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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광은 평생 ‘첩의 자식’이란 굴레와 멸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과 탁월한 처세로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까지 5명의 군주를 모시며 승승장구했다. 그는 조선조에서 처음으로 6조의 정랑으로 임명되었으며 군권을 지휘하는 오위도총관을 역임했고 또한 두 번의 공신 첩지를 받았다. 입지전이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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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사회 벽을 넘어선 우월한 처세 

학자들은 조선시대 간신을 열거할 때 임사홍, 김자점과 함께 유자광을 거론한다. 때로는 이완용을 넣기도 하지만 그는 조선 왕조의 명맥이 사실상 끊긴 구한말 시대의 인물이라 앞의 세 명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 중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인물은 단연 유자광이다.
역사나 드라마를 통해 알고 있는 유자광의 이미지는 모사꾼, 간신, 음모론자 등 한마디로 부정적인 평판이 대부분이다.
그가 이러한 부정적 이미지의 인물이 된 이유는 분명히 존재한다. 남이 장군을 역모로 모함해 죽였고, 무오사화를 일으켜 당시 조정에 진출해 세력을 모으고 있던 젊은 유학자 집단인 사림파의 씨를 말린 장본인이라는 기록 때문이다. 

하지만 학계 일부에서는 앞의 두 사건이 모두 유자광의 음모와 모함이 아닌 보수와 신진, 관학파와 사림파의 권력투쟁 산물이라는 의견도 있다.
오히려 유자광은 출신 성분으로 인해 평생을 지독하게 탄핵받고, 배척받았지만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출세를 했고 권력을 잡은 인물이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유자광은 첩의 자식이었다. 철저한 계급과 신분사회였던 조선에서 첩의 자식은 거의 ‘천형 天刑’과 같은 제약과 구속이 따랐다.
조선을 건국한 사대부들은 일부다처제 하에서 생산되는 많은 자손들을 모두 수용해 같이 갈 수 있는 관직과 재물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들은 정실부인의 소생인 이른바 적자만 자식으로 인정하고 첩의 자식은 모든 면에서 차별을 두었다.
그들은 호형호부를 할 수도 없었고 집안을 잇는 종손으로서도 권리도 없었으며 공적으로는 관직 특히 문관이 될 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
태종은 이를 ‘서얼차대법’이라 하여 아예 법으로 정했다. 서얼 출신은 한마디로 양반의 겉모습을 한 상놈이었다. 

유자광은 평생 이 같은 첩의 자식이란 굴레와 멸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과 탁월한 처세로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까지 5명의 군주를 모시며 승승장구했다. 더구나 그는 서얼 출신들이 응시할 수 있는 무과와 잡과, 그나마 그것조차도 품계를 5품이 넘을 수 없다는 엄격한 조선의 계급 벽을 뛰어넘어 문관으로도 고위직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조선조에서 처음으로 육조의 정랑으로 임명되었으며 군권을 지휘하는 오위도총관을 역
임했고 또한 두 번의 공신 첩지를 받았다. 명예로는 숭록대부에 부원군의 봉작까지 받은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흙수저와 다름없는 출신이었지만 유자광은 탁월한 두뇌와 날카로운 정세판단 그리고 뛰어난 무예 솜씨와 함께 글과 학문에도 능했다.
유자광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까지 많은 논쟁이 있었다.
물론 그는 조선의 4대 사화 중 두 번이나 그 중심에 있었고 역모 사건까지 고변하는 등 역사적 회오리를 몰고 온 ‘논쟁적 인물’임은 분명하다. 그것은 그가 원하던 바일 것이다. 

엄격한 조선의 계급 사회에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불과 몇 가지 뿐이었다.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는 것, 왕조에서 가장 중범죄인 역모를 적발해 고발하는 것, 그리고 반정을 통해 군주를 바꾸는 방법이다.
유자광은 공교롭게도 이 세 가지를 모두 겪은 유일한 인물이다. 이시애의 난에서 공을 세웠고, 남이의 역모를 고변했으며, 중종반정의 주역으로 공신이 된 것이다.
운명이 그를 바꾼 것인지, 그가 운명을 개척한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격변과 혁명이라는 수단이 동원되지 않았다면 유자광은 ‘서얼 출신’이라는 딱지를 뗄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유자광 스스로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에 대한 평가에서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부분도 인정된다. 하지만 그가 온전히 자신의 영달과 야망을 위해 남을 해하고, 군주를 농락했으며, 백성과 조정의 안위를 전혀 고려치 않은 간신이라는 평은 너무나 박하다.
오히려 철저한 신분 사회의 벽을 허물고 한 계단 높은 곳을 올라가기 위해 스스로 ‘운명의 사다리’를 만든 당대 최고의 처세가로 평가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상소문 하나로 세조의 마음을 사로잡다 

유자광은 1439년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중추부지사를 지낸 유규이며 어머니는 노비 출신인 나주 최 씨로 알려져 있다.
그의 출생에 관한 일화가 있다. 그의 아버지 유규가 하루는 산봉우리 세 개를 입으로 삼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꿈이 범상치 않음을 직감한 유규는 부인과의 동침을 생각했지만 마침 부인이 자리를 비우며 대신 여종을 그날 밤 취했고 그 여종이 유자광을 임신했다고 한다.
훗날 유자광이 비범하게 자라자 유규는 집안의 안녕을 위해 유자광을 없앨 생각도 했다고 한다.
해서 마을 앞 요천이 범람하자 유자광에게 강 건너 메밀밭에 가서 메밀싹이 잘 났는지 보고 오라고 한다. 어린 유자광이 강을 건너다 죽을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다.
하지만 영리한 유자광이 나무판자를 물에 띄우고 무사히 건너와 유규에게 메밀싹이 잘 나고 있다고 고하자 유규가 혀를 찼다고 전해진다. 

유자광은 어려서부터 영리했다. 독서도 열심히 했고 머리도 명석해 또래 아이들에 비해 돋보였다.
유규는 유자광 모녀를 남원으로 보내 그곳에서 생활하게 했다. 유자광은 고모집이 있는 정읍과 남원을 왕래하며 컸고 자라서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하지만 유자광에게는 서얼 출신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그는 어디를 가도 서자라는 멸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공부를 하고, 무예를 익혀도 그것을 나라를 위해 쓸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법은 태종의 명으로 서자 출신들은 과거를 통해 관직 등용 자체를 법으로 금지했다.
즉 문관이 될 수 있는 길은 아예 없었다. 오직 무과나 잡과에만 응시할 수 있었고 그 또한 5품 이상은 올라 갈 수 없었다. 애초부터 서자 출신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유자광은 무신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갑사가 되었다. 유자광은 무예에 능했다.
특히 말을 잘 타고, 활도 잘 쏘았다고 한다.
평생 평범한 군인의 길을 걸었을 유자광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이 발생한 것이다. 함길도에서 토호로 세력을 형성하던 이시애가 세조의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으로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자 반기를 든 것이다.
그는 한명회, 신숙주와 내통한 것처럼 소문을 내 세조는 두 명의 중신을 구금하기도 했다.
 
세조는 난이 발생하자 구성군 이준과 도총관 강순, 남이 장군을 지휘부로 군대를 파병하면서 한편으로는 포고문을 보내 귀순을 권하는 강온전략을 동시에 펼쳤다.
하지만 이시애의 세는 만만치 않았다. 이때 유자광이 나섰다. 

유자광은 일개 갑사의 신분이었지만 온 힘을 다해 이시애를 잡을 수 있는 계략을 담은 상소문을 세조에게 올렸다.
유자광의 상소는 세조의 마음을 움직였다. 특히 계략과 함께 ‘나라에 난이 일어나니 분연히 일어나 공을 세우고 나라를 위해 죽을 각오’라는 충성심을 세조가 알아본 것이다.
 
유자광은 세조에게 불려갔다. “이시애가 장악한 지역이 험한 지역이지만 그것은 관군도, 반군에게도 같은 조건입니다. 과감하게 군대를 움직여 결전을 해 난을 진압해야 합니다”라는 계책을 올렸다.
세조의 생각도 그러했다. 세조는 유자광을 칭찬하고 그를 겸사복으로 임명하면서 강경책을 선택했다. 

그렇게 이시애의 난이 진압되자 세조는 유자광에게 부호군의 자리를 주었다.
유자광의 앞에 놓인 서얼 출신이라는 철벽에 드디어 ‘좁은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유자광은 여진족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러자 세조는 파격적인 승진 인사를 단행했다. 유자광을 병조정랑에 임명한 것이다. 병조정랑은 병조의 실질적인 실무책임자로 특히 삼사의 관직 등용에 가부를 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
 
조정은 벌집 쑤셔놓은 듯 들끓었다. “서자 출신을 육조의 낭관으로 임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태종께서 만드신 조선의 국법입니다!” 대신들의 간언을 세조는 듣지 않았다. 

그야말로 총애였다. 유자광은 조선 건국 이래 육조의 낭관 즉 ‘청요직’에 임명된 첫 번째 인물이 된 것이다.
그리고 세조는 온양 행궁으로 행차하면서 유자광에게 총통장이라는 일종의 수행책임자 임무를 부여했다. 유자광은 헌신을 다해 세조를 모셨다.
이 과정에서 유자광은 특유의 처세술을 발휘했다. 그의 첫 번째 목표는 세조였고, 두 번째는 세조의 정비인 정희왕후였다.
유자광은 두 사람을 극진히 모셨다. 유자광은 빈틈이 없었다. 궁 안의 실세이며 정보통인 내시와 상궁 등 세조와 왕비의 문고리 권력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는데 주력했다.
이 같은 노력이 훗날 유자광의 목숨을 살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세조의 유자광에 대한 신임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세조는 1468년 온양별시문과를 특별히 열었다. 이 과거는 사실 유자광을 위한 시험이었다. 당시 채점관은 신숙주였다. 결과는 유자광의 낙방이었다. 세조는 신숙주에게 물었다. 

“유자광의 답안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가?” 

“네, 문체가 고어가 많고 문법적으로도 맞지 않은 부분이 있어 낙방시켰습니다.” 

“내 생각에는 고어를 썼더라도 질문의 본질을 파악하고 답을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유자광은 급제했다. 문관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세조의 특별 배려로 획득한 것이다.
세조는 유자광에게 정3품 병조참지를 수여했다. 일개 갑사의 신분에서 상소문 하나 올리면서 유자광의 운명이 바뀐 것이다. 유자광은 불과 9개월 만에 정3품 당상관이 된 것이다.
 
그리고 세조는 유자광에게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을 치하해 적개공신 2등에 봉했다.
이제 유자광은 막강한 권력은 아니더라도 조정에서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세조의 총신이 된 것이다. 조정에서는 ‘불가합니다’라는 상소가 세조에게 빗발쳤지만 세조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유자광 자신이 사퇴를 청할 지경이었지만 세조는 반대 상소를 모두 물리쳤다. 

▶예종의 마음을 읽고 남이를 공격하다 

유자광은 자신의 목표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딛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유자광보다 벼락출세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구성군 이준과 남이 장군이었다. 물론 이들은 혈통에 있어서 유자광과 비교할 수 없었다. 구성군 이준은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차남으로 어려서는 할아버지 세종에게, 커서는 큰아버지 세조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또 한 명 남이는 조선 개국 공신이며 영의정을 지낸 남재가 할아버지, 할머니는 태종의 딸이고 장인은 세조시대 한명회, 신숙주와 함께 3대 권신인 권람이었다.
촌수로도 태종의 외증손이었다. 이 두 사람은 이시애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웠다.
구성군 이준은 27에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다음해 28세에 영의정이 되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17세에 무과에 급제해 신동 소리를 듣던 남이 장군 역시 27세에 구성군 이준의 자리를 이어받아 병조판서가 되었다.
당시 30대 과거 등용이 일반적인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세상이 뒤집어질만한 기용이었다. 

세조의 이 같은 파격적인 인사는 다 후계를 위한 복안이었다. 세조를 이어 왕이 될 세자 즉 훗날 예종은 당시 약관의 나이였다.
그런 왕의 옆에 세조도 함부로 하지 못한 노회한 권신들인 한명회, 신숙주, 권람 등이 진이 치고 있어 예종이 이 훈구대신들에게 끌려 다닐 것이라 세조는 걱정한 것이다. 그래서 이준, 남이, 유자광 등을 발탁해 신진세력을 형성하려 한 것이다.
그들이 장차 예종의 친위세력으로 훈구파를 견제할 것이라 세조는 생각했다. 

권력은 예상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다. 그것은 권력은 살아있는 생물이기에 손에 넣기 전에는 누가 주인이라는 예단이 아무 소용 없는 것이었다. 세조가 죽었다.
19세의 예종이 뒤를 이었다. 여전히 훈구파는 조정을 장악했고 비록 영의정이었지만 구성군과 남이, 그리고 유자광의 세력은 미미했다. 그런데 돌출 변수가 발생했다.
 
예종은 즉위하자마자 인사발령을 냈다.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겸사복장이라는 왕실 친위대의 종2품 벼슬로 좌천시킨 것이다. 그리고 영의정 이준도 노골적으로 견제했다.
명분은 종친과 외척이 권력과 군권을 장악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예종은 사실 이준과 남이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세조에게서 엄격한 훈육을 받은 예종은 세조의 신임과 사랑을 받았던 두 사람에게 시기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정치와 인사에 반영된 것이다. 유자광은 빠르게 예종의 속마음을 읽었다.
그 즈음 남이는 젊은 혈기로 자신의 야망을 숨길 줄 몰랐다. 그는 시 한 수를 지었다.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라/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안하게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요’ 

역사에서는 유자광이 남이가 지은 시 중에서 ‘평안하게 평 平’을 ‘득하지 득 得’으로 바꾸어 모함했다고 한다.
당시 남이는 유자광을 자신의 편으로 생각했다. 그는 유자광의 집으로 찾아가 “혜성이 없어지지 않는데 이는 반역의 기운이다. 내가 미리 선수를 치고 싶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유자광은 이를 듣고 고변을 결심했다. 남이는 결국 잡혔다.
예종은 친국을 했고 유자광은 증언으로 ‘남이의 역심’을 증명했다.
 
남이는 세가 이미 기운 것을 직감했다. 더구나 그의 큰 힘이 되어줄 장인 권람도 죽어 아무도 그를 변호하지 않았다. 그는 “강순도 같이 모의했다”라고 실토하고 역모를 인정했다. 강순도 같이 처형에 처해졌다. 젊은 영웅 남이는 억울하게 죽었다. 

남이가 진실로 역모를 꾸몄는지, 유자광의 모함이었는지는 아직도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훈구파와 새로운 권력인 구성군 이준, 남이, 유자광의 싸움에서 훈구파가 승리한 것, 유자광이 특히 절대적 심판자인 군주 예종의 속내를 읽고 일시적으로나마 훈구파 입장에 선 것은 분명하다. 예종은 유자광에게 남이가 살던 집을 하사했다.
그리고 강순의 아내 중비와 민서의 첩 딸 민말금을 노비로 하사받았다.
그리고 그해 한성에 출몰한 도적을 소탕하고 변방의 야인과 왜구를 섬멸한 공을 인정받아 응양 장군으로 임명되고 익대공신 1등급, 무령군이라는 봉군을 받았다. 서자 출신이 이제 군이 된 것이다. 

하지만 호사다마랄까. 유자광은 사헌부, 사간원의 표적이 되어 지속적인 탄핵을 받았다.
이유는 수십까지였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서자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기득권 양반세력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자광은 의금부에 구속되었다.
이때 유자광은 그동안 공을 들인 궁중의 인맥을 총동원했다. 편지를 써 내시를 통해 예종의 어머니이자 세조의 왕비인 정희대비에게 구원을 청했다. 평소 유자광을 세조와 함께 신임했던 정희대비는 유자광을 의금부에서 석방해 목숨을 살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유자광의 숨은 인맥과 처세의 결과가 빛을 발한 것이다. 

훗날 역사는 이준과 남이 숙청의 주역은 훈구파 대신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전면에 유자광이 선 것이고 훈구파와 신진세력의 격렬한 권력투쟁의 결과로 신진세력이 전멸했으며 그 결과가 남이의 죽음과 훗날 구성군의 귀양이라고 보고 있다. 즉
 단순히 유자광 혼자만의 권력욕과 음모로 신진 세력이 전멸했다고 보는 것은 순진한 시각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예종시대에도 세조의 쿠데타를 이끌었던 주역들이 역사의 전면에서 퇴장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박기종 커리어코칭칼럼니스트자료제공 Citylife
발행일 2016.10.27기사입력 2016.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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