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요즘은 20대를 청춘이라 부르기에도 미안할 지경이다. ‘88만원’ 세대를 넘어 연애, 결혼, 출산, 집을 포기해야 하는 이른바 ‘4포 시대’와 마주했기 때문이다. 아파라, 미쳐라 등 20대를 향한 자극적인 구호만이 난무하는 지금, 서울 반대편 뉴욕에서 고군분투를 벌이는 27세 여자를 만났다. 그녀 역시 서울의 청춘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영화는 흑백이다. 아마도 감독은 그동안 수많은 화면에서 익히 보았던 뉴욕의 고정된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었나 보다. 우디 알렌, 마틴 스콜세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부터 <섹스 앤 더 시티>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뉴욕은 이 영화에서는 눈곱만큼도 안 보인다. 카메라는 뉴욕의 거리와 외경을 단 한 번도 담아주지 않는다. 대신 그 빈자리는 화면을 가득 채우는 크기로 등장하는 인물이 차지한다.

과감하게 배경이 삭제된 넓은 화면에서 캐릭터들은 자유롭게 유영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그 효과는 눈부시다. 이야기는 일상적이지만 지루하지 않게 소소한 사건들의 점층으로 전개되고, 캐릭터는 평이하지만 프레임 하나하나가 주인처럼 통통 살아 숨쉰다.

현대 무용을 전공한 프란시스(그레타 거윅)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절친 소피(믹키 섬너)와 살고 있다. 그녀들은 거창한 꿈을 꾼다. 무용가로 대성한 프란시스의 책을 소피가 발간하고 둘이 파리에 별장을 갖자고.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능력남 남친과 사귀는 소피는 독립을 선언하고 프란시스는 무용단에서 해고될 지경이다. 게다가 동거하자는 남자친구의 제안을 거절하자마자 그 역시 프란시스를 떠났다.

많이 걷고, 마시고, 떠드는 프란시스는 용감하게 현실과 부딪치지만 현실은 아파할 여유도 없이 또 다른 문제를 프란시스에게 안긴다. 즉흥적인 파리 여행은 카드빚만 남기고 소피와의 관계도 어색하게 만들었다. 별명이 ‘안 생겨요’가 되어버린 프란시스는 오늘도 뉴욕 거리를 바쁘게 뛰어다닌다.

영화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그래서일까, 그녀들이 나누는 대화는 남자, 섹스 등 보편적인 스무살 중반 여자들의 관심사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대화의 이면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은 한 달씩 버텨야 하는 만만치 않은 월세, 장래에 대한 불안, 친구와의 우정 그리고 지금 나의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인가라는 원초적 질문들이다. 그래서 여자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지금 시대를 관통하는 젊은 청춘들의 성장통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럼에도 영화는 균형감을 잃지 않는다. 비록 현실은 힘들지만 그 안에서 작은 행복들을 발견할 수 있다. 세금을 환급받고 기뻐하고, 조금씩 변두리로 월세방을 옮기지만 그래도 오늘 내가 잘 곳이 있고, 어색해진 친구와 작은 침대에서 우정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밤도 있다. 프란시스는 긍정적이다. 슬퍼서 울거나, 무릎을 꿇고 세상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를 보며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며 위로하기에는 앞으로의 삶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을 어른들은 직감한다. 그래도 그녀의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

풍성한 볼거리, 영웅이 범람하는 블록버스터 전쟁에서 이 영화가 갖는 미덕은 잘 짜여진 시나리오와 캐릭터에 100% 몰입된 여주인공이다. 작지만 탄탄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