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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3일 부산에 도착한 왜군은 20여 일 만인 5월 3일 한양에 무혈 입성했다. 곧바로 개성에 이어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달아났던 선조는 중국으로 망명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벼랑 끝 위기에서 명나라는 대군을 보내 조선을 구한다. 명은 조선을 이를 위해 군사 21만명, 은(銀) 883만냥 등 막대한 물량을 쏟아 부었다.

명나라 원병이 없었다면 조선반도 전체가 왜의 수중에 들어갔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성호 이익이 임진왜란 극복 최고의 공로자로 꼽은 석성 초상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흔히 임진왜란 최고 영웅은 충무공 이순신을 꼽는다.

수상 보급로를 차단해 평양성의 왜군이 의주로 진격하는 것을 막아서다.

하지만 전쟁을 극복하는 데 실질적으로 가장 공이 큰 인물은 ‘석성’(石星)이라는 중국인이다.

실학자 이익(1681~1763)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임진왜란의 최대 공로자는 석성이며 이순신은 그 다음이고 이여송(李如松)과 심유경(沈惟敬)이 또 그 다음”이라고 했다.

 

당시 중국 조정에는 ‘파명 불가’ 목소리가 비등했다.

전통적으로 중국은 오랑캐 싸움에는 끼어들지 않았다.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략하려는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 때 군권을 쥐고 있던 병부상서(병조판서) 석성이 “조선이 점령되면 왜군은 곧장 베이징으로 쳐들어올 것”이라고 설득했고 황제는 결국 대규모 원병을 결정한다.

왜와의 평화교섭을 주도했던 명나라 사신 심유경을 추천한 사람도 바로 석성이다. 전쟁에서 조선을 구한 것은 사실상 그였던 셈이다.

 

석성은 상하이 출신으로 명나라 목종이 주색에 빠져 정무를 등한시 하자 이를 만류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평민으로 신분이 강등된다.

1573년 신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공부상서, 호부상서 등을 섭렵한다.

그리고 임란이 발생하자 그는 명 정부와 조선 정부는 서로 순치(唇齒)의 관계임을 내세워 조선 파병을 성사시킨다.

석성은 출생이나 경력을 볼 때 우리와 연관성이 전혀 없다. 그런 그가 무슨 이유로 조선에 그토록 우호적이었던 것일까.

 

홍순언(1530~1598)과의 인연이 그 배경에 있다.

홍순언은 조선 통역관으로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해결해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 당릉군(唐陵君)에 봉해진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당대 대명회전(大明會典) 등 명나라의 국가 공식 기록에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돼 있어 논란이 컸다.

이를 바로 잡아달라고 요청한 사건이 종계변무였으며 조선왕실의 숙원이었던 이 문제를 처리한 사람이 바로 홍순언이다.

 

젊은 시절 홍순언은 베이징에서 한 술집을 들렀다.

미모의 여성을 보고 주인에게 불러 달라고 했는데 이 여인은 난데없이 소복차림으로 들어왔다.

홍순언이 놀라 연유를 묻자 여인은 “저희 아버지는 절강 출신으로 이곳에서 질병을 얻어 어머니와 함께 돌아가셨다. 고향에다 장사를 지내고 싶지만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 부득이 몸을 팔아 장례비를 대려고 한다”고 하소연했다.

여인은 삼백금이 필요하다고 했고 의기 충만했던 홍순언은 곧장 전대를 풀어 돈을 건넸다.

기대치도 못한 일에 여인이 “이름이라도 알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데도 기어코 이름 밝히기를 거부하다가 성만 가르쳐 주고 술집을 나왔다.

 

이 여인이 후일 예부시랑 석성의 두 번 째 부인이 된 류 씨 부인이다.

부인은 홍 역관의 은혜를 잊지 못했다.

부인에게서 이야기를 전해들은 석성은 조선 사신을 볼 때마다 홍 역관이 따라왔는지 물었다.

1584년(선조 17) 홍순언이 종계변무사 황정욱(黃廷彧, 1532~1607)을 수행해 중국 땅을 밟으면서 감격스런 첫 만남이 이뤄진다.

사신단이 베이징 조양문 밖에 당도하자 기병이 달려와 “예부시랑이 부인과 기다린다”고 알렸다.

예부시랑은 비단장막 안에서 홍순언을 맞아 “베이징 술집에서 있은 일을 기억하는가. 그대는 진정 천하의 의사”라고 감사를 표했다.

절을 하는 류 씨 부인을 홍순언이 만류하자 석성은 은혜에 보답하는 절이니 거절 말라고 하면서 두 사람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

부인은 ‘보은’(報恩)이라고 수놓은 비단 수십 필을 선사했으며 남편에게 말해 종계변무도 종결짓도록 했다.

류 씨는 명나라가 지원군을 조선에 파견하는 데도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그러나 화의가 진행되면서 철병했던 왜가 1598년 협약을 어긴 채 정유재란을 일으키자 명나라 조정은 강화 실패, 막대한 군비 조달 등의 책임을 물어 석성의 관직을 박탈했고 이듬해 그는 결국 옥중에서 숨진다.

류 씨 부인 등 그 가족들도 유배형에 처해졌다.

석성은 조선에 구명 외교를 벌여 줄 것을 간청했으나 외면 당한다.

 선조는 명의 조정이 결정한 일을 왈가왈부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끝내 모른체 했다.

 

1644년 명나라가 망하자 석성의 차남 석재금(石在錦)이 식솔들을 이끌고 조선에 망명했다.

이들은 중국의 본향을 그대로 이어받아 본관을 조주 석 씨(潮州石氏)라 했으며 석성을 시조로 삼았다.

선조는 석성에게서 등을 돌렸지만 그에 대한 제사와 신원(伸寃) 문제는 후대에 끊임없이 논의된다.

정조는 “석 상서는 은혜를 베풀었는데 갚지 못했다”며 “그의 죽음은 우리 때문”이라고 한탄했다.

 

△임란 당시 명나라 군대를 총지휘한 이여송 초상화. 일본 덴리대 소장


임란 때 활약한 중국인 중 방해어왜총병관(防海禦倭總兵官)으로서 명나라 부대를 지휘한 이여송 장군의 이름이 낯익다.

석성과 달리 나쁜 이미지가 강하다. 조선 출신인 이영(李英)의 후손으로 집안은 요동을 기반으로 성장했으며 부친의 벼슬을 물려받아 지휘사가 됐다.

황제의 명에 따라 명군 4만3000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온 이여송은 우리 군대와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지만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후로는 기세가 꺾여 싸움을 기피한 채 교섭에만 일관했다.

명나라 군대는 그러면서 가는 곳마다 약탈, 강간, 폭행 등의 범죄를 저질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이여송은 명나라로 귀국한 뒤 요동총병이 됐으며 1598년 타타르가 요동을 침공하자 경기병(輕騎兵) 4000여 명을 이끌고 방어에 나섰다가 복병을 만나 전사했다.

이여송의 후손 역시 우리 땅에 살고 있다.

이여송의 손자 이응인(李應仁)은 명청 교체기의 혼란 속에 조선으로 왔다. 이여송은 또한 조선에 주둔할 때 부인과 자식도 뒀다.

 

정조 24년 4월 8일자 실록에 “제독이 우리나라 사족(士族)의 딸을 맞아들여 사내 아이를 낳았는데 그 후손 중 첫 급제자가 나왔다”고 적혀 있다.

석성과 이여송의 초상화가 현전한다.

석성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여송은 우리나라 초상화를 다수 소장하고 있는 일본 덴리대가 갖고 있다.

망명한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었던 것들로 추측된다.

 

배한철 기자자료제공 매일경제
발행일 2016.08.30기사입력 201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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