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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고려왕씨족보에 실린 왕건 초상화. 바다 용왕의 후손임을 강조하려 한듯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북한 소장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877~943)의 조부인 작제건은 용왕의 사위라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이 때문에 고려 왕 씨 후손의 겨드랑이에는 용의 비늘이 돋아났다고 한다.

작제건이 젊은시절 상선을 타고 당나라로 가는데 배가 바다 한 가운데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신라인을 바다에 던져야 배가 다시 움직일 것이라는 점괘가 나오자 작제건은 스스로 물속으로 투신했다.

작제건은 바다 용왕을 만나 그의 딸 용녀를 아내로 얻었다.

용왕은 작제건에게 "동방의 왕이 될 것이되 건(建)자가 붙은 이름으로 3대를 내려가야 한다"고 알려줬다. 

 

 

 

사진설명왕건의 고려건국을 예언한 도선국사 진영. 선암사 소장.

 

 

작제건은 용녀와 함께 송악 남쪽에 정착해 네 형제를 가졌으며 이 중 큰 아들 용건은 도선대사가 점지해 준 명당에 집을 짓고 신라 49대 헌강왕 3년(877)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이 바로 왕건이다. 이로써 작제건, 용건, 왕건까지 3대에 걸친 건(建)자 이름이 완성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작제건 이전의 조상이 불분명하다.

고려사에 따르면 왕건은 천하를 통일한 이듬해인 919년 3월 조부모에 의조경강대왕(懿祖景康大王)과 원창왕후(元昌王后), 부모에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과 위숙왕후(威肅王后)의 시호를 올렸다.

조선이 목조(이안사), 익조(이행리), 도조(이춘), 환조(이자춘) 등 태조 이성계의 5대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제왕에 준하는 의례를 행했던 것과 대비된다.

고려사 첫 머리의 '고려세계'는 "고려 왕실의 조상은 역사기록이 없어서 상세하지 않다"고 기술한다.

왕건의 집안은 예성강 유역의 유력 호족 출신인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작제건과 그의 아들 용건은 성조차 없다.

 

개국한지 200년이 훨씬 지나서야 고려는 왕조의 조상찾기에 골몰한다.

고려 18대 의종(1146~1170)은 김관의에게 명해 고려왕실의 뿌리와 고려국의 기원을 새롭게 정리한 '편년통록'(編年通錄)을 편찬케 했다.

편년통록은 작제건 이전 5대까지의 조상과 그들의 행적을 상세히 서술했다.

이 책은 전하지 않지만 자세한 내용은 후대의 기록물인 고려세계에 잘 나와 있다.

 

이에 따르면 호경은 성골장군(聖骨將軍)을 자칭하며 백두산으로부터 각처를 유랑하다가 개성 부소산 골짜기에 정착해 이 곳 여인과 혼인했다.

어느 날 동네 사람들과 평나산에 사냥을 갔다가 날이 저물어 굴속에서 자려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났다.

혼자서 이를 물리치기 위해 굴 밖으로 나가자 호랑이는 사라졌고 별안간 굴이 무너져 그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압사했다.

호경의 아들 강충은 부잣집에 장가들어 큰 부자가 됐고 "부소산에 소나무를 심어 바위를 드러내지 않으면 삼한을 통합할 후손이 태어난다"는 술사의 말에 소나무를 심고 산의 이름을 송악산으로 고쳤다.

강충에게서 이제건과 보육 등 두 아들이 태어났다.

보육이 꿈에 곡령에 올라 남쪽을 향해 오줌을 누는데 온 산천이 은색 바다로 변했다.

이 말을 들은 이제건은 자신의 딸인 덕주를 동생 보육과 혼인시켰고 그들은 두 딸을 가졌다. 당 현종 천보 12년(753) 훗날 당 숙종에 오르는 당나라 귀인이 예성강을 거쳐 보육의 집에 머물렀다.

귀인은 신분을 숨겼지만 보육은 그가 범상치 않음을 간파하고 딸 진의를 들여보내 동침하게 했다.

당 귀인이 떠난 뒤 진의가 임신했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작제건이다.

하지만 숙종은 어려서부터 한 번도 대궐을 나간 일이 없고 안녹산의 난(755~763년) 때 링우(靈武)에서 즉위했다.

당나라 황실의 혈통이라는 것은 왕건을 당 황실과 연결시키려는 후대의 의도이겠지만 그렇더라도 아무런 역사적 근거도 없이 그런 내용을 삽입하는 것은 너무 무모하다.

 

작제건의 아버지가 누구이길래 그랬던 걸까.

934년(태조 17) 7월 발해의 세자 대광현(大光顯)이 발해인 수만 명을 데리고 고려에 귀부하자 왕건은 그에게 왕 씨 성을 하사하고 고려왕실의 족보에 올려 왕족으로 예우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왕건은 또 후진(936~946) 고조에게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함께 공격하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계승했다고 천명했다.

왕건 역시 국호를 고려로 정하면서까지 직접적으로 고구려 부흥을 표방했다.

대조영이 고구려의 피를 물려받았듯 작제건의 아버지 역시 고구려 혈통을 물려받은 고구려의 후손은 아니었을까.

 

8세기 이후 산둥반도 등 중국 동해안 일대에 신라인 집단 거주 지역인 신라방과 신라촌, 신라번이 다수 형성된다.

주로 교역하던 상인들이 거주했으며 사신단, 유학생, 구법승과 함께 고구려·백제계 등 정치적 망명객도 상당수 머물렀다.

이 중 신라번은 완전히 독립된 자치국으로서 치외법권 지역으로 인정받았다.

실제 고구려계 유민인 치청절도사 이정기는 대운하를 장악한 뒤 국내외 무역에 나서면서 독자적 번진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를 종합할 때 신라에 왔던 당의 귀인을 당나라 황제의 아들이 아닌 재당 삼국 출신 상인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왕건의 조상인 호경이 백두산에서 내려온 것으로 표현된 것이나 건국 후 고구려 옛 땅을 되찾기 위한 북진정책을 고려의 국시로 삼은 것은 왕건이 재당 고구려인이 후예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고려사는 왕건의 용모에 대해 "눈이 부리부리하고, 이마는 넓고 툭 튀어나왔으며, 턱이 살쪘다. 목소리가 우렁찼다"고 표현했다.

용의 후예임을 억지로 강조한 느낌이다.

고려 왕 씨 족보에 그려진 영정이 이런 묘사와 비슷하다.

고려시대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던 경기도 연천 숭의전(崇義殿) 소장품으로 조선시대 모사된 것으로 알려진 영정과 같은 그림이다.

약간 돌린 오른쪽 얼굴을 그렸으며 다소 투박하지만 비범한 기운이 감도는 인물로 묘사돼 있다.

 

 

사진설명왕건의 아들인 고려 4대 왕 광종이 제작한 왕건 청동상. 고려왕씨족보 초상화와 달리 귀공자풍이다. 북한 소재.

 

왕건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유물이 또 하나 존재한다.

왕건의 셋째 아들인 4대 광종이 아버지의 존숭사업의 일환으로 만든 청동상은 고려 왕씨 족보의 영정과는 전혀 다른 '귀공자풍'의 얼굴을 하고 있다.

1992년 개성에 있는 왕건릉에서 우연히 발견됐다.

제작연대(10세기)나 앉은 키가 84.7cm로 성인 남자와 비슷한 점을 봐서 왕건의 실제 얼굴을 담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배한철 기자자료제공 매일경제
발행일 2016.09.19기사입력 201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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