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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양공은 극단의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하나는 예, 인, 의를 중시해 평화 시는 물론이고 전쟁을 할 때도 이를 실천한, 존경할 만한 제후였다는 평가와 명분만 앞세우고 실리 면에서는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는 무능한 제후라는 혹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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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와 ‘무능’의 극단의 평가 

주 무왕의 큰 덕과 그를 보좌한 주문공의 역량으로 은나라를 멸하고 건국한 주나라.
주나라는 봉건제를 채택했다. 이는 천자가 주나라를 다스리고 천자에게 봉분을 받은 각 제후국들이 지방자치와 독립채산제를 이루는 형태였다.
주나라 천자는 각 제후국에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의 5등급 작위를 주었다.
이들 제후국은 평상시에는 주나라에게 세공을 바치고, 전시에는 병사를 보내 주나라를 보호해야 했다. 

주 무왕은 은나라의 후계를 잇는 명분을 송나라에게 주고 가장 높은 공작의 작위를 내렸다. 주나라 건국의 일등공신 강태공, 태공망의 후손에게는 후작의 지위를 주고 제나라를, 당시 오랑캐라고 천대한 초나라에게도 자작의 지위를 주었다.
기원전 1046년 건국한 주나라의 봉건제도는 이후 수백 년간 잘 유지되었다.
그것은 주나라 황실이 권위와 실력을 갖고 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기원전 770년경부터 주나라 천자의 명령이 제후국에 통하지 않았다.
제후국의 힘이 세지고 상대적으로 주나라가 약해진 탓이다.
이때부터 중국은 약 300년간 수많은 제후들이 각기 자신의 세를 과시하는 춘추시대로 접어들었다. 춘추시대는 모든 것이 열린 시대였다.
춘추패자가 되기 위한 각 제후국의 치열한 경쟁은 군사, 정치, 경제, 문화, 사상 등의 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중요시 된 것은 인재였고 그들에게는 물론 출신성분도 중요했지만 개인적인 능력이 우선이었다. 중국의 실사구시 학풍이 이때부터 싹튼 것이다. 

300여 년 간 지속된 춘추시대는 이른바 ‘춘추오패 春秋五覇’를 탄생시켰다.
역사는 이들을 제齊 환공, 송宋 양공, 진晉 문공, 진秦 목공, 초楚 장왕이라 불렀다.
하지만 실질적인 지배력과 힘에서 송 양공을 제외하고 오吳 합려, 월越 구천을 번갈아 넣기도 한다. 송 양공을 춘추오패에 합류시킨 이는 성리학의 대가인 주자이다.
주자는 남송 시절 금나라를 물리치기 위한 북벌을 주장했다.
또한 남송의 한족 정통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춘추시대 당시 오랑캐 취급했던 초, 오, 월을 제외하고 송 양공을 의식적으로 춘추오패의 자리에 앉힌 것이다.
즉 삼국시대 한나라 정통론에 의거, 촉의 유비를 위나라 조조보다 앞에 놓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그렇다면 예와 인을 숭상하고 유학의 경구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실천한 주자가 칭송한 송나라 양공은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양공은 한마디로 극단의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첫째로는 예, 인, 의를 중시하고 평화 시는 물론이고 전쟁을 하는 순간에도 이를 실천한, 존경할 만한 제후였다는 평가이고 두 번째는 명분만 앞세우고 실리에서는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는 무능한 제후라는 평가이다.
이 양극을 달리는 두 가지 평가를 받는 그를 한 가지 잣대로 ‘송 양공은 이렇다’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는 주자에게서 예의 상징적인 인물을 존경과 칭송을 받았지만 마오쩌둥은 그를 ‘미련하고 돼지 같은 군주’라며 경멸할 정도로 관점에 따라 그 평가가 달랐기 때문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의 仁義’는 송 양공을 대표하는 브랜드라는 점과 군주로서 존경할만한 업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의 진면목을 알수록 그가 내세웠던 ‘인의’ 역시 진실된 것인가라는 의문마저 생긴다. 아무튼 송 양공은 중국 역사에서 독특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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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의 양보로 왕위에 오르다 

송 양공은 춘추시대인 기원전 7세기 경 송나라 환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자보였다. 당시 주나라는 이름뿐이었지만 그래도 황실의 권위가 조금은 남아있었다. 그것은 춘추시대 제1대 패자인 제 환공 덕택이었다.
명재상 관중의 보좌로 패자가 된 제 환공은 ‘존왕양이 尊王攘夷’ 사상에 입각해 각 제후국으로부터 주황실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주나라 양왕 원년, 송 환공의 병세가 위중해졌다.
송 환공은 후계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목이, 자보 둘 중에서 선택해야 했다. 목이는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듣고 자란 지혜로운 장남이었다.
하지만 후궁의 자식이라 명분에서 위 문공의 여동생이며 송 환공의 정비가 어머니인 자보에 뒤쳐졌다. 자보는 적장자였다. 송 환공은 먼저 자보를 불렀다. 왕이 되라 했다. 

“저는 왕위에 오를 수 없습니다. 목이는 현명하고 어질고 또한 장남이라 목이가 왕이 되는 것이 예와 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송 환공은 목이를 불렀다. 그리고 왕이 되라 했다. 

“저는 왕위에 오를 수 없습니다. 서자가 적자를 제치고 왕위에 오르는 것은 법도가 아닙니다.” 

목이와 자보는 서로 양보했다. 아예 목이는 위나라로 도망을 가버렸다.
목이는 생각했다. ‘자보가 백번 양보해 내가 왕위에 오르더라도 그 자리를 오래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자보를 중심으로 뭉친 권신들의 세가 워낙 강해 그들이 나를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고, 자보 역시 겉으로는 겸양을 보이지만 이는 내가 양보할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고 그 검은 속은 알 수 없다’는 것이 목이의 판단이었다.
자보가 환공을 이어 송나라의 왕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송 양공이다.
이때가 기원전 651년이다. 송 양공은 목이를 불러 재상의 자리를 맡겼다.
그리고 군사와 정치에 관한 권한을 목이에게 주었다. 목이는 비록 송 양공이 동생이지만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 양공의 명을 받았다. 

당시 춘추패자는 제나라였지만 송나라는 수많은 제후국 중에서도 명분상 가장 높은 서열이었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조상의 뒤를 이어주기 위해 세워 준 나라이며 봉작도 가장 높은 공작의 지위였기에 송나라의 자부심은 남달랐다.
늙고 병든 제 환공에게는 여섯 부인에게서 난 여섯 아들이 있었다.
제 환공은 관중과 상의해 공자 소를 세자로 임명했다. 그리고 은밀하게 소를 불러 계책을 알려주었다. 

“세자는 내 후계이지만 손쉽게 왕위에 오르지는 못할 것이다. 나머지 다섯 형제들이 각기 세력을 모아 저항할 것이다. 지금은 내가 있어 모두 숨을 죽이고 있지만 나와 관중도 떠나면 다섯 공자를 물리치기가 녹록치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해라. 힘과 지략에서 저들을 제압하지 못하면 송나라로 망명했다가 송 양공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라라. 내가 송 양공에게 특별히 부탁했고 송 양공은 인, 의, 예를 잘 지키는 사람이라 너를 도와줄 것이다.” 

환공이 죽자 제나라는 환공의 예측대로 후계싸움이 벌어졌다. 그
때 빠르고 단호하게 송 양공이 개입해 공자 소를 제나라의 왕위에 올리는데 성공했다.
이가 바로 제 효공이다. 이 같은 성공에는 송 양공의 결단도 한 몫 했지만 무엇보다 제 환공의 방책, 송나라 재상 목이, 공손고의 치밀한 계책과 활약이 컸다.
하지만 송 양공은 우쭐했다. 자신이 춘추패자의 나라, 제나라 왕을 만들고, 임명했다는 자부심마저 들었다. 착각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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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나라 제후를 죽인 송 양공의 이중성 

송 양공은 회맹을 소집하자고 제안했다. 자신이 제 환공의 뒤를 이어 춘추패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감추지 않았다.
목이와 공손고는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렸지만 송 양공은 듣지 않았다.
회맹은 각 제후국에 전달되었다. 회맹일이 되었다. 초라하게도 작은 제후국인 조, 주나라 제후들만 와있었다. 

송 양공은 자존심이 상했다. 이때 등나라 제후가 늦게 도착했다.
화가 난 양공은 등나라 제후를 방에 가두었다. 자신의 위엄을 보이려는 의도였다.
이 소식을 듣고 증나라 제후가 이틀이나 늦게 도착했다.
이들 조, 주, 등, 증 등은 사실 나라라기보다는 한 고을 정도의 크기였다.
이들은 송나라 인근 지역이라 송나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송 양공은 증나라 제후를 가두었다. 그리고 대신들을 모아 어떤 처벌을 내릴지 물었다. 

송 양공의 질문에 간신 공자 탕이 나섰다. 

“이번 기회에 군주의 위엄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마침 오랑캐들이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그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공자 목이가 반대를 했다. 

“제사는 사람의 복을 비는 것인데 어찌 사람을 죽인단 말입니까. 그리고 증나라 제후가 늦었지만 사정이 있었는데 이를 보지 않고 작은 일에 큰 희생을 치루는 것은 아닙니다. 그를 풀어주시지요.” 

송 양공은 공자 탕의 의견을 받았다. 증나라 제후는 산 채로 펄펄 끓는 물에서 삶아진 후 제물로 수장되었다.
이를 보고 등나라 제후는 공자 탕에게 뇌물을 주고 겨우 풀려났고 조나라 공공은 겁에 질려 도망가고 말았다.
송 양공의 회맹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오히려 증나라 제후를 잔인하게 죽임으로써 송 양공은 제후들의 인심을 잃게 되었다. 

평소 인과 예를 앞세우는 그가 등나라 제후를 가두고, 증나라 제후를 삶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그의 겉과 속이 다름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일 것이다.
그만큼 송 양공은 한 가지로 정의내릴 수 없는 복합적인 인물이었다.
송 양공은 회맹 자리에서 도망갔다 하여 조나라를 공격했다. 공격군의 대장은 공자 탕이었다. 하지만 조나라의 강력한 수비에 막혀 전투는 큰 성과가 없었다.
이 무렵 송 양공을 자극하는 보고가 올라왔다. 정나라 문공이 자진해서 초나라를 찾아 머리를 숙였다는 것이었다.
송 양공은 초조해졌다. 춘추패자의 자리를 초나라, 노나라, 제나라에 빼앗기는 것이 두려웠다. 이때 공격군을 이끌던 공자 탕이 돌아와 송 양공에게 얕은 계략을 올렸다. 

“초나라를 이용해 군주께서 춘추패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각 제후국 중에서 그래도 힘과 권위가 있는 제후국은 제나라, 초나라입니다. 하지만 제나라는 국내정치가 불안정해 패자의 자리에 대한 욕심이 없습니다. 이에 비해 초 성왕은 욕심도 많지만 힘도 갖추고 있습니다. 초 성왕을 온갖 재물로 유혹해 그가 제후들을 모으도록 한 다음에 그곳에 모인 각 제후들의 힘을 이용해 초 성왕을 누르고 군주께서 패자의 자리에 오르는 것입니다.” 

공자 목이는 이번에도 반대했다.
 
“안됩니다. 초 성왕을 일시적인 속임수로 이용할 수는 있지만 영원히 속일 수는 없습니다. 설사 성공한다 해도 나중에 초 성왕과의 싸움이 불가피합니다. 지금 송나라의 힘으로는 초나라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송 양공은 공자 탕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들고 말았다.
온갖 금은보화를 들고 송나라 사신이 초 성왕에게 가 송 양공의 뜻을 정했다. 욕심 많은 초 성왕은 일단 승낙했다. 이윽고 제나라 녹상에서 송 양공, 초 성왕, 제 효공이 모였다.
 
모이자마자 앉는 순서를 놓고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주나라에게 받은 봉분 기준에 따라 공작인 송 양공, 후작인 제 효공, 비록 왕호를 쓰지만 자작인 초 성왕 순서대로 앉았다.
송 양공은 한껏 기분이 부풀어 올라 한 달 뒤에 모든 제후들이 모여 패자를 뽑는 회맹을 갖자고 제안하고 이를 문서로 가져왔다.
문서 맨 앞은 송 양공, 초 성왕, 제 효공 순서였고 이미 송 양공의 서명이 되어 있었다.
 
제 효공은 “두 분께서 각 제후들을 부르는데 무슨 서명이 필요하겠습니까. 더구나 저는 송나라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으니 저의 서명은 그리 중요치 않습니다”라며 사양했다.
제 효공의 속마음은 초 성왕 뒤에 있는 것이 싫다는 것이었다.
송 양공은 초 성왕에게 “정나라, 진나라, 허나라, 채나라는 초 성왕의 은혜를 입고 있으니 이 나라들은 성왕께서 꼭 불러주시지요”라고 부탁했다. 이 날 모임은 이렇게 끝났다. 

▶쓸데없는 예의로 초나라의 포로가 되다 

본국으로 돌아온 초 성왕은 대신 자문, 장군 성득신을 불러 상의했다.
그는 이미 송 양공의 얕은 수를 다 읽고 있었지만 분노를 감출 수가 없었다.
자문과 성득신은 “송 양공의 제안대로 회맹에 가야 합니다. 그리고 각 제후들을 힘으로 제압해 그 자리에서 주군께서 역으로 패자의 자리에 오르십시오. 저희들이 준비를 다 해놓겠습니다”라고 성왕의 분노를 달랬다.
자문과 성득신은 군사들을 매복시켜 송 양공을 납치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송 양공 역시 신하들과 상의했다. 이번에도 목이가 나서 회맹에 참석하는 자체를 반대했다. “우리는 예와 인을 앞세우지만 초 성왕은 다릅니다. 그는 오로지 이익과 힘만 좇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주군께서 회맹에 참석하시려면 군사를 이끌고 가십시오.” 송 양공은 듣지 않았다.
 
‘모두 시종만 거느리고 오기로 한 약속인데 어찌 군자답지 않게 행동하느냐’가 이유였다. 그러자 목이가 다시 제안했다. “그렇다면 제가 전차 100대를 거느리고 삼 리 밖에 진을 치고 있겠습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송 양공은 이 제안도 거부하고 문관과 시종들만 데리고 회맹의 자리에 참석했다. 

회맹의 날, 제 효공과 노 희공을 제외하고 모든 제후들이 다 모였다.
특히 초 성왕도 많은 수의 시종을 거느렸지만 군대를 이끌고 오지 않았다.
송 양공은 “이것보라. 초 성왕도 군대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 목이의 말을 들었다면 소인배 소리를 들을 뻔 했다”하고 혀를 찼다. 맹주를 추대하기로 한 날이 왔다. 송 양공은 조바심에 나섰다. 

“과연 누가 맹주의 자리에 앉아야 합니까. 초 성왕은 비록 왕호를 쓰지만 자작이고 주나라 천자로부터 가장 높은 예우를 받은 공작의 나라인 송나라의 군주가 맹주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초 성왕은 불같이 화를 냈다. “나를 이곳을 초청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다면 내가 묻겠다. 여기 있는 여러 제후들은 과연 누구 때문에 이 자리에 온 것인가. 나 때문인가, 아니면 송 양공이 무서워서인가?” 

그러자 제후들이 일제히 초 성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때 붉은 깃발이 올라가자 초 성왕 옆에 있던 성득신이 예복을 벗었다. 안에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초 성왕을 따라온 시종들도 일제히 겉옷을 벗자 갑옷이 드러났다.
그들은 초 성왕의 정예병으로 모두 시종으로 위장한 것이다. 송 양공은 성득신에게 잡혔다. 초 성왕은 모든 제후들 앞에서 송 양공에게 6가지 죄를 물었다. 

“송 양공은 함부로 제나라 내정에 간섭해 후계를 정하였고, 등나라의 왕을 감금해 욕을 보였으며 또한 증나라 왕을 잔인하게 수장하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조나라의 수도를 포위에 공격하였고, 힘도, 권위도 없으면서 패자를 꿈꾼 것도 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초나라의 힘으로 제후들을 모아놓고 스스로 맹주자리를 탐낸 것도 죄이다. 이제 송 양공을 감금하고 송나라 수도 수양으로 진격해 천하의 명분을 세우겠다.” 초 성왕이 맹주의 자리에 올랐다. 

초나라 군대는 일제히 송나라 수도 수양으로 진격했다. 송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박기종 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자료제공 Citylife
발행일 2016.09.29기사입력 201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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