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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데까지 가거라. 가다가 막히면 앉아서 쉬거라. 쉬다 보면 새로운 길이 보이리.`

붓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정갈하게 써 내려간 서예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검은 묵향이 짙게 묻어나는 `여유`라는 작품이다. 여유라는 제목의 두 글자는 큼지막하게 써져 있는데 동그라미 두 개가 서로 기울어진 채로 겹쳐 생동감이 넘친다. 그러면서도 제목처럼 여유로움이 작품 전체에 은은하게 배어난다. 한국 서단을 대표하는 중진 소헌(紹軒) 정도준(63)의 작품이다. 단순한 선으로 이뤄진 글자지만 먹물이 짙게 스며들어 깊이가 느껴진다. 연암 박지원이 맨 처음 사용한 `법고창신`의 의미를 담은 작품도 눈길을 끈다. 전통의 맥을 충실하게 짚고 있는 학정 이돈흥(64) 작품이다. 그의 글씨는 힘과 경쾌함, 유려함이 적절히 맞물려 서예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하석 박원규(65) 작품은 글자가 얼마나 표현력이 풍부한 대상인지를 새삼 일깨워준다. 한자 한 획 한 획이 그대로 사람이 되고, 자연이 된다. 이 시대 한국 서예계를 대표하는 고수 3명이 모였다. 단순히 만난 데서 그치지 않고 오랜 세월 갈고닦은 솜씨까지 겨룬다. 마치 최정상 가수들이 순위 경쟁을 벌이듯 대표 서예가들이 붓으로 한판 대결을 벌이는 모양새다. 그래서 전시 제목이 `서예삼협 파주대전(書藝三俠 坡州大戰)`이다. 전쟁터는 경기도 파주. 창사 35주년을 맞은 한길사는 헤이리 갤러리한길 전관에서 전시를 열고 있다. 스마트폰과 디지털 시대에 손으로 글씨를 쓰는 `손글씨`는 더욱 뜸해지고, 더구나 일일이 먹을 갈아 붓으로 글씨를 쓰는 서예는 예전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하는 현실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기록문화의 진수이자 동양 예술의 최고봉인 서예의 가치와 의미를 살펴보는 기회라 더욱 뜻깊다. 40~50년간 서예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고수 3명의 서로 다른 개성과 필체를 비교ㆍ감상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세 작가의 개성은 출신 지역과 스승의 성향만큼이나 다르다. 학정의 스승은 광주에서 활동한 성곡 안규동이고, 하석은 강암 송성용 문하에서 서예를 배웠다. 경남 진주 출신인 소헌은 일중 김충현을 사사했다. 이돈흥은 30년째 자비로 `학생서예대회`를 열며, 학정서예연구원을 세우고 후학 양성에도 힘써 지금까지 배출한 문하생만 1만명이 넘는다. 학정은 50여 년간 글씨를 썼지만 "쓸수록 느는 것이 눈에 보여 한 번이라도 더 써보게 된다"고 말한다. 우리 서단에서 가장 학구적인 서예가로 꼽히는 박원규는 다른 서예가의 형식을 따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작업하며 지난 25년간 매년 1권씩 작품집 25권을 내기도 했다.

소헌 정도준은 1999년 독일 슈투트가르트미술관 초대전 이후 국내 서예가로는 이례적으로 외국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국 서예를 외국에 알리는 일을 맡고 있다. 그는 "판소리가 음(音)을 얻는 일이라면, 서예는 선(線)의 예술"이라며 "검은 글씨는 내가 검은 먹으로 쓴 것이고, 흰 여백은 쓰다 만 공간이 아니라 남겨진 곳"이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검은 먹과 흰 종이가 만나면서 빚어내는 색의 대비가 가장 화려하다. 가업을 잇고 있는 소헌은 1982년 국전이 대한민국미술대전으로 바뀌던 첫해 대상을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는 경복궁 흥례문과 유화문 등 다수의 고궁 편액 글씨를 썼다.

전시는 2월 29일까지. (031)955-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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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휘 기자자료제공 매일경제
발행일 2012.01.03기사입력 2012.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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