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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1. 관복 차림의 김육 초상. 실학박물관 소장.

 
조선 600년 역사를 통틀어 가장 획기적인 제도를 꼽자면 단연 ‘대동법’(大同法)이다.
조선왕조는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양민들에게 호(戶)당 중앙의 공물(貢物)·진상(進上)과 지방의 관수(官需)·쇄마(刷馬, 지방에 공무를 위해 마련된 말) 등 다양한 세금을 부과했다.
조선중기 이후 세금을 물지 않는 양반층의 토지 점유가 확대되고 임진왜란 등 전란으로 경작지가 대폭 감소하면서 농민부담이 크게 가중됐다. 

각 지역의 특산품을 바치게 하는 공물은 자연재해 등으로 생산에 차질이 생기더라도 반드시 내야 하는 세금이어서 폐단이 더욱 컸다. 거
주지에서 생산되지도 않는 공물을 배정해 백성을 착취하는 관리들까지 설쳐댔다. 대동법은 온갖 명목으로 백성의 고혈을 짜던 세납(稅納)의 품목을 쌀로 단일화하고 토지 1결(結, 1등급 농지를 기준으로 1결의 넓이는 1만809㎡, 등급이 낮아질 수록 결의 크기가 확대)당 12말(1말은 약 18ℓ) 씩을 납부하게 한 제도이다.
이렇게 거둬들인 대동미는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 배분했는데 관청들은 소요 물품·노동력을 공인(貢人)들에게서 납품받고 그 댓가로 쌀을 지급했다.
산간지방이나 불가피한 경우에는 쌀 대신 베·무명·돈으로 대납도 가능했다. 

호(戶)당 징수가 결(結)당 징수로 바뀌면서 부호(富豪)들의 부담이 늘었지만 가난한 농민의 고충이 줄고 국가도 전세수입의 부족도 메울 수 있었다.
대동법 실시 후 등장한 공인은 산업자본가로 성장하면서 수공업과 상업발달을 이끌었으며 화폐유통과 운송활동도 확대됐다.
이 같은 경제변화는 농민분화를 촉진시켜 조선후기 신분질서의 와해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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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중국의 화가인 맹영광이 1640년대 그린 김육의 반신상. 실학박물관 소장.

이 대동법의 시행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인물이 있다. 바로 조선 최고의 경제학자로 추앙받는 김육(1580~1658)이다.
그는 서울 마포에서 출생했으며 본관은 청풍이다. 선조 38년(1605)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 유생이 됐다.
광해군 때 성균관 장의(掌儀, 성균관 예식을 주관하던 직위)로서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 5인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대북파 영수 정인홍의 반대로 좌절되자 정인홍의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해 정계와 학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이 일이 화근이 돼 과거 응시의 기회를 박탈당하자 성균관을 나와 10년간 경기도 가평 잠곡에 은거하면서 농사와 학업에 전념했다. 광해군이 물러난 인조 1년(1623) 유일(遺逸, 초야에 은둔하는 선비를 찾아 천거하는 인재 등용책)로 벼슬에 나왔다.
첫 관직은 종6품의 의금부도사였으며 이듬해 44세의 나이로 문과에 응시해 급제했다.
김육은 일생동안 4번 중국에 갔다. 3번에 걸쳐 북경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한번은 심양에서 장기간 체류했다.
잠곡에서 주경야독하던 생활을 통해 백성들의 어려움을 몸소 체험하고 사행을 통해 중국 문물을 접하면서 대동법과 화폐사용 등의 경세관념을 확고히 했다. 

1638년(인조 16) 충청관찰사가 되면서 대동법의 시행을 강력하게 건의한다.
김육은 대동법의 실시가 백성을 구제하는 방편이면서 국가 재정 확보에도 도움이 되는 시책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의 반발이 드세 성사시키지 못했다. 효종의 등극과 함께 우의정에 제수된 김육은 임금에게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주청했다. 김집(1574~1656) 등 산림 세력이 “국가재정을 파탄 내려고 한다”고 들고 있어났다.
집념의 화신이었던 김육을 꺾을 수는 없었다. 1651년(효종 2) 드디어 호서지역에서 대동법이 시행됐다. 이어 1658년(효종 9)에는 호남지역으로 확대됐다.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전라도 대동법안을 유언으로 상소할 만큼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의 부음을 들은 효종은 “국사를 담당하여 김육과 같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안타까워 했다. 

그는 백성을 삶을 윤택하게 하고 나아가 국가 기반의 안정을 도모하는데 골몰했다. 그가 이를 위해 대동법과 함께 관심을 보였던 것이 화폐였다.
그는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유통경제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1651년(효종 2) 상평통보(常平通寶) 주조를 건의해 서울과 서북지방에서 쓰이도록 했다.
백성의 편리한 생활을 위해 수차(水車) 사용 등 농사기술의 개선, 수레의 사용, 서양역법의 영향을 받은 시헌력(時憲曆) 도입을 통한 역법의 선진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기근 등 각종 재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할 목적으로 ‘구황벽온방’을 편찬했으며 서울의 각 개천을 준설해 가뭄 등의 재난을 미리 예방하자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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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중국의 화가인 호병이 그린 1637년 그린 송하한유도. 김육이 소나무 밑을 거닐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실학박물관 소장.

그는 주자학적 명분론이 팽배하던 17세기의 분위기를 감안할 때 보기 드문 개혁 정치가였다. 학계에서는 따라서 그를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김육은 알프레드 마샬이 경제학자의 덕목으로 언급한 ‘냉철한 두뇌와 따듯한 가슴’을 몸소 실천했던 것이다. 

김육의 가문은 증조부대부터 중앙의 요직에서 멀어지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더욱이 부친인 김흥우는 31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임종 당시 부친은 김육을 불러 가문을 일으키라고 명하고 또한 평생 술을 입에 대지 말라고 유언했다.
쓰러져 가던 청풍 김 씨 가문은 김육대에 크게 일어나 경화사족(京華士族, 한양에 기거하는 문사권력층)의 반열에 오른다. 

김육의 초상화는 전신관복본, 반신상, 송하한유도(松下閒遊圖)가 전해온다.
실학박물관 소장품인 3점의 그림은 이마가 넓고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얼굴형, 하얗게 샌 수염, 흐린 눈썹 등이 모두 흡사하다.
반신상은 명말 청초 화가인 맹영광(孟英光)이 그렸다. 소나무를 배경으로 거닐고 있는 모습을 그린 송하한유도는 명나라 화가인 호병(胡炳)의 작품이다.
 
 중국에서의 그의 활동 등을 근거로 1637년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송하한유도는 소상(小像)인데도 인물의 초상성이 강조돼 있다. 21대 왕인 영조(재위 1724~1776)가 김육에 대한 흠모의 마음을 담은 어제찬(御製贊)을 이 그림에다 남겼다. 

“윤건(비단으로 짠 두건)에 학창의(흰빛에 소매가 넓고 옷 가장자리를 흑색으로 꾸민 옷) 입고 솔바람에 서 있는 사람, 누구를 그린 것인가, 잠곡 김공이라네. 오래 전 신하로 나라 위해 충정을 다했고, 옛사람의 의를 본받아 마음을 다하고 공경히 직분을 다하였네. 대동법을 도모하고 계획하니 신통하도다. 아 후속들은 백대가 지나도 우러르고 공경할지니. 신미(1751) 이월.” 

 

 

배한철 기자자료제공 매일경제
발행일 2016.10.25기사입력 201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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