다는 말씀이군요.” 

주원장도 유기의 공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대인관계에는 높은 점수를 주지 않은 것이다.
유기는 원칙과 소신에서 절대 타협하거나 굽힘이 없었다. 아무리 황제라도 유기의 이런 점은 불편했던 것이다.
유기는 태사령에 어사중승이 되었다. 그는 관료의 부정부패를 감독하는 직책을 맡은 것이다.
자연히 관료들의 수장인 이선장, 호유용과는 대립관계가 형성되었다. 한번은 이선장의 측근인 이빈이 법을 어겼다.
이선장은 유기에게 선처를 부탁했지만 유기는 단박에 이를 묵살하고 이빈을 원칙대로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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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의 자만이 부른 정적의 모함 

이선장과 호유용은 유기에 대한 반감과 복수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재물과 명예욕이 없고 공신서열에서도 아무런 불평불만을 하지 않는 유기의 흥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 이선장과 호유용이 유기를 제거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주원장이 유기를 불렀다.
당시 이선장은 고령으로 은퇴를 청했고 주원장은 그 후임을 고민중이었다. 이선장을 필두로 한 회서파는 호유용을 차기 승상으로 밀고 있었다. 주원장은 유기에게 양헌, 왕광양, 호유용에 대한 인물평을 물었다. 

“폐하, 이 세 사람 모두 재상의 재목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 중에서도 호유용은 가마를 끄는 말 정도의 능력인데 오히려 날뛰다 가마를 뒤엎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입니다.” 

너무나 솔직하고 직설적인 평이었다. 그러자 주원장은 유기에게 승상자리를 권했다. 

“폐하, 저는 마음이 좁고 그릇이 작아 정무적인 일에는 맞지 않습니다.” 

결국 주원장은 호유용을 차기 승상으로 임명했다.
유기는 호유용이 승상이 되자 은퇴를 청하고 낙향했다. 호유용과 회서파는 주원장에게 유기를 끊임없이 모함했다.
매일 거듭되는 모함은 강도를 더해 ‘유기가 반란까지 모의한다’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주원장이 호유용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맞지 않다. 유기가 천하를 취할 생각이 있었다면 내가 나라를 건국하기 전에 기회가 있었고 유기는 그럴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라고 유기에 대한 신뢰를 드러냈다.
그러자 호유용은 ‘유기가 왕의 기운이 서려있는 곳에 자신의 묏자리를 구했다’는 모함을 더했다.
이번에는 주원장도 마음이 흔들렸다. 유기는 주원장의 의심을 알아채고 남경으로 올라와 주원장을 알현하고 자신의 병을 그대로 드러냈다.
주원장은 ‘1년에 한 번 남경으로 와 나를 알현하라’는 명령과 함께 유기가 고향으로 돌아가 요양하는 것을 허락했다.
1375년, 유기는 고향에서 66세를 일기로 죽었다. 

일설에는 이선장과 공모한 호유용이 유기를 병문안 한다는 핑계로 찾아가 독살했다는 설도 있고, 그것이 주원장의 지시였다는 설도 있지만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