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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세자 시절 임진왜란을 겪었고 전후 조선의 복구를 책임진 왕이었다.
그의 세자책봉과 국왕 즉위 그리고 반정으로 인한 축출까지 우리는 광해군에게서 현명한 군주와 폭압 군주의 양면성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 벌어지면서 광해군은 세자로 급하게 책봉되었고 그 역할을 다했지만 선조는 광해군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광해는 문제적 군주가 된 것일까.
그의 리더십의 가장 큰 결함은 자기를 대신할 ‘누군가의’ 존재를 이겨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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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에는 성공, 내치는 실패한 군주 

조선에서 임금이 바뀌는 경우는 딱 한 가지뿐이다. 왕의 죽음과 세자의 즉위이다.
물론 정종이 태종에게, 태종이 세종에게,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를 한 경우도 있지만 이는 권력의 선순환이었다. 하지만 죽음도 양위도 아닌 예외가 있었다.
‘반정 反正’ 즉, 왕이 자리에서 쫓겨나고 새로운 왕이 즉위한 사례가 두 번이나 있었다.
국가의 통치이념이 ‘충忠 효孝 예禮 인仁 의義’인 유학의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16세기 초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과 17세기 초 광해군 때의 인조반정이 그것이다.
물론 이것은 ‘역성혁명’이 아닌 반정이었고 조선 왕조는 이 씨 왕통을 이어나갔다.
이 중에서 연산군의 경우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폭정과 두 번의 피비린내 나는 사화, 패륜 등으로 사대부는 물론 백성들의 반감도 극에 달해 권좌가 바뀌었다.
역사는 연산을 몰아낸 중종반정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하지만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에 대해서는 상반된 시각이 존재한다.
과연 광해군은 연산군처럼 폭정에 실정을 거듭한 것인가. 혹은 당시 민심이 이반되고 국론은 분열되어 그의 통치가 조선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던 것인가.
광해군을 연산군과 같은 동격의 패륜적 군주로 단정하기에는 몇 가지 의문이 있다. 물론 광해군은 세종, 성종, 정조처럼 성군도 아니었다.
그는 세자 시절 임진왜란을 겪었고 전후 조선의 복구를 책임진 왕이었다. 

그의 세자 책봉과 국왕 즉위, 통치와 반정으로 쫓겨날 때까지 우리는 광해군에게서 현명한 군주와 폭압 군주의 양면성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광해군의 아버지 선조는 무능력하면서도 질투심 많고 또한 적통이 아닌 방계에서 왕이 되었다는 열등감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산 군주였다.
그런 선조에게 광해군은 믿음직스럽고 사랑스런 아들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적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조는 자신의 후계만은 적장자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본인이 겪었던 방계 출신의 서러움을 풀고 싶었다. 불행하게도 선조의 소생 왕자 13명은 모두 서자였다.
임진왜란이 벌어지면서 광해군은 급하게 세자로 책봉되었고 그 역할을 다했지만 끝까지 선조는 광해군을 인정하지 않았다. 

선조는 자신이 죽는 순간 늦둥이 적통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지만 젖먹이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는 현실을 감안해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광해군은 잘하고 싶었다. 명군이 되고 싶었고 당쟁을 탕평으로 이끌고 싶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결국 자신의 친형과 이복동생을 죽이고, 비록 서모이지만 인목대비를 폐서인으로 만들었다.
광해군의 통치, 특히 외교술은 절묘했다. 당시 명청 교체기의 급변하는 정세에서 광해는 명분보다 실리를 선택했다. 하지만 이 같은 선택은 광해군에게 악수가 되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우리를 지원한 명나라를 배반하고 오랑캐와 손을 잡는 것은 오랑캐와 같은 짓이다”라는 명분으로 광해를 몰아낼 결심을 굳힌 것이다. 

서인 세력은 그에게 무려 36가지의 죄를 물으며 임금의 자리에서 쫓아냈다.
하지만 역사는 말한다. 오히려 광해군이 왕위에서 폐위된 가장 큰 원인은 형인 임해군, 적통인 영창대군의 존재라고.
언제든지 자신이 실수하기만을 기다리는 강력한 대체재가 존재하자 광해군은 명군이 될 수 있는 자질을 점차 상실하고 왕권만을 지키는데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를 이용해 권력을 유지하려는 대북파, 특히 간신 이이첨의 농간이 있었다. 그럼에도 광해군이 대동법을 실시해 백성의 삶에 숨통을 틔게 했고 또한 실리적인 외교를 통해 큰 전쟁을 막아낸 공로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문제적 군주 광해, 그의 리더십의 가장 큰 실수는 자기를 대신할 ‘누군가의’ 존재를 이겨내지 못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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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변덕을 이겨내고 국왕이 되다 

광해군은 1575년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장남은 임해군이다.
하지만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 김 씨는 광해군이 불과 3세 때 죽었다.
광해군에게 닥친 첫 번째 불행이었다. 선조는 임해군은 물론이고 광해군조차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정비인 의인왕후는 소생이 없었다. 선조의 총애는 후궁 인빈 김 씨에게로 쏠렸다.
특히 인빈 김 씨 소생의 신성군을 선조는 무척 예뻐했다. 선조는 세자 책봉을 미뤘다.
서자 왕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장남인 임해군은 성정이 포악하고 사나워 선조는 물론이고 대신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다음 서열은 차남 광해군이었다.
똑똑한 광해군이 세자의 적임임을 선조도 알고 있었지만 마음은 신성군에게 있었다. 

중신들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 선조가 차일피일 시간을 끌던 중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선조는 황망하게 백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평양성에 도착한 선조는 어쩔 수 없이 ‘분조 分朝’ 즉 조정을 두 곳으로 나누면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국왕의 일을 대행하게 했다.
또한 광해를 정비인 의인왕후의 양자로 들였다. 광해군에게 정통성을 부여한 것이다.
그 무렵 공교롭게도 피난길에 올랐던 신성군이 의주에서 병사하고 만다. 

광해군은 의병을 모으고, 전라도에서 군량미를 수급하고, 민심을 다스리며 전시 정부를 총지휘했다.
선조는 의주에서 명나라로 넘어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도탄에 빠진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데 온 힘을 다했다.
선조는 묘하게도 광해군의 활약이 클수록 그 존재감이 부담스럽기 시작했다. 선조는 세자를 견제하고 경계했다. 

7년의 긴 전쟁이 끝났다. 조선의 모든 것은 망가졌지만 선조의 아집은 그대로였다.
명나라에 광해군의 세자 책봉 사실을 알렸지만, 그들은 광해군이 적자도 아니고 더구나 서자 중에서도 장남이 아니라는 이유로 승인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자 선조 역시 광해군에 더 차갑고 더 냉정해졌다.
1600년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죽고 1602년 김제남의 딸이 선조의 두 번째 정비로 들어왔다. 그녀가 바로 인목왕후이다. 

운명은 묘하게도 흘렀다. 인목왕후가 1606년 선조의 아들을 낳은 것이다. 그
가 바로 비운의 왕자 영창대군이다. 선조는 늦둥이 적자인 영창대군이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자연히 세자인 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태도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세자가 왕에게 매일 문안 인사를 하는 것은 관례였다.
선조는 어느 날, “명나라에서 책봉도 못 받는 것이 어디서 세자 행세를 하느냐?”며 노골적으로 광해군을 냉대했다.
광해군은 세자의 자리에서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그의 두 번째 불행인 것이다. 

1608년 선조의 병이 깊어졌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유지를 남겼다.
아무리 광해군이 밉고 영창대군이 예뻐도 서른 살이 넘은 장성한 아들을 제치고 두 살짜리 젖먹이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서 중신들을 불러 “내 사후에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탁한다”는 당부를 남겼다.
하지만 영의정 유영경은 인목왕후를 찾아 “영창대군이 왕위를 잇고 왕후께서 수렴청정을 하셔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인목왕후는 유영경의 말을 거부하고 선조의 유지대로 광해군에게 옥새를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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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 강화 명목으로 형과 아우를 죽이다 

광해군은 조선의 제15대 국왕이 되었다. 광해군은 생모인 공빈 김 씨를 공성왕후로 추존했다. 그동안 세자 시절부터 광해군을 지지해온 대북파인 정인홍, 이이첨 등이 권력의 실세가 되었다.
유영경은 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알아서 사임을 했지만 대간들의 탄핵을 받고 귀양을 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즉위 초 모든 권력을 대북파에게 주지 않았다. 그는 영의정에 남인 이원익을, 서인 이항복은 좌의정에 임명하는 탕평책을 펼치고 모든 국력을 조선의 복구에 집중했다.
그 첫 시작이 바로 대동법이었다. 

광해군은 이원익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물과 방납의 폐해로 심하게 고통 받는 백성들을 위해 일정량의 쌀로 세금을 대신하는 대동법을 경기도부터 실시했다.
이는 획기적인 조세제도의 개혁이었다.
가구 수가 아닌 토지의 실소유로 세금을 매기는 것으로 기득권 세력에게 격렬한 권력 투쟁의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광해군에게 국왕으로서의 첫 시련이 찾아왔다.
명나라의 국왕 책봉 승인이 떨어지지 않은 것이다.
명나라에서는 “장자인 임해군이 왜 왕위를 계승하지 않고 차남이 왕이 되었는가. 이를 조사하겠다”고 조사단까지 파견했다.
대북파는 이번 기회에 임해군을 제거해 불씨를 아예 꺼버리자고 했지만 광해는 듣지 않았다. 왕권 유지도 중요하지만 친형을 죽일 수는 없었다.
명나라의 조사단은 대북파의 뇌물공세에 넘어갔다. 1609년 명나라는 광해군을 조선의 국왕으로 인정했다.
그해 강화도에 있던 임해군이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역사는 이이첨이 사주해 임해군을 살해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이첨의 과도한 충성인가 혹은 이이첨이 광해군의 속마음을 읽고 악역을 담당한 것인가.
아마도 이이첨의 입장에서는 주군의 정적을 제거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은 것임에 틀림없다. 

조정은 조금씩 안정되어 가고 국토는 전쟁의 참화에서 복구를 시작했다.
궁궐도 새로 짓고,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한 광해군의 각종 정책들은 시행되었다.
하지만 중신들의 관심은 권력의 유지와 쟁취였다. 대북파에게는 최대의 정적이 남아있었다. 바로 영창대군이다. 영창대군은 선조의 적통 아들이며 궁중의 큰 어른인 인목대비의 아들인 것이다.
광해군 역시 영창대군이 위협적인 존재임을 잘 알고 있었다. 드디어 사건이 벌어졌다. 

1613년 ‘칠서의 옥 七庶의 獄’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권력에서 밀려나 있던 서인의 영수 박순의 제자인 박응서가 서양갑, 심우영 등 7명의 서자를 모아 모반을 계획했다.
“임금도 서자인데 우리가 언제까지 이 대접을 받고 살아야 하는가?” 자금을 모으기 위해 강도질을 하는 등 재물을 축적하던 이들이 어느 날 그만 발각되었다. 이들은 포도청에 감금되었다. 역모사건이라 하기에는 구체적인 정황이나 준비가 미흡한 그저 ‘사회 불만 세력의 저항’ 정도의 사건이었다. 이이첨에게는 하늘이 준 기회였다. 

이이첨이 박응서를 회유했다.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자백하면 살려주겠다.” 궁지에 몰린 박응서는 거짓자백을 했다. 부원군 김제남은 모든 권리와 명예를 빼앗기고 처형되었다.
그러나 사건은 그 정도에서 마무리되지 않았다. 대북파의 사주를 받은 삼사의 대간과 유생들은 영창대군을 유배하고 인목대비를 폐서인 할 것을 주장했다. 오
직 이항복, 이덕형 등 중신들만이 인목대비의 폐모를 반대했다. 1614년,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떠났다. 이때 영창대군의 나이 겨우 8세였다.
그해 강화부사가 영창대군을 방에 두고 밖에서 문을 걸어 잠궜다. 그리고 아궁이에 뜨겁게 불을 지펴고 영창대군을 질식사 하게 만든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에 대해 원한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1615년 진릉군, 능창군 등 왕족이 연루된 사건이 발생했고 이들은 모두 귀양 가거나 죽임을 당했다.
여기서 주목할 인물이 바로 능창군이다. 그는 선조의 다섯 번째 아들인 정원군의 둘째 아들이다. 그의 형은 능양군으로 후일 인조가 된다.
역사는 능양군이 동생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광해군에 대한 반감과 함께 복수를 결심했다고 한다. 이이첨 등 대북파는 마지막 한 수를 두었다.
1618년 인목왕후를 폐비로 만들고 서궁에 유폐 시킨 것이다. 

광해군도 인간적인 고뇌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친형을 죽이고, 어린 동생도 죽이고, 조카도 죽이고 그리고 비록 서모이지만 대비이자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모한다는 것은 아무리 왕이지만 도덕적인 지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광해군도 잘 알았다.
더구나 조선을 지탱하는 관료집단이자 사대부들이 신봉하는 유학의 관점에서 광해군은 분명 패륜이라 비난 받아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박기종 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자료제공 Citylife
발행일 2016.11.03기사입력 201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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