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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는 북제, 북주, 수나라, 당나라 등 네 왕조를 모셨고 중간에 우문화, 두건덕까지 무려 7명의 군주를 섬긴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수나라 때는 문제와 양제를, 당나라에서는 고조와 태종을 섬기는 등 왕조의 멸망과 개국이라는 롤러코스터 정국을 누빈 처세의 고수이다.
배구의 처세학이 진정 빛나는 부분은 그가 모셨던 군주들 모두 배구를 능력을 인정했고 그를 아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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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에 처세를 맞춰라 

당나라 말기에 태어나 5대10국의 난세를 살아오며 송나라 개국의 중심이 되었던 인물이 있다. 바로 중국 역사에서 처세의 숨은 고수로 알려진 ‘풍도’이다.
그는 ‘10조원로 十朝元老’로 불리며 ‘5조8성11군’ 즉 다섯 왕조, 여덟 성의 군주, 열 한 명의 임금 아래에서 40여 개의 관직을 맡았고 또한 자신의 집 안방에서 편안하게 생을 마감한 불세출의 처세 고수이다.
그의 처세학의 핵심은 상황과 변화에 민감하게 적응하되 모시는 군주와 특히 백성을 향한 충심만은 변치 않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풍도는 무려 20여 년을 재상으로 일할 수 있었다. 

여기 풍도 못지않은 인물이 있다. 풍도보다 몇백 년 전인 수나라, 당나라 시기의 재상 배구이다. 그는 북제, 북주, 수나라, 당나라 등 네 왕조를 모셨고 중간에 우문화, 두건덕까지 무려 일곱명의 군주를 섬긴 이력의 소유자다.
수나라 때는 문제와 양제를, 당나라에서는 고조와 태종을 섬겼고 특히 왕조의 멸망과 개국의 롤러코스터 정국을 누빈 처세의 고수이다.
또 하나 배구의 처세학이 진정 빛나는 부분은 그가 모셨던 군주들 모두 배구를 능력을 인정했고 그를 아꼈다는 점이다. 

이 중 배구가 스스로 선택해 모셨던 군주는 수 양제와 당 태종이었다.
배구는 이 두 사람에게 각기 다른 충성과 섬김의 방법을 보였다. 양제에게는 리더십에 순응하는 수동적 처세로 일관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직분에 소홀하거나 관리로서 능력 부족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배구는 양제의 야심과 목표를 직시했고 그것에 완벽하게 부응하는 처세를 보였다. 그 대가로 배구는 양제 시절 권세를 누렸던 ‘5인방’ 중의 한 명 즉, 권신으로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반면에 당 태종을 모시는 배구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수 양제에게는 절대적 ‘예스맨’이었던 배구가 당 태종에게는 죽음을 불사한 직언과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당 태종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 간언했던 위징 등 충신들을 아꼈던 현명한 군주였다.
배구가 단순히 당 태종이 간언을 좋아하는 군주라는 것을 깨닫고 변신한 것으로 치부하기에 배구의 처세는 너무나 유연하고 능란했다.
역사는 수 양제와 당 태종에게 보인 배구의 행동을 보고 간신과 충신의 이중적 면모를 동시에 보인 유일한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한마디로 배구는 리더십의 변화에 따라 처세를 맞춘 인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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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제, 북주를 거쳐 수나라 관리가 되다 

배구는 557년 강주 하동군 문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배눌지였고 집안은 명문가였다.
배구는 어려서부터 시문과 역사에 능통했다. 과거에 합격해 관직에 진출한 배구는 590년 수나라 문제로부터 급사랑으로 임명되어 영남지역 위무직책을 맡았다.
그는 번우에서 반란을 일으킨 왕중선을 토벌하라는 명을 받고 남강의 군사 수천 명을 이끌었다. 배구는 관리 녹원과 함께 왕중선을 토벌하고 20여 주의 작은 반란과 민란을 진압하는 공을 세워 수나라 문제로부터 자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중국은 수백 년의 혼란기를 지나 겨우 안정을 찾던 시기였다.
사마 씨의 진나라가 서진과 동진으로 갈라져 420년까지 중원을 지배했지만 동진 말기 이른바 5호16국 시대가 열렸다. 5호는 중원의 지배 세력 즉 한족이 아닌 흉노, 선비, 저, 갈, 강 등 이민족 세력이었고 16국은 동진의 중앙 지배력이 약해지며 지방 귀족과 토족이 이른바 제후국으로 독립적인 지배력을 발휘하며 생긴 국가였다.
 
마치 춘추전국시대의 재현이었다. 이때 제후국 중 가장 강력한 북위가 화북 지역을 통일한 439년에 가서야 5호16국 시대는 정리되기 시작했다. 이후 420년부터 약 160여 년 간 남북조 시대가 열렸다. 한족이 다스렸던 남조는 송, 제, 양, 진 등 4개 왕조가 교체되었다. 

북조는 북위 무제가 강력한 지배력을 발휘했지만 동위, 서위로 분열되었다.
동위는 북제로, 서위는 북주로 교체되었고 581년 북주가 북제를 제압하고 화북지역을 통일했다. 이 당시 북주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황제가 아닌 외척의 신분으로 세력을 떨치던 양견이었다.
그는 자신의 외손을 몰아내고 양위 받는 형식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양견은 손자뻘인 북주의 마지막 황제 정제를 몰아내는 것이 양심에 걸려 고민했다고 한다.
하지만 양견의 아내는 “이미 달리는 말에서 내리기에는 시기를 놓쳤습니다. 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그대로 말을 몰고 가야 합니다”라는 조언을 했고 양견은 이를 받아들여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강력한 북주의 세력을 기반으로 허약한 남조를 정복해 진晉나라 이후 약 320년 만에 통일 국가를 만들었다.
이 양견이 바로 수隨나라의 창업자인 문제이다. 

배구는 본래 북조에서 갈라진 북제北齊에서 처음 관직을 시작했다.
영민하고 성실했던 배구는 탁월한 실력을 발휘해 동료에 비해 승진이 빨랐다. 하지만 동위의 실권자였던 고양이 세운 북제는 황제의 폭정과 함께 간신들의 정치 농단으로 위기에 빠졌다. 북제의 지배권을 놓고 동위 때부터의 무신세력과 새로운 한족 귀족 간의 치열한 권력다툼으로 북제는 서서히 내부에서 붕괴되었다.
이런 혼란한 시기에도 무능한 황제는 배구만은 신임하고 아꼈다고 한다. 

북제는 577년 북주北周에게 점령당했다. 배구는 새로운 지배자인 북주에서도 그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배구는 관리로서의 업무 처리 실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정직하고 청렴해 북주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우문호가 557년에 세운 북주는 실사구시의 정책으로 화북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제3대 무제가 북제를 평정하고 중국의 중심 세력이 되었지만 이후 그의 아들인 선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서서히 나라의 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때 새로운 권력으로 떠오른 이가 바로 수 문제였다. 양견은 581년 북주의 마지막 황제 정제로부터 양위를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나라 이름을 수나라로 지었다. 

▶수 양제의 야망을 읽고 측근으로 발탁 

배구는 여전히 수 왕조에서 문제를 보좌하는 참모로 활약했다.
특히 그는 다방면에 박학한 지식과 뛰어난 기획력, 논리적인 지략의 소유자로 문제의 총애를 받았다. 문제는 당시 돌궐과의 외교관계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돌궐은 중국의 북쪽인 만주일대부터 서쪽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력한 집단이었다.
 
이들은 훗날 투르크족이라는 이름으로 중동지역에서 힘을 떨쳤다. 비록 수나라가 한나라 이후 최초의 통일 왕국을 세웠지만 위로는 황궁에서, 아래로는 지방의 말단 현까지, 국가의 틀과 황제의 권위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기병을 주축으로 하는 돌궐의 약 40만 명의 군대는 수나라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실제로 수 문제 때는 돌궐의 대대적인 공격 앞에 수나라는 수도까지 함락 당할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배구는 돌궐의 역사와 현재의 정세에 대해서도 전문가였다.
배구는 “힘이 강한 돌궐을 정면에서 공격하는 것보다는 그들의 힘을 양분하여 힘을 약화시키는 전략이 필요합니다”라는 계책을 문제에게 올려 돌궐 지배세력에 대한 분열을 시도했다. 두 세력이 첨예하게 부딪치고 있던 돌궐은 배구의 이간질에 당했다.
 
당시 돌궐은 크게 동돌궐과 서돌궐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들은 전쟁 시에는 단합했지만 서로 어느 한 쪽이 돌궐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을 경계했다. 배구는 이를 이용했다.
서돌궐에게 지원을 비밀리에 약속하고 동돌궐에 대한 공격을 부추겼다. 그리고 서돌궐 내에서도 여러 부족의 수장들에게 서로를 시기하고 믿지 못하게 하는 이간정책을 시행했다. 이를 위해 수나라 황실과의 혼인정책을 교묘하게 이용했고 그 결과 돌궐의 수많은 부족은 서로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화살 하나 날리지 않고 돌궐문제를 해결한 배구에 대한 수 문제의 신임은 더욱 깊어졌다. 

번성하던 수나라에도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후계 구도였다.
문제에게는 장남 양용과 차남 양광이 있었다. 태자는 장남 양용이었다.
하지만 둘째 양광은 야심가였다. 그는 589년 남조의 진나라를 점령할 때 공격군의 사령관으로 활약하는 등 수나라 개국에 일정 지분이 있었다.
 
600년 양광은 조정 내의 자신의 세력과 결탁해 태자를 모함해 쫓아냈다.
그리고 자신이 태자가 되었다. 604년 아버지 문제의 병이 깊어지자 양광은 패륜을 저질렀다. 친히 칼을 빼들고 군사들과 함께 문제의 침전에 침입해 아버지이자 황제인 문제를 살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가 바로 중국 역사의 문제적 황제 수 양제이다. 

비록 패륜아였지만 양제는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황제였다.
문제는 검소하다 못해 인색한 황제였다. 양제는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으로 온 나라를 공사판으로 만들었다.
그가 남겨준 황실의 재산과 국고는 풍족했다. 양제는 중국 대륙의 남북을 연결하는 대운하 공사를 시작했고 만리장성을 새로 축조했으며 호화로운 궁궐을 지었다.
그리고 돌궐, 토욕혼 등 변방의 부족들을 공격해 수나라에게 조공을 바치게 하는 정복정책을 실시했다. 수 양제는 원래부터 서역에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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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양제의 ‘예스맨’으로 활약하다 

배구는 생각했다. 그는 수 양제의 성격에서 ‘이벤트’와 ‘퍼포먼스’에 강한 집착을 간파했다.
배구는 스스로 서역 근무를 자처했다.
서역은 약 40여 개 토호세력이 형성되어 있는 복잡하고 위험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이 지역은 중국과 서방, 중동의 문물과 문화를 연결하는 중계소로 금과 꿀이 넘쳐나는 지역이었다.
 
배구는 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몇 년간 배구는 서역을 돌아다니며 이 지역의 모든 부족, 의복, 양식, 문화, 지리, 자원, 인종 등을 기록한 <서역도기 西域圖記> 3권을 집필했다. 그리고 이를 수 양제에게 올렸다. 

또한 배구는 이 지역의 10여 개 부족을 설득해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도록 했으며 나머지 국가들도 참여하는 대규모 무역거래를 수나라 수도 낙양에서 이루어지도록 만들었다.
 
대단한 외교적 성과였다. 이로 인해 그동안 변방에서 이루어지던 무역거래가 수나라의 중심부로 이전되었고 이는 수나라는 물론 양제에게도 막대한 부의 축적을 가져왔다.
 
배구가 새로운 실크로드를 개척한 것이다. 수 양제는 배구의 공을 높이 사 비단 500필을 하사했고 606년 배구를 황문시랑에 임명해 측근에 두고 모든 국정에 자문을 구했다. 

수 양제는 배구의 청에 따라 서역을 직접 순시했다. 배구는 서역 국가들을 설득하고 위협해 수 양제의 친정길에 각종 보물을 진상하고 환영하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리고 서역 국가들의 무역상, 무용단, 악단 등을 수나라 수도 낙양으로 불러 몇 달 씩 축제를 열었다. 수 양제는 배구의 모든 행동이 마음에 들었다.
 
양제는 자신이 낙양의 황궁에서 전 세계를 지배하는 최고의 황제가 되었다는 자부심으로 충만했다.
수 양제는 배구를 은청광록대부로 승진시키고 “배구는 나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내가 마음 속으로 생각한 것들을 배구는 실현시키는 재주가 있다. 어찌 그 충성스런 마음을 내가 높이 사지 않겠는가”라며 극찬하고 40만전의 상금을 내렸다.
그리고 배구에게 국가와 황실의 기밀을 관장하는 업무를 맡겼다. 배구는 우문술, 우세기, 배온, 곽연 등과 함께 이른바 ‘수 양제의 5인방’으로 막강 세도가가 되었다. 

서역과 북방을 정리한 수 양제의 관심은 동쪽으로 향했다. 그것은 바로 고구려였다.
수 양제는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 고구려를 정복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양제의 아버지 수 문제는 고구려 영양왕에게 편지를 보내 조공을 바치라 했지만 영양왕은 오히려 598년에 수나라 영주총관을 기습했다.
 
수 문제는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했다. 6월에 시작한 전쟁은 9월에 종료되었다.
역사는 이때의 상황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다. 다만 ‘여러 이유로 수나라 군 10명 중 8, 9명이 죽거나 다쳤다(死者十八九)라고 간단하게 기술했다. 변방의 작은 나라라고 여긴 고구려에게 패한 것에 무척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배구는 수 양제의 명에 따라 고구려와의 외교도 전담했다.
배구는 직접 고구려를 찾아가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라는 명령을 전달하기도 했다. 당연히 고구려는 듣지 않았다. 배구는 수 양제의 고구려 원정 논리를 만들었다.
 
“본래 고구려는 고죽국으로 주나라가 기자로 임명한 곳입니다. 또한 한나라, 진나라 때 군이 설치되어 있었던 지역으로 당연히 폐하에게 조공을 바쳐야 합니다. 또한 선제인 문제께서 원정을 하셨지만 성공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폐하께서 그 마무리를 하셔야 합니다.” 

612년 수 양제는 무려 113만 대군을 휘몰아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살수에서 을지문덕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수 양제의 고구려 원정 실패의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수나라의 존립을 흔든 대사건이었다. 수년간에 걸친 대역사로 국고를 낭비했던 양제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다시 백성의 땀과 피를 강요하는 2차 전쟁을 준비했다. 그때가 613년이었다. 배구는 이때도 수 양제의 그릇된 야망을 말리지 않았다. 

양제가 원정군을 이끌고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
수 양제는 할 수 없이 군대를 돌려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수나라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박기종 커리어코칭칼럼니스트자료제공 Citylife
발행일 2016.10.06기사입력 201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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