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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실에서 벌어졌던 최대의 비극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은 무엇일까?

 

아마도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직접 뒤주에 들어갈 것을 명하고 결국 절명시킨 사건. 훗날 ‘임오화변(壬午禍變)’으로 불린 이 사건은 조선 왕실 최대 비극으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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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탕평책과 균역법 같은 정책을 통해 백성을 따뜻하게 보살핀 서민 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하지만 한편으로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인 비정한 아버지로 우리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폈던 국왕이 아들에게는 왜 그토록 잔인하고 비정했던 것일까?

 

1724년 8월 경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영조는 탕평을 외쳤지만 근본적으로 노론의 지지 속에 즉위한 왕이라는 정치적 부담이 있었다. 이런 영조에게 첫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잃고 1735년 42세라는 늦은 나이에 영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도세자는 더없이 귀한 아들이었다.

 

1735년 9월 11일 영조는 원자가 처음 일어서자 신하들과 함께 크게 기뻐했다. 1743년에는 영조가 몸소 세자빈을 간택했는데, 그녀가 바로 정조의 어머니가 되는 혜경궁 홍씨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수시로 데리고 다니면서 국정을 익히게 했고, 1744년 9월에는 친히 권학문을 지어서 설명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사도세자는 학문하는 것을 싫어했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교육에 큰 관심을 기울였지만 세자는 부왕의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세자는 말이 없고 행동이 날래지 못해 성격이 세심하고 민첩했던 영조를 늘 답답하고 화나게 만들었다. 또 커가면서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고 칼싸움이나 말타기 같은 놀이에만 열중해 학문에 정진하기를 바라는 영조의 기대를 저버리기도 했다. 영조는 자신의 기대와 어긋나는 세자를 따뜻하게 타이르기보다는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꾸중하거나 흉을 보는 등 미워하기 시작했다.

 

1749년 1월 23일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대리기무를 명했다. 영조의 나이가 56세고, 사도세자가 15세 되던 해였다. 영조는 자신이 왕위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찍부터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정치적 결단을 내렸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에 당황해했고, 여러 신하가 거듭 대리기무의 철회를 요청하자, 영조는 “부득이하다면 대리청정(代理聽政)은 어떻겠는가?”라고 했다. 대리기무 대신 대리청정의 방안을 제안했고, 이것을 실천에 옮긴다.

 

1749년 1월 27일 영조는 왕세자의 대리청정을 종묘에 고하고 이후 보고해 결정할 일이 있으면 세자에게 아뢸 것을 지시했다. 이처럼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했지만, 실제론 영조가 모든 것을 주도했다. 대리청정 기간 동안 사도세자는 격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처리하는 모든 일처리에 불만을 표시했고, 양위(讓位·왕위를 물려줌) 파동까지 일으켰다. 사도세자는 추운 겨울날 문밖에 나가 거적자리를 깔아놓고 엎드려 “죽을죄를 지었다”며 용서를 빌기도 했다. 1752년 양위 파동의 홍역을 치른 후에,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조용하게 비춰졌다. 하지만 1756년 2월 16일 영조는 사도세자가 비록 비답을 내리더라도, 바로 반포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대리청정을 명했으면서도 실제 주요한 안건은 자신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뜻이었다.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세자는 1756년 11월 천연두 증세로 고생하기도 했다.

 

게다가 사도세자에게는 의대병(衣襨病)이 있었다. 의대병은 보통 의대(衣襨·왕실의 옷) 한 가지를 입으려고 열 벌이나 이삼십 벌을 갖다놓으면 갑자기 옷을 태우는 이상한 괴질이었다. 한 벌을 순하게 갈아입으면 천만다행이었고, 시중을 드는 이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의대를 입지 못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긴장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사도세자는 영조에 대한 두려움으로 영조를 뵙는 의례마저 빼먹는 일이 발생했다. 1757년 여름 영조를 따라 사도세자가 홍릉을 참배하던 날 큰비가 내렸다. 영조는 날씨가 이런 것은 세자를 데려온 탓이라고 말하면서 능에 이르기도 전에 사도세자에게 “도로 궁에 들어가라”고 지시했다. 이 장면은 2015년 개봉한 영화 ‘사도’에도 나오는 장면인데, 영화적 과장이 아니라 실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1760년에도 세자의 병환은 계속됐다. 영조가 처방법을 묻자 의관들은 온천에서 목욕하는 것이 좋다고 건의했고, 영조는 사도세자의 온천행을 허락한다. 온양 온천에 도착한 사도세자는 잠시 휴식을 취했으나 마음의 병이 완전히 치유되진 않았다. 1761년에도 사도세자의 병은 계속됐고, 이로 인해 조석으로 영조에게 문안을 거르는 경우도 잦아졌다. 오래도록 세자의 문안이 중지되면서 부자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세자는 병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학문에 힘쓰기보단 바깥출입을 자주 했고, 이런 상황은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서도 목격됐다. 1761년 4월 성균관 유생들은 세자의 유람을 경계하는 글을 올렸고 영조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악재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마침내 대형 사고가 터졌다. 사도세자가 영조 몰래 평안도 지방을 다녀온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잠복했던 영조의 분노가 폭발했다. 좌의정 홍봉한의 면직을 시작으로 관련자 처벌이 이어졌다. 1761년 4월 2일부터 20일간 계속됐던 사도세자의 평안도행. 그것도 왕에게 알리지 않았던 사도세자의 행동은 부자 사이를 돌이킬 수 없게 하는 치명타가 됐다.

 

1761년에 이뤄진 비밀 평안도행으로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파국으로 달할 무렵 또 하나의 악재가 터졌다. 1762년 5월 나경언이 사도세자의 비행을 아뢰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5월 22일 ‘영조실록’의 기록에는 “동궁의 허물을 아뢴 나경언을 친히 국문하고 처형했다”고 기록했지만, 나경언의 죽음은 왕실 최대 비극의 서막일 뿐이었다. 영조는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오늘날 조정에서 사모(紗帽)를 쓰고, 띠를 맨 자는 모두 죄인 중에 죄인이다. 나경언이 이런 글을 올려서 나로 하여금 세자의 과실을 알게 하였는데, 여러 신하 가운데는 이런 일을 나에게 고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나경언에 비해 부끄럼이 없겠는가?”라고 했다. 마치 사도세자의 비행 아뢰기를 기다린 듯이 답변을 내렸다. 사도세자는 크게 놀라 새벽 2시경 홍화문에 엎드려 대죄(待罪)했고, 영조는 창문을 밀치면서 크게 책망했다. 영조는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라고 하며 분노를 표출했다. 예상은 했지만, 영조의 분노와 질책은 더 컸다. 세자가 후궁을 죽인 일까지 언급했으며, 세자에 대한 불신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이제 부자는 서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운명의 그날인 1762년 윤 5월 12일 오후. 영조는 세자를 창경궁 휘령전으로 나오도록 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지 세자는 혜경궁 홍씨를 만난 뒤 휘령전으로 들어갔다. 영조는 세자에게 칼을 휘두르며 자결할 것을 명했다. 세자는 옷소매를 찢어 목을 묶는 동작을 취했지만 시강원의 관원을 비롯한 신하들이 저지했다. 세자는 세손(후의 정조)과 이별을 하게 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영조는 이 요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처분은 가혹했다. 3~4시 무렵 밧소주방의 뒤주가 들어왔는데 크기가 작아 쓸 수가 없었다. 다시 어영청에서 쓰는 큰 뒤주를 들여왔고 영조는 여기에 들어갈 것을 명했다. 결국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에 갇히게 됐고, 영조가 직접 뚜껑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서 8일 만에 28세라는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안타까이 여긴다는 뜻에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직접 지어주고, 묘지문도 친히 지었다. 하지만 이 일을 절대 거론하지 말 것을 엄명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후 정국의 뜨거운 감자가 됐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영조의 처분을 지지하는 벽파와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로 당파가 나뉜 것이다.

 

사도세자의 죽음 후에도 영조는 14년이나 더 왕위를 지키면서 52년 장기 집권을 이어갔다. 자신을 빼닮은 능력 있는 손자 정조에게 후계 자리를 물려줌으로써 우리 역사 속에서 영·정조 시대라는 찬란한 정치·문화의 중흥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손자의 영광 뒤에는 비운의 아들이자,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있었다는 사실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자료제공 매경이코노미
발행일 2016.03.14기사입력 201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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