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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는 거지, 탁발승, 홍건적 부대장이었던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는데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천재들의 공통점이자 단점인 자만과 자존감이 강해 정적이 많았다.
그의 선택은 정적과의 정면승부가 아닌, 다 버리고 떠나는 것.
그래서 유기는 명예와 가문을 보존할 수 있었던 중국 최고의 책사 중 한 명이다. 

 

 


▶‘장량, 제갈량, 유기’ 중국의 3대 책사 

수백 개의 나라가 불꽃처럼 타오르다 사라진 장구한 중국의 역사.
그 역사에는 제국을 창업한 황제도, 불세출의 영웅도 그리고 위대한 책사도 몸을 담고 있다.
역사가들은 이 수많은 영웅호걸 중에서 3명의 위대한 군사전략가이자 책사를 이견 없이 뽑았다.
첫 번째가 한나라 고조 유방이 “나의 꾀주머니 장자방”이라고 입버릇처럼 자랑하던 장량이다.
그는 항우와의 지난하고 불리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유방의 비밀 무기였다.
 
두 번째 인물은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 없는 인물, 유비의 명 참모이자 승상인 제갈공명이다.
촉나라가 삼국시대의 한 축으로 그 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제갈공명의 신출귀몰한 전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마지막 한 사람, 그가 바로 주원장을 도와 이민족 원나라를 멸하고, 별 볼일 없는 거지, 탁발승, 홍건적 부대장이었던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는데 막대한 공헌을 한 유기이다. 

이 중 장량과 유기는 통일제국을 완성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똑같은 운명의 길을 걸었다.
그것은 바로 피비린내 나는 토사구팽이라는 지옥불을 무사하게 건넌 것이다. 한나라 고조 유방과 명나라 홍무제 주원장은 절대 공신과 장군들을 숙청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고향마을에서부터 같이 자라고 수많은 전장터를 함께 누빈 형제 같은 장군들도, 명 참모로 나라를 세우는데 기둥 역할을 한 책사들도 모두 죽어나갔다. 하지만 장량과 유기, 두 사람은 황제가 깔아놓은 죽음의 덫에서 벗어났다.
당대 최고의 책사답게 자신의 운명까지 ‘생 生’의 계책을 마련한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 즉 공과 권력, 명예를 내려놓고 떠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본인들의 역할을 너무나 명확히 알고 있었다. 창
업까지는 같이 하지만 그 뒤에 따라오는 명예, 부, 권력은 황제와 함께 할 수 없다는 동서고금의 사례를 통해서이다. 그
래서 정량과 유기는 목숨과 명예 그리고 가문을 보존할 수 있었다.
제갈공명은 삼국을 정립하고 유명을 달리했기에 이들과는 운명이 달랐다. 

이 중에서 유기는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원나라의 관리로 몇십 년을 봉사하다 벼슬을 내려놓고 홍건적 도적 무리에 불과했던 주원장의 삼고초려를 받고 그의 책사로 종군했다.
 당시 주원장은 무수한 군벌 중에서 ‘넘버 4’ 정도에 해당하는 군소군벌이었다.
물론 원나라는 이름만 남은 껍데기 제국이었다. 유기는 주원장에게 군벌 중 최강자인 진우량과의 정면 대결을 주장했다.
그리고 치밀한 전략과 불같은 투지로 막강한 진우량의 대군과 함대를 파양호에 수장시키면서 중원 장악의 주도권을 잡는데 성공했다.
주원장은 1368년 명나라를 건국했다. 그러나 공신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유기는 공로에 비해 낮은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유기는 단 한마디 불평의 말도 꺼내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명나라 건국 불과 몇 년 만에 아내의 죽음을 이유로 시골로 낙향했다. 고
향에서 유기는 일체 정치와 담을 쌓고 바둑과 술 그리고 시문과 함께 했다. 

유기는 적이 많았다. 그는 원칙적이고 냉정한 인물이었다. 즉 천재들의 공통점이자 단점인 자만과 자존감이 강했다.
남경의 궁궐에서 주원장과 함께 권력을 행사하던 이른바 회서파의 중심 인물들은 항상 유기를 경계했다.
회서파 공신세력은 주원장과 동향출신들로 파벌을 형성하고 또한 성골의식이 강했다.
이들에게 유기는 그저 시골에 있는 은퇴한 노인이 아니었다. 언제든지 자신들의 현재 권력을 대신할 수 있는 강력한 대체재였다.
회서파는 아예 유기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회서파의 모함은 집요했고, 끈질기게 유기를 파고들었다.
처음엔 믿지 않던 주원장도 계속되는 모함에 그만 유기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에 유기는 병을 치료하겠다는 이유로 남경으로 올라와 황제의 옆에 거주했다.
적들의 눈에 뛰어야 덜 경계하고, 덜 두려워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야사에서는 회서파의 우두머리인 이선장과 호유용이 작당하고 독살했다고 하고 또 주원장이 유기의 죽음을 유도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유기는 주원장의 절대공신 37인 중 31인이 중도에 토사구팽 당한 것에 비하면 비교적 편안한 노후를 보냈고 만년의 주원장이 가장 안타까워하고 그리워했던 신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그가 다 놓아버리고, 떠났기 때문에 가능했다. 

 
 

▶천하의 기재, 거지출신 주원장의 책사 

유기는 1311년 저장성 온주 문성현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지주 집단의 핵심이었다. 어
릴 때부터 신동소리를 들을 정도로 똑똑했던 유기의 호는 ‘백온 伯溫’으로 사람들은 그를 유백온이라 불렀다.
그는 천문, 지리, 군사, 유학, 고전, 명리학 등 모든 학문을 섭렵했다.
유기는 원나라 말기 1333년, 22세에 과거 시험에 합격해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관직은 능력에 비해 한참 뒤떨어지는 자리였다. 그것은 원나라의 독특한 계급 구조 때문이었다.
원나라는 제1계급이 몽고인, 2계급이 색목인, 3계급이 북쪽 중국인이었고 마지막 4계급이 남송출신의 사대부였다.
이는 원나라 건국과 통치에 도움을 준 순서였고 남송 출신들은 끝까지 원에 저항했던 사실 때문에 모든 면에서 푸대접을 받았다.
유기는 4계급이었다. 자연히 유기는 지방의 작은 지역을 떠돌았다.
유기는 26세인 1336년 고안현 현승 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 더욱 정진했다. 

그 무렵 푸젠성 해안가에 소금 밀매업을 하는 방국진이라는 해적이 한창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유기는 관의 부름을 받고 토벌군에 참여하여 방국진의 세를 꺾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전멸 직전의 방국진은 뇌물을 써 극적으로 살아남고 오히려 관직까지 받았다.
유기는 이런 부정과 불의에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오히려 좌천당하고 말았다. 유기는 단박에 사표를 던졌다.
더 이상 관리로 일할 수 있는 명분도 의욕도 상실한 것이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유기는 공부하며 한편으로는 일종의 사병 조직을 양성했다.
당시 정세는 곽자흥의 홍건적이 큰 세를 떨치고 있었다. 곽자흥이 죽자 탁발승 노릇을 하다가 홍건적에 가담해 곽자흥의 사위가 된 주원장이 세력을 이어받았다.
주원장은 명목상 홍건적의 우두머리인 한림아를 모시며 2인자의 위치에 있었다.
또한 소금 밀매업자 출신 장사성과, 어부 출신으로 물질에 능숙하면서도 무예가 출중한 진우량이 최대 군벌로 이름을 떨치며 원나라를 무력화 시켰다. 주원장은 이 무렵 이들보다 한 단계 낮은 오국공의 지위에 있었다. 

주원장은 도적 무리에서 나라를 세우고 경영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만 해도 주원장의 주변에는 서달, 탕화, 요영충, 남옥 등 무신들뿐이다. 주원장은 이선장, 호유용을 영입해 관료조직의 틀을 마련했다.
이들은 학문과 능력을 겸비한 유능한 관리들이었다. 하지만 한 자리가 비어있었다.
그것은 정세를 분석해 종합적인 계획을 세워 주원장의 야망을 실현시킬 최고의 전략가였다.
즉 장량과 제갈량과 같은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주원장은 재야에 은둔한 유기의 소문을 들었다.
주원장은 그야말로 삼고초려와 스승의 예로 유기를 자신의 군사로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이때가 1860년이고 주원장의 나이 33세, 유기는 50세 때이다.
주원장은 유기와 함께 명사인 송렴도 영입해 이들을 위해 예현관을 짓는 등 극진한 대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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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 주원장 천하를 위한 판도를 만들다 

유기는 주원장에게 작은 것부터 조언했다.
 
“인재를 아끼고 영입에 주저하지 않으며 전쟁을 하는 중에도 농사의 중요성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다스리는 지역의 형벌은 가급적 가볍게 하고 세금도 융통성 있게 매겨 백성들이 수긍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라의 통치 이념은 유교에 두어야 합니다.”
 
주원장은 당시 남경을 함락하고 세를 확장하고 있었기에 유기의 합류는 그야말로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었다.
유기는 드디어 주원장에게 이른바 국가경영과 통일전략인 ‘시무십팔책’을 올렸다. 

유기는 주원장에게 과감하게 홍건적 때부터 명목상의 왕으로 모시고 있던 한림아와의 결별을 주장한다.
 
“언제까지 저런 목동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을 왕으로 모시고 있어야 합니까. 이제는 주군이 직접 전면에 나서 사람을 모으고, 민심을 수습해야 합니다”라고 제안했다.
주원장은 유기의 조언을 받아들여 한림아와 결별했다.
그리고 주원장의 최대 고민인 진우량, 장사성 두 명의 강력한 군벌과의 전쟁에 있어 유기는 진우량과의 정면 대결을 주장했다.
 
“장사성은 탐욕이 많아 눈앞의 이익에 움직이고 가진 것을 지키려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진우량은 나름 야망과 세를 읽을 줄 알아 그냥 놔두면 장차 큰 화근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우량을 먼저 공략해 그를 무너뜨리면 장사성은 자연히 세를 잃고 천하는 주군의 것이 됩니다”는 논리로 주원장과 그 주변을 설득했다. 

당시 진우량은 양자강 상류에 강력한 함대와 대군을 보유한 중원의 실질적인 최강자였다.
그와의 대결을 주장하는 유기의 논리에 주원장과 장수들은 수긍하면서도 내심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유기는 ‘빠른 결정을 해야 한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상류의 진우량, 동쪽의 장사성에게 협공을 당해 우리는 전선을 한 곳으로 집중하지 못하면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열
심히 훈련하고 빈틈없이 계략을 짠다면 숫자만 우세한 진우량을 충분히 꺾을 수 있다’고 다시 설득했다.
주원장은 결심했다. 전군에 진우량과의 일전을 명령했다.
1363년 주원장의 20만 대군과 진우량의 65만 대군이 파양호에서 부딪쳤다.
전투 초반, 진우량 군대의 인해전술에 질려버린 주원장의 장수와 병사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때 유기가 나섰다. 그는 큰소리로 전군을 지휘했다. 

“물러서지 마라. 투항하거나 도망가는 자는 모조리 참수할 것이다. 적군이 더 깊숙이 우리 진영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라. 그런 다음 매복한 군대로 공격하면 승리할 수 있다.” 

전투는 유기의 작전대로 진행되었다. 초반 기세를 올리던 진우량 군대는 깊숙이 도망가는 주원장 군대를 뒤쫓아 들어오다 그만 외통수에 걸려 무너진 것이다.
 주원장은 대승을 거두었다. 유기는 이 전투에서 승리뿐 아니라 주원장을 목숨을 구하는 공을 세웠다.
갑자기 유기가 주원장을 지휘선에서 내려 다른 함선으로 옮기게 했는데 배를 옮겨 타자마자 곧바로 빈 지휘선에 진우량의 불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졌다는 것.
이처럼 유기는 군사, 천문, 명리를 모두 통달한 주원장 군대의 최고 군사였다.
파양호 전투에서 승리한 주원장은 유기의 계획대로 이미 전의를 상실한 장사성 군대를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주원장이 중원의 실질적인 ‘넘버 1’이 된 것이다. 

▶손잡이 있는 주전자가 다루기 편하다 

1367년, 유기는 이선장 등과 함께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법전을 비롯해 각종 세법과 민생 안정책을 만들어 주원장에게 건의했다.
 나라의 건국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마련한 것이다.
이때 제정된 법률이 조선왕조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 <대명률>이다. 이듬해 주원장은 명나라를 건국했다.
유기는 초대 황제 주원장에게 평소에는 농사를 짓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병사로 징집하는 군위법을 건의했다.
이것은 평소 군사비 지출을 줄이면서 나라의 양곡을 관리하는데 유용한 법이었다. 또 민심을 사로잡기 위해 대사면령을 건의했다. 

주원장은 유기와 만난 지 8년만에 황제가 됐다. 그리고 주원장은 논공행상을 실시했다.
 엄청난 진통이 있었다. 모든 장수들과 문관들은 자신들이 명나라를 건국한 1등 공신이라고 자부했다. 

모두 다 1등 공신인 공작에는 장군으로는 탕화, 서달, 남옥, 요영충 그리고 문신으로는 유기와 이선장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주원장은 자신보다 세 살이나 많지만 자신을 형님으로 모시며 일생을 종군한 공신 탕화를 2등인 후작으로 봉했다.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이것은 주원장의 암시였다.
즉 누가 봐도 1등 공신인 탕화조차 2등 공신이 되는데 ‘어느 누구도 불만을 갖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선장은 1등 공신 공작으로, 유기는 그보다 한참 아래인 백작이 되었다.
봉록에서도 이선장은 4000석, 유기는 겨우 240석뿐이었다. 주원장이 유기를 푸대접하는 것에 모두 의문을 품었다.
하루는 주원장의 동지 같은 아내이자, 현명한 마황후가 직접 주원장에게 물었다. 

“폐하, 이선장은 폐하가 전쟁터를 누빌 때 내정을 잘 이끈 공이 있습니다. 하지만 유기는 천하의 대세를 폐하께 이끈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번 논공행상에서 유기를 이선장 뒤에 두는지 궁금합니다.” 

“나도 압니다. 이선장은 재물과 명예를 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니 능히 재물과 명예로 그를 조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기는 재물과 명예를 탐하지 않아 내 마음대로 그를 부릴 수는 없습니다. 즉 흠이 있는 사람이 부리기도 좋고 내치기도 편한 것입니다.” 

“예, 폐하. 손잡이 없는 항아리보다는 손잡이가 있는 주전자가 다루기 편하다는 말씀이군요.” 

주원장도 유기의 공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대인관계에는 높은 점수를 주지 않은 것이다.
유기는 원칙과 소신에서 절대 타협하거나 굽힘이 없었다. 아무리 황제라도 유기의 이런 점은 불편했던 것이다.
유기는 태사령에 어사중승이 되었다. 그는 관료의 부정부패를 감독하는 직책을 맡은 것이다.
자연히 관료들의 수장인 이선장, 호유용과는 대립관계가 형성되었다. 한번은 이선장의 측근인 이빈이 법을 어겼다.
이선장은 유기에게 선처를 부탁했지만 유기는 단박에 이를 묵살하고 이빈을 원칙대로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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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의 자만이 부른 정적의 모함 

이선장과 호유용은 유기에 대한 반감과 복수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재물과 명예욕이 없고 공신서열에서도 아무런 불평불만을 하지 않는 유기의 흥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 이선장과 호유용이 유기를 제거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주원장이 유기를 불렀다.
당시 이선장은 고령으로 은퇴를 청했고 주원장은 그 후임을 고민중이었다. 이선장을 필두로 한 회서파는 호유용을 차기 승상으로 밀고 있었다. 주원장은 유기에게 양헌, 왕광양, 호유용에 대한 인물평을 물었다. 

“폐하, 이 세 사람 모두 재상의 재목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 중에서도 호유용은 가마를 끄는 말 정도의 능력인데 오히려 날뛰다 가마를 뒤엎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입니다.” 

너무나 솔직하고 직설적인 평이었다. 그러자 주원장은 유기에게 승상자리를 권했다. 

“폐하, 저는 마음이 좁고 그릇이 작아 정무적인 일에는 맞지 않습니다.” 

결국 주원장은 호유용을 차기 승상으로 임명했다.
유기는 호유용이 승상이 되자 은퇴를 청하고 낙향했다. 호유용과 회서파는 주원장에게 유기를 끊임없이 모함했다.
매일 거듭되는 모함은 강도를 더해 ‘유기가 반란까지 모의한다’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주원장이 호유용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맞지 않다. 유기가 천하를 취할 생각이 있었다면 내가 나라를 건국하기 전에 기회가 있었고 유기는 그럴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라고 유기에 대한 신뢰를 드러냈다.
그러자 호유용은 ‘유기가 왕의 기운이 서려있는 곳에 자신의 묏자리를 구했다’는 모함을 더했다.
이번에는 주원장도 마음이 흔들렸다. 유기는 주원장의 의심을 알아채고 남경으로 올라와 주원장을 알현하고 자신의 병을 그대로 드러냈다.
주원장은 ‘1년에 한 번 남경으로 와 나를 알현하라’는 명령과 함께 유기가 고향으로 돌아가 요양하는 것을 허락했다.
1375년, 유기는 고향에서 66세를 일기로 죽었다. 

일설에는 이선장과 공모한 호유용이 유기를 병문안 한다는 핑계로 찾아가 독살했다는 설도 있고, 그것이 주원장의 지시였다는 설도 있지만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유기의 죽음을 주원장이 몹시 애석해했다고 전한다. 유기의 죽음 이후 권력의 단맛에 빠져있던 호유용은 1380년 이른바 국법을 어기고, 권력을 전횡하고, 오랑캐와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무려 1만5000명의 당파와 함께 9족이 모두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10년 뒤에는 이선장 역시 반란죄로 주원장에게 죽음을 당해 명나라 건국 이후 권력의 중심에 있던 회서파 즉 유기를 모함했던 인물들은 전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 처세술 | ‘천재의 오만과 자부심’은 ‘복과 화’를 동시에 부른다 

유기는 송렴, 고계 등과 함께 명나라 초기 시문의 3대가로 불렸다. 또한 장량, 제갈량과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3대 군사 전략가이며 책사로 불린 한마디로 모든 분야에서 월등한 기량을 가진 기재였다.
하지만 그는 장량이나 제갈량 같은 처세학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물론 아무리 귀신같은 처세를 해도 모시는 주군의 인품과 목적에 따라 그 성과가 다르겠지만 유기는 분명 앞의 두 명에 비해 많은 정적을 만든 것은 분명했다.
그것은 천재들이 갖는 강한 자부심과 자존감을 두 명에 비해 속으로 갈무리 하는데 능숙하지 못했다.
그 증거는 유기가 제갈량과 스스로를 비교해 ‘내가 더 뛰어나다’고 여긴 것에 있다. 

유기는 ‘제갈량은 천하를 삼분했지만 나는 천하를 통일했다’, ‘앞의 500년 동안은 제갈량이 있었고 후에 500년은 내가 있다’는 말을 할 정도로 자부심이 넘쳤다.
그가 세상을 유람할 때의 일화이다. 유기가 옛날 촉한 지역에 도착해 하룻 밤 신세를 지내기로 하고 절을 찾았다.
잠을 자는데 새벽녘에 닭이 우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절에서 닭을 키우기는 만무하고 인근에 인가도 없는데도 닭 우는 소리가 들리자 궁금했던 유기는 스님에게 물었다.
 
그러자 스님이 “옛날 제갈공명께서 이 지역에 오셨을 때 흙으로 빚은 닭을 만들어주시고 가셨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뒤부터 그 ‘흙닭, 토계 土鷄’가 저리 웁니다.”
유기는 그 닭을 가져오라 하고 부셔보았다. 그러자 닭에서 글씨가 적혀있는 종이가 나왔다.
종이에는 ‘유기파토계 劉基破土鷄’ 즉 ‘유기가 이 흙으로 만든 닭을 부셔버릴 것이다’라는 제갈량의 예언이 적혀 있었다.
유기는 손수 흙으로 닭을 만들어 스님에게 주었지만 그 닭은 불규칙적으로 울어 쓰이질 못했다고 한다. 

한번은 길을 가다가 제갈량의 사당을 지나게 되었다. 그 앞에 하마비가 있었다.
하마비는 사당에 모신 제갈량에 대한 예의로 ‘누구든 이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표시였다. 유기는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
그러자 말이 한 발도 떼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했다. 유기가 그 밑을 파보니 돌에 역시 제갈량이 남긴 글이 새겨져 있었다.
 
글은 ‘때를 만나면 천하가 이루어지고 함께 힘을 모아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만 운을 만나지 못하면 영웅의 계략도 소용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유기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며 제갈량의 신기에 놀라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제갈량에게 심복하지 않았다.

또 한번은 제갈량을 모신 무덤을 보게 되었다.
인근의 풍수를 살피던 유기는 한탄을 했다. “아니 바로 뒤에 제왕의 자리가 있는데 그곳을 쓰지 않고 엉뚱한데 제갈량이 묻혀 있구나. 천하의 기재인 제갈량도 풍수에는 어두웠구나”하고 혀를 찼다.
하지만 제갈량의 무덤 묘비에 써있는 글을 보고 유기는 제갈량의 무덤에 무릎을 꿇었다.
그곳에는 “충신은 죽어서도 제왕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제갈량의 글이 남겨져 있었다.
 
즉 제갈량은 제왕의 기가 있는 자리를 알고 있었지만 자신은 신하이기에 죽어서도 유비를 모시는 심정으로 제왕자리 옆에 자신의 무덤을 쓴 것이다.
 
유기는 ‘전무후무제갈무후 前無後無諸葛武後’ 즉 ‘과거에도 앞으로도 제갈량만한 영웅은 없다’라고 말하며 제갈량에게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유기의 천재성과 함께 그의 오기를 알 수 있는 일화도 있다.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고 수도인 남경을 보며 흐믓하게 유기에게 물었다. 

“우리 금릉(남경)이 누군가에게 함락될 수 있다고 보는가?” 

“폐하, 오직 제비만이 날아 넘어 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 씨 왕조는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아마도 ‘만자만손 萬子萬孫’일 것입니다.” 

주원장은 유기의 대답에 만족하며 유기를 칭찬했지만 사실 유기는 미래 예측에 대해 사실대로 말한 것이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비록 황제이지만 앞날을 내다보는 명리에 의한 나의 답변의 숨은 뜻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라는 오만함이 숨겨져 있었다. 

첫 번째 대답인 ‘제비만이 넘어올 수 있다’의 경우, 주원장이 죽고 그의 손자인 건문제가 등극한 후 주원장의 아들인 ‘연왕 燕王’ 주체가 쿠데타로 남경을 함락하고 자신이 황제에 올랐다.
그리고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고 영락제가 되었으니 ‘제비 燕’만 넘어올 수 있다는 유기의 말이 들어맞은 것이다.
두 번째 주 씨 천하의 ‘만자만손 萬子萬孫’은 말 그대로는 ‘만대를 이어나갈 정도로 영원할 것이다’이지만, 실제로 ‘만력제 萬曆帝’의 손자인 숭정제 때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멸망했으니 유기의 예언이 귀신 같이 딱 들어맞은 셈이다. 

이처럼 유기는 모든 면에서 뛰어났지만 세상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겸손하지 못한 것이 유일한 단점이었다.
물론 주원장의 독한 성품을 알아채고 “권력은 불덩이 같은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미리 은퇴를 해 큰 화를 면한 것은 그의 처세의 마지막 화룡정점인 셈이다. 유
기는 후대에 태사로 추증되고 문성이란 시호를 받았다.
또한 명나라 이후 최고의 군사전략가, 책사 그리고 명리학의 대가이자 처세에 있어서도 뛰어난 재상으로 중국인들의 추앙을 받았다. 

▷잘하는 것을 전면에, 그것이 처세이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경험이 있다. 경미한 교통 법규를 위반했다. 버스전용차로 위반이다.
우회전이나 좌회전을 하기 위해, 혹은 진출입을 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위반을 하다 적발된 경우다.
아무리 설명하고 억울하다고 말해도 교통경찰관의 단 한마디에 말문이 막힌다. “어쨌든 위반하셨잖아요!” 맞는 말이지만 속으로 울화통이 터지는 경우다.
‘딱지를 떼기 위한 단속이네’, ‘이렇게 융통성이 없이 단속을 하냐’고 항의하고 고래고래 소리 질러도 소용없다.
위반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다. 성공이든, 실패이든 결과에 따른 과정은 구구절절 이야기 거리도 많고, 인지상정으로 넘어갈 수 있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결과만을 따지는 상사가 대부분이다. 그를 원망치 말자. 융통성 없고, 배려심 없다고 뒷담화는 해도 정면에서 반발하지는 말자.
그도 자신의 상사에게 가서 결과에 대해 이리저리 말할 수 있는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직장 처세는 한마디로 경우에 따라 다르고, 복불복이다. 학교 선생님에게 들은 이야기다.
학교에서 담배 피우는 학생을 적발했을 때 그 학생의 성적에 따라 보는 눈이 달라진다고 한다.
전교 석차 10위권 안의 학생이 적발되면 오히려 “공부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까”라는 안쓰러움이 생기고 그래서 눈감고 넘어간다고 한다. 하지만 성적도 안 좋고 문제아 소리 듣는 학생이 담배를 피우다 적발되면 “하여간 가지가지 한다”고 더 야단치게 된다는 것이다.
다 편파적인 선입견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인간관계의 기준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융통성, 배려심, 인정 다 좋은 말이고 그것이 행해지는 순간에는 모두에게 잠시의 평화와 안녕이 보장된다.
하지만 원칙, 엄정, 규정이라는 단어들은 비인간적이고 냉정한 관리자의 기준처럼 작용된다고만 생각하지 말자.
이 두 이질적이고 대칭적인 단어의 적절한 조합이 바로 처세인 것이다.
엘리트는 오만과 자만에, 평범한 자는 자신을 내세우거나 특출 날 것 없는 일상에, 무능한 사원은 잉여 취급에 무너지고 만다.
 
누구나 남보다 잘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회사 업무와 연관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PT용 자료를 누구보다 잘 만들거나, 회의 내용을 한 장으로 요악하는데 능숙하거나, 영어를 잘하거나, 아니면 회사 내 유통되는 정보 수집에 능하거나, 능력은 떨어져도 관, 언론사, 상대 기업 등에 기막힌 인맥이 있다는 것 등등이다.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바로 처세이다.
단점을 덮고, 장점을 부각시켜라. 그것이 엘리트의 능력 뒤에 숨어있는 오만과 자만보다 평범한 당신의 처세가 더 돋보일 수 있는 방법이다. 

[사진 pixabay.com] 

 

박기종 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자료제공 Citylife
발행일 2016.09.21기사입력 201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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