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 봄, 남도 그 어느 한곳 빛나지 않을 곳이 있을까만, 다섯 시간을 달려 강진까지 간 이유는 순전히 판타지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백련사 이름 끝에는 왜 절 사(寺)가 아닌 모일 사(社)가 붙었는지, 이백 십 수년 전 정약용과 혜장 스님이 걸었던 그 길의 동백꽃들이 어째서 지금까지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는지, 다산 초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진만에서는 지금도 그리움이 사무쳐 오르는지, 그 봄볕의 기운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백련사 동백은 4월까지만 반짝인다.

(위)다산초당, (아래)백련사

평생 볼 동백을 단 세 시간 만에 실컷 보다

만덕산 백련사를 일생에 꼭 한 번 가봐야 할 이유는 적어도 네 가지다. 첫째, 여느 유명 사찰과 달리 소박하다 못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 가람들의 풍경과 갯벌 가득한 강진만의 풍경이 제대로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연중 수많은 불자와 여행자들이 들락거리는 절이라면 산책로며 뜨락을 제대로 가꿀 수도 있으련만, 이 절은 평범한 건축물 몇 동에 스님들의 땀과 발저림이 느껴지는 텃밭, 그리고 몇몇 돌계단이 전부다. 스님들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찾아간 때가 일요일이라, 아마도 관광객을 피해 수행처로 들어가 꼼짝 않고 앉아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백련사는 관광객이 찾아가지 않는 게 절을 돕는 일일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련사를 찾아가야 할 두 번 째 이유는 백련사의 역사에서 엿볼 수 있는 ‘정신’ 때문이다. 서기 801년 창건 당시 이름이 ‘만덕사’였던 이곳이 ‘백련사(白蓮社)’로 불리게 된 것은 고려 회종 7년 원묘국사가 시작한 ‘백련결사’에서 유래한다. 절의 이름 끝에는 보통 ‘절 사(寺)’자가 들어간다. 그렇다면 백련사 또한 백련사(白蓮寺)가 되었어야 했다.

회종 7년인 1211년, 그러니까 13세기 고려는 개국 정신은 사라지고 정치와 종교가 타락할 대로 타락, 멸망의 길을 향해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북쪽에서는 몽골의 침략을 받아 국토가 피폐해졌고, 남에서는 왜구가 출몰, 백성의 삶을 위협하고 있었다. 희망도, 미래도 없는 세상이었다. 원묘국사가 ‘백련결사’를 시작한 것은 그런 절망의 속세에 다시 희망의 빛을, 그것도 귀족이나 왕이 아닌, 수행자와 백성이 함께 고민하고 실천해서 이 세상을 정토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는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불국정토’가 아닌 ‘정토’를 건설하자고 외쳤다. 그것을 계기로 백련사는 절 사(寺)자가 아닌 ‘모일 사(社)’를 사용하는 도량이 된 것이다. 원묘국사는 당시 왕권 사회를 부정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건강한 왕조를 되살려 귀족과 평민 모두가 신명나는 세상을 만들어가길 꿈꿨다. 고려 패망(1392년)을 앞두고 있던 1351년 공민왕의 왕자가 백련사에 들어와 살았던 것과 조선조 세종의 둘째 형 효령대군이 입산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는 사실이 당시 백련사에 대한 주류 사회의 믿음을 보여주는 근거다. 이런 백련사의 역사를 들여다 보노라면 백련사의 백련결사는 어쩌면 한반도 최초의 시민운동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백련사를 찾는 세 번째 이유는 ‘동백’이다. 여행자들에게는 사실 이 동백이 이곳을 찾는 첫 번째 이유일 것이다. 만덕산 일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자생 동백나무 7000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동백꽃은 11월에 피어 이듬해 4월쯤 사라지는데, 그 동안 피는 꽃이다. 가지에 핀 꽃은 꽃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불덩이라 표현하는 게 낫다. 시뻘건 꽃은 한 치의 흐느적거림도 없이 꼿꼿이 눈을 뜨고 있다. 그러다 3월이 오면 불덩이 그대로, 미련없이 ‘모가지가 뚝’ 떨어져버린다. 비가 오지 않는 한, 그렇게 ‘땅바닥에 핀 동백’은 불덩이 모습 그대로 몇날 며칠을 반짝인채 그 자리에 있다. 사실 동백처럼 잔인한 꽃도 없다. 꽃봉오리가 벌어지고 꽃잎이 일어서고 활짝 피고 어느날 사그라드는 게 자연의 이치이거늘, 동백은 산 채로 뚝 떨어져 충혈된 눈을 뜬채 대지를 적시다 사라져버리니 그 과정을 보는 것 자체가 일종의 수행이다. 동백의 꽃말이 ‘애틋한 사랑’, ‘기다림’이 된 것 역시 이런 동백꽃의 일생과 똑같다. 동백을 보며 그 누군가가 떠올라 애닯은 마음이 되었다면, 그 가슴에 동백이 또 피어난 것이다.

백련사에서 누릴 수 있는 네 번째 감성은 ‘만경설화’다. 남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생차를 이용해 스님들이 만든 각종 차를 경내 다실 ‘만경설화’에서 맛보고 구입할 수도 있다. 백련사에서는 매달 첫 번째 월요일 6시30분에 육화당 다실에서 ‘여연 큰스님’의 차 강좌가 열리고 셋째 주 월요일 6시30분에는 명은당 보살의 ‘행다’ 시연이 열린다. 종무소에 신청하면 참여할 수 있다. 템플스테이에 참여하면 다도와 산책, 명상 모두 경험할 수 있다. 백련사의 차는 강진에서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던 정약용과의 인연을 만들어 준 뜻깊은 존재이기도 하다.

다산초당 가는 길… 혜장 스님 걷던 길

정약용이 자신의 호를 ‘다산(茶山)’이라 한 것은 순전히 만덕산 때문이다. 백련사를 품고있는 만덕산은 동백뿐 아니라 야생 비자나무 차나무 등이 많이 있는데, 특히 야생차가 온 산을 덮고 있어 ‘다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정약용의 ‘다산(茶山)’은 바로 그 만덕산에서 유래한 것이다.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 와 8년 여를 포구 근처에서 생활하다 ‘다산초당’으로 이주한 것은 정약용 개인뿐 아니라 우리나라 인문 사상에 중요한 전기로 기록될 만 하다. 포구 일대에서 지역 주민들의 눈총을 받으며 지내던 다산은 호남의 명문가이자 외가인 ‘해남윤씨’의 도움으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본격적인 연구와 저술 활동, 그리고 후학 교육에 전념했다. 그때 쓴 책이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 권이다. 다산초당은 원래 초가였는데 1930년대에 무너졌던 것을 바로 ‘해남 윤씨’ 후손들이 ‘다산유적보존회’를 만들어 1958년에 한옥으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원래 윤씨 산정(별서)으로 사용되던 누옥을 선물받은 다산은 이곳에 동암과 서암이라는 서재 겸 학교를 만들어 손님을 맞고 학생을 가르쳤으며 만덕산 찻잎을 따다 말리고 잘라 초당 뒤에 스스로 파서 만든 옹달샘 ‘약천’ 물을 끓여 차를 내기도 했다.

또한 초당에서 800m 떨어진 백련사의 당시 주지 혜장 스님을 찾아 차와 세상을 이야기하고 또한 혜장 스님이 동백나무 가득한 오솔길을 따라 다산초당을 찾으면 역시 차를 나눠 마시며 서로의 학문과 사상을 나눴다고 전해진다. 다산과 혜장이 오고 갔던 그 오솔길은 백련사와 다산초당 여행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길에서 수백 년 전 선각자들의 정열과 좌절, 그리고 오늘의 세상과 미래에 대한 낙관과 믿음이라는 판타지를 상상할 수 있다. 이 길은 해남에서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과천, 남태령, 서울로 이어지는 ‘삼남길’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 옛날 과거 시험을 통해 출세하거나, 봇짐을 매고 부자를 꿈꾸던 제주, 호남 사람들의 희망의 길이 바로 삼남길이다.

다산유물전시관

다산초당 동암 옆에 있는 ‘천일각’ 역시 판타지가 낳은 유산이다. 1975년에 세운 이 누각에 오르면 강진만이 한 눈에 잡힌다. 누각을 세운 사람들의 마음에는 그 옛날, 강진만이 내려다 보이는 바로 이 언덕에 서 있는 다산의 뒷모습이 보였는지도 모른다. 흑산도로 유배갔다 결국 죽음을 맞이한 다산의 형 정약전과 언제 풀릴지 모르는 귀양살이의 고단함,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향한 뜨거운 그 무엇 등을 생각하는 ‘상상’을 하며 건축을 실행했을 것이다. 40년이 다 되어가는 건축물이니 그 또한 판타지 대열 속으로 들어가는 중이 아닐까? 천일각은 호젓한 시간 친구와 둘이 나란히 앉아 남해를 바라보며 소근소근 이야기 나누기에 그만인 여행 포인트이기도 하다.

다산에 대해 조금 더 알고싶다면 다산초당 산아랫마을인 귤동마을에서 삼남길을 따라 10여 분 걸으면 나오는 ‘다산유물전시관’을 찾으면 된다. 관람 시간 30분이면 충분한 이곳에 가면 다산의 생애와 사상, 업적 등을 배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