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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공은 한마디로 2인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표본이다.

그는 1인자가 될 수 있는 기회, 능력이 있었지만 스스로 2인자의 위치에서 역량을 발휘했고 그 업적은 그 어떤 1인자나 군주의 것보다 크고 위대했다.

어쩌면 주문공은 손에 들어온 떡을 놓을 수 있는 용기가 있었기에 역사에 명예로운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화려하다. 위대한 성인, 주나라 창업의 최고 공신, 조카를 왕으로 모신 충신, 시대를 앞서간 지식인 등.

그러나 그를 나타내는 호칭 중 아름다운 것은 ‘역사상 가장 완벽한 2인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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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던 인물

 

5000년 중국 역사에서 1인자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 중 많은 이는 대업에 성공했지만 얼마 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몇몇은 수백년 간 존속하는 강력한 왕조와 통치 시스템을 만들었다.

역사는 영웅의 기록이겠지만 그 영웅의 바로 뒤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훌륭한 조력자가 있다.

 

우리는 그들을 2인자라 부른다. 2인자는 태생적으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는 운명이다.

1인자를 도와 성공해도 토사구팽을 당하는 사례가 수없이 많았고 실패하면 1인자를 대신해 죽음의 길을 스스로 걸어가야 했다.

한 고조 유방, 명나라 주원장을 보라. 그들을 따르던 수많은 가신, 충신들은 대업의 성공 이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

그만큼 2인자는 처세에 있어 성공보다 실패의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 난 것이다.

 

역사가들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완벽한 2인자 처세를 보인 두 명을 손꼽았다.

한 명은 중국 공산당 모택동 시대의 2인자 주은래이다.

그는 무려 27년간 총리로 재직하며 공산 혁명, 문화 혁명 등 생사를 건 권력투쟁이 빈번했던 격동의 시대에 단 한 번의 흔들림 없이 2인자를 자리를 지킨 신화적 존재이다.

열성적인 업무 태도, 온화하고 섬세하며 유연한 성품과 말을 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많았던 인물이었다.

유소기, 임표, 등소평 등 많은 이들이 정치적 부침을 겪었지만 주은래만은 외교부장과 총리로 모택동을 보좌하며 오늘의 중국 건설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또 한 명은 주은래보다 무려 3000년 전 인물이다.

바로 주나라 대업의 일등공신이며 노나라의 시조로 일컫는 주문공 周文公이다.

주문공은 형인 주周 무왕을 도와 은殷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창업했으며 또한 형 주 무왕의 급작스런 죽음 이후 10여 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조카를 대신해 섭정으로 주나라를 다스렸다.

 

모든 권력과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어 사실 주문공은 왕이 되려는 마음만 있었다면 충분히 왕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7년 간 어린 조카를 대신해 주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성인이 된 조카에게 왕권을 물려주고 미련없이 신하의 자리로 돌아간 인물이다.

또한 주문공은 기원전 1046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 약 825년을 지속한 주나라의 통치시스템과 법전, 교육, 의례, 사상을 제정하고 시행한 정치가, 군사령관, 교육자, 과학자이며 유학자의 시조격인 인물이다.

 

그보다 500년 후에 주문공이 세운 노盧나라에서 태어난 공자는 자신의 롤모델로 주문공을 이야기했다.

“내가 나이가 들어 이제는 꿈속에서라도 주문공을 한 번 뵈었으면 좋겠다”라고 흠모하며 ‘가장 이상적인 성인’으로 주문공을 꼽았다.

 

지금의 산동성 성도인 제남 인근에 ‘곡부’라는 지역이 있다.

공자의 고향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이곳에 주문공을 모시는 사당도 같이 있다.

이곳 사람들은 주문공을 ‘원성 元聖’, 공자를 ‘지성 至聖’ 그리고 맹자를 ‘아성 亞聖’이라 부를 정도로 주문공에 대한 존경과 자부심이 대단하다.

 

 

▶인재를 모으고 덕을 쌓아 주나라를 열다

 

주문공은 은나라 때인 기원전 11세기에 태어났다.

흔히 중국 역사의 시초를 하, 은, 주, 즉 3왕조로 보지만 ‘하나라’는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

은나라 역시 역사의 기록으로만 존재해오다 20세기 초 갑골문자와 유물이 대대적으로 발견되면서 실제 존재한 왕조로 인정받고 있다.

주문공의 성은 희姬, 이름은 단旦, 시호는 문공으로 역사에서는 주나라의 주를 따 주문공, 주공 혹은 주공 단으로 불렀다.

 

주문공의 아버지 희창(후에 주 문왕 周 文王으로 추존)은 은나라 서쪽을 책임지는 제후국의 수장이었다.

그의 벼슬이 서백이라 사람들을 그를 서백 창이라 불렀다.

서백 창은 은나라 제후 중에서도 세력도 강했지만 누구보다 충성심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기원전 1600년에 건국된 은나라는 500여 년이 흘러 마지막 왕 주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주왕은 비범한 인물이었다. 개인적인 능력이나 재주, 힘에서도 왕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치명적인 독이 침범한다. 바로 절세미인 달기이다. 주왕은 달기에게 푹 빠졌다.

점차 왕으로서의 책임과 위엄은 사라지고 폭군의 면모를 드러냈다.

매일 궁정에서는 사치와 향락의 주지육림이 펼쳐졌다. 은나라의 충신들은 주왕에게 간언을 했지만 그때마다 죽어나갔다.

 

그 무렵 타 제후국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서백 창에게 명분을 높이 들고 은나라를 타도하자는 제의가 밀려왔다.

하지만 서백 창은 듣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은나라의 충신으로의 삶을 선택했다.

주왕은 이런 서백 창을 감금했다. 없는 죄도 생길 판이었다.

서백 창의 장남 백읍고가 주왕에게 달려가 단식을 하며 청원을 했고 많은 신하들이 서백 창의 죄가 없음을 간언했다.

주왕도 서백 창을 석방하려고 마음먹을 때 달기가 잔인하기 짝이 없는 제안을 했다.

 

“폐하, 과연 서백 창은 자신의 아들의 살을 베어 만든 고깃국을 먹을 수 있을까요?”

 

주왕은 백읍고를 죽이고 그의 살로 고깃국을 만들어 서백 창에게 주었다.

서백 창은 이것이 무엇으로 만든 것임을 알면서도 두 눈을 질끈 감고 먹었다.

풀려난 서백 창에게 두 아들이 달려갔다. 바로 희백(후에 周 武王)과 희단(후에 周 文公)이다.

이들은 아버지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고 청했지만 서백은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반대했다.

그리고 얼마 뒤 서백 창이 죽었다. 그 자리를 희백이 이었다. 주 무왕은 동생 주문공과 모든 일을 상의했다.

 

“우리 가문의 복수를 해야 할 것이다. 폭군 주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열어야겠다.”

 

“형님,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쪽을 더 경영하고 인재를 영입해야 합니다. 아직 천하의 인심이 은나라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덕을 쌓아 다른 제후를 존중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해야 합니다.”

 

이들 형제는 수없이 많은 인재를 영입했다.

특히 우리에게 강태공으로 알려진 태공 망을 영입한 것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당시 최고의 군사전략가였던 태공 망은 주 무왕에게 강력한 힘이 되었다.

 

무왕은 ‘맹진의 회람’을 열었다. 군사훈련을 핑계로 군대를 움직여보고 또한 각 제후국의 반응과 은나라의 대비를 미리 점검한 것이다.

이 맹진의 회람에 약 800여개의 제후국이 참여했다.

무왕은 자신감을 얻고 그 길로 바로 은나라로 진군하자고 했지만 주문공과 태공 망은 반대했다.

 

“아직은 천하의 인심이 우리에게 전부 온 것이 아닙니다. 이번 회람에서도 제후국 중에서도 많은 수가 참여치 않았습니다. 때를 더 기다려야 합니다.”

 

은나라 주왕은 갑자기 주 무왕에게 희 씨 가문의 영토를 은나라에 바치라고 명령했다.

주 무왕은 분노했다. 당장 군대를 휘몰아 일전을 치르자고 소리 질렀지만 주문공은 차분했다.

 

“형님, 땅을 주왕에게 주어버립시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금은 천하의 인심과 덕을 모을 때입니다. 그리고 주어버린 땅은 언젠가 우리가 되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문공은 냉정할 정도로 정세를 분석하고 그것을 토대로 형인 주 무왕을 보필했다.

주 무왕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내실을 기하는데 전력을 쏟았다.

 

때가 왔다. 은나라의 마지막 기둥인 재상 비간이 죽은 것이다.

비간은 주왕의 친척이면서 재상으로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있는 은나라의 마지막 보루였다.

그가 주왕에게 “나라를 망국으로 몰아가는 요망한 계집인 달기를 버려야 한다”고 간언했지만 주왕은 듣지 않았다.

오히려 달기는 “폐하, 성인의 심장은 7개의 구멍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비간을 성인이라 하니 한 번 심장을 꺼내 확인해 보시지요.”

 

이미 이성을 상실한 주왕은 충신 비간을 죽이고 그 심장을 꺼내 달기 앞에 내보였다. 은나라는 흔들렸다.

민심은 떠나고 중신과 관료들은 본능적으로 망국을 눈치 챘다.

주 무왕은 군사를 일으켰다. 하늘에 천제를 올리고 모든 제후국의 군대를 소집해 은나라의 수도로 쳐들어갔다.

은나라 주왕은 죄수들을 풀어 군대를 만들었지만 이들은 창을 거꾸로 잡고 오히려 은나라 군대를 공격했다.

방어선이 뚫리고 주 무왕의 군대가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자 궁은 불타기 시작했다.

마지막임을 깨달은 주왕은 불길 속에 몸을 던져 자결했고 달기를 비롯한 수많은 후궁과 간신들은 모조리 주 무왕의 군대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때가 기원전 1046년. 은나라 550년 사직이 무너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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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을 충심으로 보필하다

 

주 무왕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하지만 할 일이 태산이었다.

밤낮없이 일을 하는 무왕이 걱정된 주문공은 무왕에게 휴식을 권했다. 하지만 무왕은 이를 거절했다.

 

“내가 편히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우리가 은나라를 대신하지만 아직 세가 은나라 전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수도도 새로 정하고, 법제도 만들고 할 일이 태산이다.”

 

주문공은 서두루지 않으면서 새로운 국가의 기틀을 마련해 나갔다.

당시 무왕은 군사적인 전략은 태공 망에게, 정치사회 개혁과 국정은 주문공에게 일임했다.

 

주문공은 혈연 봉건제를 만들어냈다.

수도를 중심으로 각 제후국을 세우고 그 수장은 모두 주나라 황실과 혈연이거나 최고의 공신들로 임명했다.

제후국에는 자치권을 보장해주는 대신 주나라에게 충성하고, 군대를 파견하고, 공물을 바치고, 주나라를 보호할 책임을 부여했다.

 

무왕은 도읍을 호로 옮기고 태공 망에게는 제齊나라를, 주문공에게는 노盧나라를, 또 동생인 소공 석에게는 연燕나라를 주고 제후로 임명했다.

그리고 멸망시킨 은나라 주왕의 아들인 무경에게도 은나라의 수도인 은을 분봉으로 주고 제사를 잇게 했다.

무왕은 형제와 친척 55명과 공신 16명을 제후로 임명해 주나라의 틀을 마련하고 주나라 황실을 보호하는 울타리로 만든 것이다.

 

모두 각자의 임지로 떠났지만 주문공은 떠나지 않았다.

주 무왕이 옆에서 국정을 총괄하라는 명령도 있었고 아직은 주나라의 터전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문공은 아들인 백금을 노나라 영지로 보내고 자신은 주나라 서울에 남았다.

과로에 시달리던 무왕이 병이 났다.

백약을 써도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주문공은 제단을 마련하고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천제시여, 무왕은 아직 천하에 남아 할 일이 많습니다. 만약 천제께서 사람이 필요하시면 제가 형 대신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주문공의 뜨거운 우애 덕분일까. 주 무왕은 일어났다. 하지만 무왕의 건강은 예전같이 않았다.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고 자연스럽게 모든 국사는 주문공이 처리하게 되었다.

주문공은 법제를 만들고, 세법을 새로 열고 특히 교육에 힘을 쏟았다.

 

8살이 되면 학교에 들어가 글을 배우게 하는 일종의 의무교육제도를 만들었고 남자는 15세가 지나면 과거를 응시할 수 있는 제도도 만들었다.

또한 대대로 왕의 아들이 민간에서 백성들과 같이 일정기간 농사를 짓게 하는 제도도 마련했다.

이는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명군을 만들려는 주문공의 의도였다.

 

전국 각처에 천문대를 세우고 농사에도 도움이 되게 하였다. 또한 <주례>, <의례> 등도 지어 후대에 기본이 되게 하였다.

지금도 소용되는 각종 제도를 3000년 전에 만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주문공의 혜안과 능력은 대단했다.

 

이렇게 하나하나 나라의 틀이 완성되어 가는 동안 주 무왕이 재위 5년 만에 죽었다.

세자는 희송으로 불과 10여 세의 어린이였다. 주문공은 세자를 왕으로 올리고 섭정을 시작했다.

이가 바로 주 성왕이다. 이때가 기원전 1042년이다. 주문공은 모든 일을 태공 망과 소공 석과 상의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유언비어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곧 주문공이 어린 조카인 성왕을 폐위하고 자신이 왕위에 오를 것이다’가 그것이었고 사람들은 그 풍문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주문공은 이러한 소문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형인 주 무왕의 대업을 잇고 어린 조카인 성왕을 도와 주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란이 일어났다. 주 무왕은 은나라를 멸하고 그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은나라 왕족인 무경을 제후로 임명해 내려 보냈었다.

그리고 무왕은 동생인 관숙, 채숙, 곽숙을 제후로 보내 무경을 감시하게 하였다.

이들이 바로 ‘삼감 三監’이다. 이들 중 주문공의 형인 관숙은 불만이 많았다.

자신보다 많은 권한과 봉토를 받고 권력을 행사하는 동생에게 질투심을 느낀 것이다.

그는 무경은 물론 동생 채숙, 곽숙과 힘을 합해 반란을 시도했다.

 

주문공은 주저치 않았다. 그는 태공 망, 소공 숙과 상의해 군대를 일으켜 이들을 토벌했다.

치열한 전투는 무려 4년간 지속되었고 결국 무경을 비롯한 삼감은 모조리 주문공에게 잡혔다.

주문공은 이들을 엄히 다스렸다. 비록 형제이지만 반란죄로 무경과 관숙, 채숙은 사형에 처하고 동생인 곽숙은 멀리 귀양 보냈다.

주문공은 무경에게 주었던 은나라를 반으로 나눠 동생 강숙에게 주어 위衛나라로 봉했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미자에게 주어 송宋나라로 임명했다.

 

주문공은 군대를 몰고 원정을 감행해 동으로는 서해 바다까지, 남으로는 회하 이남, 북으로 요동까지 중소제후국을 토벌해 주나라의 광대한 영토를 결정지었다.

그리고 성왕을 모시고 수도를 지금의 낙양인 낙읍으로 옮기고 주나라 직계 혈통에게 수도 근방의 수비를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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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신하의 예를 지킨 2인자의 표본

 

어린 성왕은 삼촌인 주문공이 두려웠다. 주문공은 엄격했다.

그는 성왕을 모시고 정사를 보는 자리에서는 이른바 황제만 앉을 수 있는 ‘남면’을 했다.

황제는 남쪽을, 신하는 북쪽을 바라보는 것이 당시 예의였다.

주문공이 남면을 한 것은 섭정으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확보하면서 주황실의 권위를 내세우고 혹시 있을 수도 있는 다른 제후국의 반란 모의를 자신의 권위와 존재로 제압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성왕에 대한 교육도 소홀치 않았다.

 

주문공은 성왕과 자신의 아들을 같이 가르치며 성왕이 실수를 하거나 게으르면 성왕 대신 자신의 아들에게 매를 드는 엄한 훈계를 서슴지 않았다.

또한 ‘부모가 일궈놓은 창업을 자식이 교만하고 사치를 부리면 집안과 나라를 망친다’는 ‘다사 多士’와 ‘조부인 문왕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밥 먹을 겨를도 없이 정사를 돌보았다’는 ‘무일 無逸’을 지어 성왕에게 전달했다.

 

한번은 성왕이 병에 걸렸다. 그러자 주문공은 황하에게 제를 올렸다.

자신의 손톱을 잘라 황하에 던지며 “아직 왕께서 어린 몸이라 사리분별이 분명치 않습니다. 혹시라도 천명에 거슬리는 일이 있었다면 이는 모두 왕을 모시는 나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벌을 받겠습니다. 부디 성왕의 병을 낫게 해주십시오”라고 제문을 지어 올리고 그 제문을 궤에 보관했다.

그야말로 무왕, 성왕을 2대에 걸쳐 모시면서 뜨거운 충성심을 드러낸 것이다.

 

주문공이 섭정을 시작한 지 7년 뒤 성왕은 성년이 되었다. 주문공은 모든 권한을 성왕에게 넘기고 신하의 예로 돌아왔다.

성왕 앞에서도 남면이 아닌 북면을 했고 누구보다 더 철저하게 성왕에 대한 예를 갖췄다. 하지만 성왕에게 주문공은 커다란 산이었다.

작은 아버지이자 주나라의 창업공신이고, 자신의 후견인이었으며 지금도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무서운 존재였다.

두려움은 경계심을 낳았고 이는 의심으로 번졌다.

그 틈을 간신들이 비집고 들어갔다. 온갖 중상모략이 난무했고 이간질이 넘쳐났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던 성왕도 차츰 주문공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주문공은 평생 권력의 부침을 경험한 노련한 정치가였다.

그는 비록 조카이지만 성왕의 의심이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모든 권력과 물질을 내려놓고 수도를 떠나 시골로 들어갔다.

그가 권력의 중심에서 내려오자 유언비어는 수그러들었다.

그때 누군가 성왕에게 고자질을 했다.

 

“일찍이 폐하께서 병을 얻으셨을 때 주문공이 황하에서 제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 제문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것을 열어보면 주문공의 속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왕은 궤를 열었다. 그곳에는 두 통의 제문이 들어있었다.

하나는 아버지인 무왕이 아팠을 때 ‘대신 죽겠다’는 내용이었고, 또 하나는 자신이 아팠을 때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라는 주문공의 속마음이 들어있었다.

성왕은 주문공을 의심했던 자신을 자책하고 통곡했다고 한다.

그리고 시골에 은퇴해 있던 주문공을 다시 모셔와 이후 모든 국정을 의논하는 최고의 자문관으로 삼았다.

 

세월이 흘렀다. 성왕의 치세는 날로 태평성대를 구가했다. 주문공은 늙고 병들었다. 그는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나를 지금의 천자인 성왕을 모시는 성국에 묻어라. 나는 죽어서도 천자의 옆을 떠날 수가 없다. 즉 나는 성왕의 신하인 것이다.”

 

주문공이 죽자 성왕은 곡을 하고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명령을 내렸다.

 

“주문공의 유언을 따를 수가 없다. 주문공의 묘는 시조 문왕의 능이 있는 필에 모셔라. 내가 그의 충심을 알지만 주문공을 어찌 신하로 대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너무나 송구한 노릇이다.”

 

그리고 성왕은 주문공의 자손들이 왕으로 가 있는 노나라에 대해서 천자의 예로 하늘에 제사를 올릴 수 있게 했다. 주

나라의 시조인 문왕의 제사도 지내며 음악과 예절에서도 천자의 예를 따라 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

그만큼 성왕에게 주문공은 가정교사이자 든든한 후견인이며 국정의 수호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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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세학 | 1인자에게 가장 머리를 깊게 숙이는 자는 2인자이다

 

역사에서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예를 수없이 찾을 수 있다.

당 태종 이연도 그랬고 조선 태종도 왕권을 이복동생에게 넘기려는 태조의 명을 거역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부자지간에도 이런데 하물며 나이 어린 조카에게 넘어간 권력을 빼앗은 사례는 많다.

 

명나라 영락제는 조카 건문제를 몰아내고 황제가 되었고, 조선 세조는 어린 단종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했다.

주문공 역시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형인 무왕과 함께 주나라 창업의 지분을 갖고 있는 절대 공신이었고, 어린 조카의 섭정으로 주나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기도 했다.

또한 개인적인 능력에서도 그는 명군이 될 자질이 충분했다.

 

하지만 주문공은 2인자의 자리를 지켰다.

수없이 많은 권유와 유혹이 뿌리치고 그가 2인자의 자리에 만족한 것은 개인적인 욕망보다 주나라의 창업과 지속을 위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는 강력한 봉건제를 실시하면서 적장자 상속에 의한 왕권 계승 시스템을 만들었고 씨족사회의 전통을 국가제도에 융합했다.

정치와 윤리를 한 데 묶어 유학의 기본적인 틀을 도입해 무려 800년 간 존속할 수 있는 주나라의 틀을 세운 것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주문공은 정치가, 군사전략가이면서도 성인으로 추앙받을 만큼 도덕과 예를 갖춘 ‘된 사람’이었다.

정치에 있어 항상 덕과 민심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잃지 않았다.

그는 노나라를 봉분 받고도 국사를 위해 아들 백금을 대신 노나라로 보냈다. 주문공은 아들을 불러 당부했다.

 

“나는 여기 남아서 국사를 돌봐야 할 것이다. 네가 이제 노나라를 다스려라. 나는 시조인 문왕의 아들이요, 무왕의 동생이며 지금 천자의 작은 아버지다. 수많은 제후 중에서도 가장 고귀하고 높은 신분이다. 하지만 나는 사람이 찾아오면 그가 누구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또한 감던 머리도 중단하고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뛰어나오고 밥을 먹다가도 누가 찾아오면 씹던 밥을 뱉어내면서 그를 맞았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혹시라도 찾아온 분들의 좋은 충고를 들을 기회를 놓치고 또한 훌륭한 인재를 돌려보내거나 기다리게 하는 무례를 할까 두려워서이다. 너는 노나라에 가서도 항상 겸손하게 사람을 대하고 따뜻하게 백성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하루에도 무려 70여 명의 인재를 만났던 주문공의 일화에서 ‘악발토포 握髮吐哺’ 즉 ‘머리카락을 쥐고, 밥을 뱉어낸다’는 고사성어가 탄생했다.

이만큼 주문공은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에서 어긋나거나 명분을 잃는 행동을 항상 삼갔다.

그런 그가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는 일은 아마도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주문공도 안타깝게 여긴 일이 있다. 노나라로 떠난 아들 백금이 3년 만에 소식을 전해왔다.

 

“왜 늦었느냐?”는 질문에 “노나라 백성들의 풍속을 바꾸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라고 전했다.

 

이에 비해 제나라로 간 태공 망은 불과 5달 만에 소식을 전해왔다. “어떻게 이렇게 빠를 수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태공 망은 “예를 간단히 하고 제나라 백성들의 풍습을 존중하면서 정치를 했더니 빠르게 정착했습니다.”

이를 듣고 주문공은 “장차 노나라는 제나라의 지배를 받겠구나. 정치라는 것은 백성이 따라야 하고 백성이 따르기 위해서는 쉽게 해야 하는 것인데 제나라는 이를 제대로 알고 있다”며 탄식을 했다.

 

주문공의 처세에 있어 가장 돋보이는 점은 섭정에서 물러나 철저하게 신하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그는 어린 성왕에게 그 어떤 신하보다 예를 다해 모셨고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물론 성왕의 의심을 받았지만 여기서 그의 행동은 지혜로웠다.

 

그는 변명하거나, 자신의 세를 과시하지 않았다. 깨끗하게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은퇴를 선택한 것이다.

만약 주문공이 성왕에게 무력시위를 하거나 주나라 창업의 공을 내세워 자신의 권력에 미련을 가졌다면 아마도 주나라는 내전에 휩싸이거나 국론이 분열되는 위기를 맞았을 것이다.

 

주문공의 이 같은 처세는 훗날 성현인 공자마저도 탄복할 정도였다.

주문공의 현명하면서도 깔끔한 처신은 역사 속 많은 2인자들에게 표본이 되었다.

물론 그와 같은 영웅과 성현의 교집합의 삶을 산 2인자는 찾기 드물지만 말이다.

 

 

▶1인자는 항상 2인자의 모자람을 즐긴다

 

생각해보면 학창시절 부반장, 부회장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반장과 회장을 대신하는 역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부반장은 반에서 2인자로 군림했다.

그것은 그가 언제든지 1인자가 될 수 있는 제1순위였기 때문이다.

 

직장도 마찬가지다. 차장은 부장을 보좌하며 일종의 안살림꾼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부장에게 직접 하기 어려운 부원들의 불만을 취합해 전달하기도 하고 반대로 부장의 뜻을 부원들에게 이해시키는 등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중간도 해도 다행이다. 그야말로 잘하면 본전이고, 잘못하면 양쪽에서 원성을 사는 실속없는 자리이기도 한 것이다.

 

부장은 차장에게 많은 권한과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부원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차장님은 이 정도는 부장님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힘이 있을거야”라고 생각한다.

즉 양쪽에서 모두 차장을 2인자로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차장이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물론 업무적으로는 당연히 일정 부분을 맡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일은 주로 ‘정무적인 판단’과 ‘부서의 소통’과 같은 ‘차장이 아닌 2인자’로서의 역할이다.

이런 경우 2인자로서의 차장은 명확하게 자신의 영토를 마음속으로 그려야 한다.

즉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와 2인자로서의 권한이 어디까지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부원들의 휴가나, 출장을 조정하는 것도, 누구를 모범사원으로 추천하는 것도, 인센티브 대상을 선정하는 것도 1인자의 몫이다.

당연히 인사고과의 최종적인 판단 등 권한을 행사함으로써 존재가치를 드러낼 수 있는 일 역시 그렇다.

‘먼저 알고 있다’는 일종의 1인자와의 밀접한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귀뜸을 슬쩍해주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즉 자신이 그린 영토에 1인자의 영토와 겹치는 부분은 최소화하고 부원들을 지배하는 영역 표시 또한 최소화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역사 속 1인자들의 공통점은 유능한 2인자나, 참모를 인정치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능력에서는 떨어지지만 덕을 갖춘 1인자 휘하에 뛰어나고 충성심 많은 2인자들이 존재했다. 직장도 마찬가지다.

 

날카롭고 똑똑한 1인자, 즉 부장은 유능하고 자신의 집을 지을 줄 아는 2인자를 불편해 한다.

그런 부장과 같이 일을 할 경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생색내는 일은 무조건 1인자에게 그리고 2인자인 당신은 적당한 악역을 담당하는 것이다.

부원들이 부장에게 ‘당신의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하면 오히려 당신은 안심해도 되는 것이다.

부장은, 1인자는 항상 ‘2인자의 모자람’을 즐기기 때문이다.

 

 

 

박기종(커리어코칭칼럼니스트) / 사진 픽사베이자료제공 Citylife
발행일 2016.08.10기사입력 201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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