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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 6월 헌종 사후 왕위를 계승했지만 철종(1831~1863년, 재위 1849~1863년)은 제대로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19세기 순조의 즉위부터 본격화된 외척 중심의 세도정치는 철종대에 절정을 맞이했다.
권력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등 소수 가문에 집중됐고, ‘세도 가문→탐학(탐욕이 많고 포학함)한 수령→아전’으로 이어지는 먹이사슬 구도에서 최하위층인 농민의 피해는 더욱 커졌다.
왕이 정치로서 제대로 민생을 해결해주지 못하자, 마침내 농민들이 폭발했다.
1862년(철종 13년)이 임술년이고, 진주가 민란의 중심지였기에 ‘임술민란’ 또는 ‘진주민란’이라고 부른다.
진주민란은 19세기 중반의 철종 시대가 얼마나 힘든 시절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1811년 홍경래가 평안도를 중심으로 농민 봉기를 일으켜 한때 정주성을 점령하는 등 조정을 긴장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세도정치에서 파생하는 봉건제도의 문제점은 개선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농민을 고통스럽게 했던 세금과 신분제의 모순은 전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농민의 불만은 최고조에 다다르고 있었다.
특히 홍경래의 난이 평안도에 국한됐다면 진주민란은 전국적으로 확대된 사건이었다. 

1862년 2월 29일 철종은 경상도 관찰사 이돈영의 급보를 받았다. 

“진주 난민(亂民)들이 병마절도사를 협박하고 인명을 불태워 죽였다.” 

사실 1862년 진주를 중심으로 타오른 농민 봉기의 횃불은 이전의 민란과는 많은 차이를 보였다.
진주뿐 아니라 삼남 지방은 물론이고 나아가 조선 전역을 뒤흔든 민란의 기폭제가 됐기 때문이다. 

진주에서 농민 봉기를 촉발시킨 직접적인 원인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백낙신(白樂莘)의 탐학에 있었다.
안 그래도 생계가 막막한 농민들에게 부당한 세금을 걷으려 하자, 이에 반발해 농민들이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백낙신은 무기 구입 예산 3800냥을 전용해 쌀 1200가마를 구입했다.
이를 농민에게 강제로 대출해주고 이자 7000냥을 챙겼다.
아전들과 결탁해 재산을 증식시키는 등 전형적인 부정부패 관리였다.
분노한 농민들은 “탐관오리들이 훔쳐 먹은 환곡을 백성들에게 거두지 말라”고 외치면서 대규모 항거에 나섰다.
진주 관아로 몰려가 관리들에게 사죄할 것을 요구하고 탐관오리의 처벌을 주장했다.
농민들의 위세에 눌린 진주목사와 백낙신은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해 겨우 목숨만은 보전했다. 

기세가 등등해진 농민들은 평소 세금을 부당하게 징수하며 농민들을 괴롭히던 아전들을 잡아다 죽이는가 하면 악질 양반의 집을 방화하는 등 폭동의 양상으로 발전했다.
진주를 중심으로 시작된 농민 봉기는 경상도 20개 군현, 전라도 37개, 충청도 12개 군현 등 삼남 지방 전체로 확산됐다.
뒤를 이어 경기도, 황해도, 함경도 일부 지역의 농민까지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농민반란의 양상을 띠었다.
1862년 한 해에만 무려 37건의 민란이 발생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농민은 중앙정부의 수탈에 대해 말없이 복종하는 순한 백성이 아니었다. 

진주민란이 처음부터 무장봉기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처음 농민들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들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방법을 썼다.
하지만 조정에서 환곡의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토지에도 세금 부담을 지우는 도결(都結)을 징수하고, 가구별로 환곡을 부담하게 하는 통환(統還)을 실시하자 이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농민 봉기의 가장 큰 원인은 삼정이라 불리는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의 문란이었다.
전정은 토지에 대한 세금, 군정은 군역, 환곡은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이를 갚게 하는 제도였다.
그런데 철종 시대에는 세금이 과다 징수되고, 군역도 비대상자에게 부과됐다.
환곡은 고리대로 전락해 농민 불만을 가중시켰다.
정약용의 시 ‘애절양’에는 당시 군역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잘 나타나 있다. 

“시아버지 죽어 상복 이미 입었고 갓난아기 배냇물도 마르지 않았지만 삼대의 이름이 군적에 실렸다. (중략) 스스로 한탄하네 아이 낳은 죄로다.” 

죽은 사람이나 어린아이 할 것 없이 군역을 부과하고, 이를 감당할 수 없어 자신의 성기까지 끊는 비참한 사회상이 당시 현실이었다. 

한번 폭발한 민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진주민란의 주동자는 향임(鄕任) 출신인 유계춘.
그는 전직 관원인 이명윤 등과 상의해 처음 도결과 통환을 철회하는 집회를 준비했다.
하지만 이명윤이 불법시위를 강하게 반대하자, 결국 자신이 주도해 철시를 요구하는 한글 통문을 진주 읍내에 붙이고 초군(樵軍·나무꾼)패의 두목인 이계열과 합세해 초군을 봉기에 끌어들이는 등 독자 행동에 나섰다.
초군들은 대개 빈농 출신으로 지주나 부농들 아래에서 머슴을 살았다.
이들이 농민항쟁 시기에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건장한 체력과 탄탄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개 20~30명 단위로 활동하면서 산을 다니며 나무를 날랐기 때문에 협동심과 조직력이 강했고 대부분 힘을 갖춘 건장한 청년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흰 두건을 머리에 매고 몽둥이로 무장해 봉기의 선두에 나서면서 진주민란의 또 다른 주역으로 활약했다. 

진주민란 초기에는 세금 수탈에 불만을 품은 가난한 농민과 몰락 양반, 지방 토호들이 자치적 회의기구인 향회(鄕會)를 조직해 합법적인 소통 운동을 폈다.
그럼에도 조정에서는 별다른 대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결국 이들은 죽창 등 무기를 들고 일어나 수령이나 지주, 고리대금업자 등을 공격했고 이게 농민반란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진주 전역을 휩쓸었는데 이후 농민봉기는 진주를 거점으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로 번져나갔다. 

농민반란이 예상 밖으로 빨리 수습되지 않고 오히려 확산되는 추세를 보이자 위기감을 느낀 조정은 “탐관오리만 처벌하면 난이 가라앉을 것”이라는 기존 입장을 바꿨다.
안핵사와 암행어사를 파견해 사태 파악과 수습에 나서는가 하면, 주동자와 가담자의 처벌에 나서는 강경책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반란의 횃불은 여전히 꺼지지 않았다. 

당시 안핵사로 파견됐던 인물 박규수는 박지원의 손자이자, 효명세자의 개혁 정책에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진주민란 이후에도 박규수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의 멘토가 되면서 근대 시기 개화사상의 형성에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민란의 원인과 피해 상황을 조서하기 위해 조정에서 파견된 안핵사 박규수는 자신이 봉기 농민을 처벌하러 온 것이 아님을 주지시키고 반란 분위기를 진정시키는 데 역점을 뒀다. 

1862년 5월 철종이 박규수의 건의를 받아들여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한 것도 이반된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다.
19세기 농민들을 가장 괴롭혔던 전정, 군정, 환곡인 삼정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삼정이정청이 설치되자 농민 봉기는 잠시 진정되는 듯했다.
하지만 삼정이정청은 농민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사회문제를 해결하진 못했다.
정부 정책은 갈팡질팡했고, 대처 역시 미온적이었다.
이는 결국 제2, 제3의 진주민란을 불러오는 요인이 됐다. 

당시 농민반란의 주요 원인은 탐관오리와 아전들의 농민 착취였다.
하지만 허약한 왕실과 이미 부정부패가 관습화된 관리에게 더 이상 문제 해결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이미 조선 사회의 행정력은 지방 통제에 한계를 보였다.
철종과 자신의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려 했던 세도정치 권력 또한 백성의 불만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진주민란 이후에도 농민반란이 계속 발생한 것은 국가가 근본적으로 농민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1894년에 일어나 전통시대 해체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동학농민운동 또한 진주민란이라는 전국 규모의 반란의 경험이 이어진 결과물이었다. 

진주민란 후유증이 너무 컸던 탓일까?
철종은 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된 1863년 12월 두 달 넘게 이어진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가운데 12월 8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했다. 

철종은 왕비인 철인왕후와의 사이에서 후사를 두지 못했고, 유일한 자녀는 후궁인 숙의 범씨가 낳은 영혜옹주 1명뿐이었다.
영혜옹주의 남편은 개화파로 유명한 박영효다.
헌종과 철종이 연이어 후사 없이 승하하면서 조선 왕실은 다시 한 번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한 정치적 대결을 벌이게 됐다.
특히 철종 시대부터는 서양 세력의 침략 또한 노골적으로 진행되면서 조선은 안과 밖으로 격동의 시기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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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정윤정]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자료제공 매경이코노미
발행일 2016.09.12기사입력 201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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