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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년 헌종(憲宗·1827~1849년, 재위 1834~1849년)이 조선 24대 왕으로 즉위했다.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조선 역사상 최연소 즉위 기록을 세운 왕이다.

 

나이도 어렸거니와, 당시 정국의 실세는 대비인 순원왕후 김씨와 그의 인척인 안동 김씨였다.

19세기 세도정치가 절정을 이루는 시점에서 어린 왕이 할 일은 많지 않았다.

 

헌종은 15년간 재위했지만 역사에 별다른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다.

그나마 그가 남긴 유산이라면 후궁인 경빈 김씨를 위해 지어준 낙선재(樂善齋)와 석복헌이다.

낙선재와 석복헌은 훗날 조선 왕실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공간이 된다.

 

1834년 순조가 승하하자, 왕위는 세손으로 지명돼 있던 헌종이 계승하게 됐다.

아버지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하던 효명세자가 1830년 22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고, 순종 역시 세자 사후 4년 만인 1834년에 승하했다.

헌종이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배경이다.

 

헌종은 효명세자와 신정왕후의 장자로서 이름은 환(奐), 호는 원헌(元軒)이다.

1827년 7월 18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경춘전은 헌종의 증조 할아버지인 정조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헌종 즉위 후 대비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시행됐다.

 

정치는 안동 김씨의 주도하에 반남 박씨 등 몇몇 가문이 주도했고, 비변사가 권력의 최고 기구로 떠올랐다.

안동 김씨의 위상이 절정에 달했음은 1837년 11세의 헌종이 안동 김씨 김조근의 딸(효현왕후, 1828~1843년)을 왕비로 맞이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헌종 재위 기간 동안 대규모 천주교 탄압이 이뤄졌다.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봉자는 더욱 늘어났다.

천주교 신자들의 활동과 더불어 서양인 선교사가 입국하기 시작했다.

 

1835년 모방 신부가 들어왔다. 모방 신부는 김대건 등을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1837년에는 샤스탕 프랑스 신부에 이어 앙베르도 입국했다.

서양인 선교사의 입국과 천주교 확산은 조정에 큰 파장을 끼친다.

 

1839년 3월 우의정 이지연이 사학(邪學·천주교)의 진상 조사를 청하고, 5월 25일 순원왕후가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내리면서 본격적인 천주교 탄압이 진행됐다.

 

6월 10일 신도 8명의 처형을 시작으로 8월에는 정하상과 서양인 신부 3명이 처형됐다.

이때 정하상은 척사윤음에 대해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올려 천주교를 적극 변호하기도 했다.

 

1841년, 15세 헌종의 친정이 시작됐다.

원칙은 20세 성인이 될 때까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지만, 기간이 너무 길어 5년을 단축했다.

헌종의 친정 이후에도 안동 김씨 세력은 비변사를 중심으로 계속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의 가문인 풍양 조씨 세력이 강화되면서 이전처럼 안동 김씨가 일방적으로 독주하긴 어려운 상황이 됐다.

1846년 20세가 된 헌종은 서서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안동 김씨에 의해 쫓겨나 제주도에 유배된 김정희를 석방했으며 총융사, 훈련대장, 병조판서까지 국방과 군사 요직을 모두 안동 김씨나 외척이 아닌 인물로 채웠다.

 

하지만 본격적인 친정을 시도하던 헌종에게 주어진 삶은 너무나 짧았다.

조금씩 진행되던 병세가 갑자기 악화돼 1849년 6월 창덕궁 중희당에서 숨을 거뒀다.

재위 기간은 15년이었지만 여전히 23세 젊은 왕이었다.

 

헌종의 무덤은 동구릉 경역 내에 조성됐으며 경릉(景陵)이라 부른다.

현재 경릉은 헌종 곁에 효현왕후와 효정황후의 무덤 3개가 나란히 묻혀 있는 삼연릉(三連陵)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정비와 계비가 왕 옆에 나란히 묻힌 경우는 조선의 왕 중 헌종이 유일하다.

 

헌종이 재위 9년째인 1843년 8월 25일.

효현왕후가 창덕궁 대조전에서 16세 나이로 승하했다.

 

헌종의 나이도 이제 17세.

새로운 왕비를 맞이해야 했기에 왕비 승하 후 1년 만인 1844년 10월 18일 남양 홍씨 홍재룡의 딸(효정왕후)을 계비로 맞이했다.

그런데 효정왕후가 계비로 간택된 지 3년 만인 1847년 11월에 대왕대비인 순원왕후는 언문 교지를 내려, 중전에게 병이 있다는 이유로 헌종의 후궁을 간택하게 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내린다.

 

“국조(國朝)의 전례를 따라 사족(士族) 가운데서 처자(處子)를 가려 빈어(嬪御·후궁)에 둔다면 후사를 널리 구하는 도리가 오직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조치를 통해 순원왕후는 후궁 간택이 왕의 후계를 잇게 하는 차원임을 분명히 했다.

14세부터 19세까지 처녀에 대한 금혼령이 내려졌고, 그해 10월 20일 주부 김재청의 딸을 간택해 경빈(慶嬪)으로 책봉했다.

경빈 김씨의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광산 김씨는 조선 후기 송시열의 스승인 김장생과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를 배출한 명문가였다.

 

헌종은 1847년 왕권 강화를 시도하면서 낙선재를 건립했다.

헌종 문집인 ‘원헌고(元軒稿)’에 수록된 ‘낙선재 상량문(上樑文)’에는 낙선재 이름의 유래와 함께, 일반 사대부가의 건물처럼 단청을 칠하지 않은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붉은 흙을 바르지 않음은 규모가 과도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화려한 서까래를 놓지 않음은 소박함을 앞세우는 뜻을 보인 것이다.”

 

특히 헌종이 증조부인 정조의 뜻을 이어받고자 하는 의지를 담아 낙선재를 세웠다는 점이 주목된다.

정조는 1776년 즉위 직후 개혁의 공간으로 규장각을 건립했는데, 이때 규장각의 2층은 수많은 책과 선왕의 어진을 보관하는 주합루(宙合樓)였다.

 

정조는 1782년(정조 6년) 세자의 공간으로 중희당을 건립하며, 바로 연접하는 곳에 주합루를 모방한 소주합루(小宙合樓·헌종대 승화루로 개칭)를 세웠다. 헌종은 낙선재를 바로 이 소주합루 옆쪽에 만들었다.

 

헌종은 낙선재 승화루에 많은 서책을 보관했다.

정조에 이어 많은 장서를 보관하고 서책을 연구하려는 헌종의 의지였다.

또 승화루에 보관한 서책 목록을 정리한 ‘승화루서목(承華樓書目)’을 보면, 책이 총 3742권이며 서화가 총 665점에 이른다.

헌종은 승화루 옆에 낙선재를 건립하고 훙서(왕의 죽음)하기 전까지 낙선재를 주요 활동 공간으로 이용함으로써, 규장각을 건립한 정조를 본받아 정치 개혁의 의지를 보이고자 했다.

 

낙선재 건립 이듬해인 1848년(헌종 14년) 8월 11일, 헌종은 낙선재 동쪽에 석복헌을 지었다.

석복헌은 ‘복(福)을 내리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복은 왕세자를 얻는 것이라 추측된다.

 

석복헌은 헌종이 후궁인 경빈 김씨를 위해 지은 공간이었다.

정조를 닮고 싶어 했던 헌종은, 후궁을 들이는 데도 그 전례를 따랐다.

정조가 정미년인 1787년(정조 11년)에 후궁 수빈 박씨를 들인 것처럼, 헌종은 그로부터 꼭 60년 만인 1847년(헌종 13년) 정미년에 경빈 김씨를 들였다.

 

정조가 수빈 박씨를 맞아들인 예에 따라 헌종은 경빈 김씨와 가례를 거행했다.

이는 장차 후궁을 통해 태어날 원자의 권위와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것과 관련이 깊다.

이후 경빈 김씨는 순화궁(順和宮)이란 궁호를 받았다.

 

헌종은 석복헌을 새로 지으면서, 옆에 있는 수강재도 함께 중수(重修·건축물의 낡고 헌 것을 고침)했다.

수강재 중수 상량문에는 수강재를 고쳐 지은 이유가 육순을 맞이한 대왕대비의 처소로 사용하기 위해서라고 밝혀져 있다.

 

수강재를 중수하면서 헌종은 정비가 아닌 경빈 김씨의 건물과 순원왕후의 건물을 나란히 배치했다.

경빈 김씨의 위상을 높이고 그 후사의 권위와 정통성을 높이려 했던 헌종의 의지를 담은 것이다.

정조는 창경궁에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자경전을 짓고 인근의 집복헌(集福軒)에서 결국 수빈 박씨가 낳은 순조를 얻었다.

헌종은 이런 전대의 좋은 기운을 이어받기 위해 석복헌과 수강재를 나란히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헌종의 기대와 달리 경빈 김씨는 후사를 낳지 못했다.

낙선재를 지어준 지 불과 1년 만인 1849년 6월에 헌종이 세상을 떠난 것도 한 요인이었을 터다.

경빈 김씨는 헌종이 승하하자 궁에서 나와 현재의 안국동 근처에서 살다가 광무 11년(1907년) 6월에 76세로 생을 마쳤다.

고종은 김씨가 서거하자 극진히 예우를 다했다.

 

현대에 들어와 낙선재 주변은 마지막 황비 순정효황후,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마지막 공주 덕혜옹주 등이 거처하면서, 국권을 빼앗긴 조선 황실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인식돼왔다.

 

하지만 사실 낙선재를 세운 주인공은 헌종과 경빈 김씨다.

낙선재가 처음 세워진 과정에서 정조를 닮고자 했던 헌종의 의지와 경빈 김씨에게 후사를 얻으려는 헌종의 사랑이 있었음을 기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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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정윤정자료제공 매경이코노미
발행일 2016.08.16기사입력 201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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